#244. <외전> 그와 그녀의 사정 I(3)
호텔 복도를 차분하게 걷는 동안 둘 중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삐빅, 철컥.
카드키를 대자마자 열리는 객실 문.
베릴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니콜 교수가 잠시 멈칫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달칵.
문이 닫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객실 안에 있었다.
적막한 가운데, 숨소리만이 들렸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입술을 포갰다.
***
감겨 있던 눈이 떠지고 난 후, 니콜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걸까.
머릿속에선 베릴과 함께 했던 지난밤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꿈은 아닐까?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어디선가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깼어?”
침대 위의 조명에만 의지해 약간은 어두운, 그러나 사물의 윤곽은 충분히 보고도 남을만한 밝기의 객실 안으로 베릴이 들어오며 묻고 있었다.
한데, 두 손에 쟁반을 들고 있다.
피식.
니콜은 다시금 웃고 말았다.
어딜 갔나 했더니…….
룸서비스라도 시킨 모양이다.
침대 옆으로 끌어다 놓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쟁반에는 치즈와 함께 와인병, 그리고 와인잔 두 개가 놓여 있다.
이내 와인병에서 코르크 마개를 뽑는 베릴을 이불 안에서 고개만 내밀고 쳐다보던 니콜은 또다시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란 라세르바.
스페인산 와인 중에서도 고급 와인을 뜻하는 용어다.
지금 베릴이 따고 있는 와인 역시 이에 속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이기도 했다.
베릴의……저런 세심함이 좋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손길로 와인을 따고, 마치 자신이 소믈리에라도 되는 듯 능숙하게 잔을 채우고 있는 베릴을 니콜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젖어서 늘어진 긴 머리칼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고요한 눈동자도.
멈칫.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니콜의 손길에 베릴이 조금 긴장한 듯 움직임을 멈추자, 니콜이 손을 내려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제야 다시 손을 움직이는 베릴.
그가 내미는 와인잔을 받아드는 니콜. 그녀는 베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왜지?”
“뭐가?”
서로 물으며 잔을 부딪쳤다.
와인잔을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곤 니콜이 묘한 미소를 머금는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
입안에 와인을 머금은 채 베릴이 잔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말했잖아.”
“…….”
“후회하고 있는 중이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하아.”
살짝 휘어진 눈을 보건대 니콜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하긴.
섬세한 성격과 더불어 불같은 성정만큼이나 머리가 좋은 여자다.
그런 그녀가 베릴이 하는 말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러는 건…….
확인하고 싶은 걸 테지.
“좀 더….”
“좀 더?”
대답을 망설이던 베릴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후우,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야.”
니콜이 풋하고 웃고는 속삭였다.
“우리 락스타께서 대체 뭘 깨달은 걸까?”
베릴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얘기했다.
“함께 하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 대답이 되었어?”
씨익.
니콜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낙제는 겨우 면하겠네.”
스윽하고 베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근데, 알고는 있겠지?”
“……?”
“나란 여자…….”
“…….”
“생각보다 쉬운 여자가 아니란 거.”
베릴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었고.
“어쩌지? 이제 우린 더 이상 친구도 아니고, 난 널 놔줄 생각이 없는데. 설마 아침에 일어나서 술김에 그랬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일 없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했잖아. 이미 후회는 충분히 했다고.”
“글쎄. 나중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니콜의 턱을 한 손으로 잡은 베릴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나중은 없어. 그때에도 내 곁엔 네가 있을 테니…흡!”
그에게 니콜이 와락하고 덤벼드는 순간, 그녀 손을 떠난 와인잔이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쨍강.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이 깨지며 양탄자가 붉게 물들었지만, 니콜은 개의치 않았다.
***
서로를 껴안은 채 잠이 든 것은 창문을 가린 커튼 사이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따스한 온기 속에서 잠들어 있던 베릴.
허전한 느낌이었다.
“으음…….”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뜬 베릴은 생각 없이 옆을 더듬다가 화들짝 놀랐다.
니콜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베릴. 그의 눈에 화장대에 붙여진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싶어서 침대에서 벗어나 화장대로 간 그는 메모를 떼어내 읽어보고는 실소하고 말았다.
- 딴 년한테 꼬리 치면 죽을 줄 알아.
협박치고는 글씨체가 귀엽기 짝이 없다.
뿐만 아니라 하트 표시와 함께 립스틱을 인주 삼아 찍었는지 입술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픽하고 웃으며 베릴이 중얼거렸다.
“코 꿴다는 게 이런 건가?”
그의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
바쁜 두 사람이었기에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사흘에 한 번은 만나서 데이트를 이어갔고, 함께 밤을 보내고 또 함께 아침을 맞곤 했다.
그러길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 도준의 결혼식도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빌.”
요즘 들어 니콜이 부르는 애칭에 베릴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눈빛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전부터 느끼던 건데, 왜 자꾸 내 손을 보는 거지?”
“별거 아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베릴을 니콜이 묘한 눈길로 쳐다본다.
그러다가 훅 치고 들어왔다.
“반지 때문에 그래?”
흠칫.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고만 베릴.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낀 걸까.
니콜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손을 흔들며 말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
“약혼 얘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반지도 그냥 마음에 들어서 하나 구입했을 뿐이야. 그리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 내 손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래도 손가락 중에선 약지가
그나마 예쁜 편이라 여기에 낀 거야. 이제 안심돼?”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던 베릴이 툭하고 내뱉었다.
“그,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진 않았어.”
“호호호. 그렇다면 다행이고.”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하는 니콜을 얄밉다는 듯 쳐다보던 베릴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라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채로 입을 벙긋거리던 그는 이내 결심했는지 물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약혼자……. 잘 생겼어?”
“풉!”
니콜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때부터 한참이나 깔깔거렸다.
“하악, 학. 자기 왜 이렇게 웃겨? 날 죽일 셈이야?”
한참 만에야 웃음을 그치며 숨을 몰아쉬던 니콜이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가락을 뻗어 베릴의 눈을 만졌다.
“잘 생겼지. 눈은 쫘악 째진 데다가 짝짝이고. 코는….”
그녀는 베릴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짚으며 말하고 있었다.
“주먹코에 손톱만 한 점이 있는데, 털까지 나 있어. 입은 두툼하다 못해서 뒤집혀 있고, 키는 나보다 10센티 정도 작은데 몸무게는 내 두 배 정도? 아니 세 배인가? 아직
벗겨보지 못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얼핏 본 가슴 털로 봐선 온몸이 털로 가득한 거 같아. 어때? 이만하면 꽤 미남이지?”
빈말이라도 미남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베릴은 알고 있었다.
반쯤은 장난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을 안심시켜주고 싶은 니콜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걸.
그제 그는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물은 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인가?
설사 약혼자가 있다고 한들, 이제 와서 순순히 보내줄 자신도 아니거늘.
베릴은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던 니콜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그러곤 입가로 가져가 가볍게 키스를 하며 얘기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네. 늦었지만, 못들은 걸로 해줘.”
“그래? 난 기분 좋았는데?”
“……?”
“방금 모습 귀여웠어. 그리고 그렇게 질투한다는 거 날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도……우욱!”
갑작스러운 상황.
베릴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하지만, 니콜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우욱, 욱……. 우욱!”
도저히 못 참겠는지, 그녀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쳐다보던 베릴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 간 것도 그때였다.
“설마?”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쉽사리 꺼낼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탈색이라도 된 듯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으니까.
그렇게 우두커니 선 채로 멍한 표정만 짓고 있을 때였다.
니콜이 돌아왔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 짧은 새에 핼쑥해진 얼굴 하며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힌 모습을 보자, 베릴은 입술을 잘근 씹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차마 묻질 못했다.
그런 그를 니콜이 올려다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네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때마침 한 걸음 다가서려던 베릴이 움찔했을 때, 니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순간 베릴은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울컥하고 말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마도 처음일 터다.
베릴이 이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것은.
그래서인지 니콜의 눈이 더없이 커졌을 때였다.
베릴의 손이 니콜의 양어깨를 움켜쥐었다.
“병원엔 가봤어? 넌 괜찮은 거야?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자신의 안위부터 챙기는 베릴의 모습에 니콜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베릴은 입을 앙다물더니 니콜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자.”
“어, 어딜?”
“어디긴. 병원이지.”
베릴에 이끌려 자리에서 도로 일어난 니콜이 못이긴 척 그에게 끌려가고 있을 때, 갑자기 베릴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여전히 화난 음성이었다.
“이걸 빌미로 결혼해달라고 애원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
“혼자서 책임지려고 하지 마. 어쨌든 그 아인 우리 아이잖아. 그러니 앞으론 나랑 상의했으면 좋겠어. 그러고 나서 낳든지 말든지 결정해.”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니콜의 손을 가볍게 풀어주었지만, 놓지는 않은 채로 베릴이 말했다.
너무 작아서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이었다.
“난……. 낳았으면 좋겠지만.”
그 음성이 니콜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