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43화 (243/260)

#243. <외전> 그와 그녀의 사정 I(2)

도준의 결혼식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인터넷을 비롯해 신문과 뉴스, 잡지 등에선 세기의 결혼식이 될 거라고 떠들어댔다.

물론 본인들, 즉 도준과 희주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리소문없이 조촐한 결혼식을 하기엔 초대해야 할 손님도, 그리고 그들의 결혼을 축복해주려는 이들 또한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한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S 그룹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곤 있었지만, 세상 일이란 돈만 있다고 해서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다.

HS 엔터테인먼트와 CDM에서도 발 벗고 나선 거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결국 지인들 중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낙점된 게 바로 레이크헬이었다.

누가 뭐래도 도준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까진 다 좋은데…….

‘약혼자라…….’

도준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니콜 교수와 가장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클래식 쪽 인사들을 떠안게 된 베릴. 그의 머릿속이 한 사람의 일로 복잡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후우.”

방안 침대에 누워 한숨을 내쉬던 베릴이 끝내 잠들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창문으로 보이는 뉴욕의 밤거리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기야, 연말·연초도 다 지나고 날씨만 춥기만 한데, 꼭두새벽부터 어두운 도심을 오갈 간 큰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인 만큼 사방에 켜져 있는 불빛 덕에 야경은 그럭저럭 볼만했다.

그럼에도, 베릴은 심란하기만 했다.

아니,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느낌이랄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모를 정도로 모자란 그가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그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게 문제일 뿐.

당연히 나이 차 때문은 아니다.

새파란 청춘도 아니고, 열 살 정도야 이제 와선 아무것도 아니니까.

것보다는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언제나 니콜 교수는 도준의 스승이었고, 베릴 자신은 도준의 친구였으며, 그렇기에 두 사람은 항상 도준을 중심에 두고 가끔 만나 왔을 따름이다.

뭐랄까.

두 사람을 표현하자면, 태양을 도는 수성과 금성쯤 되려나?

잊을만하면 만나고, 서로에 대한 소식을 들을 뿐 딱히 이렇다 할 만큼 관계가 진척되진 않는 사이.

그럼에도, 만나거나 얘기를 들으면 그 자체만으로 즐겁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도 어제 낮, 그녀를 만났을 때에도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도준의 결혼식 얘기를 하면서도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던가.

당연하겠지만, 베릴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눈에 비친 니콜 교수는…….

여자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은 남자였고.

아니, 남자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니콜 교수 앞에서는.

눈을 감고서 잠시 생각에 잠기던 베릴은 몇 분 뒤 눈을 뜨곤 방을 나왔다.

그러곤 연습실로 들어가 기타를 집어들었다.

이대로는 어차피 머리가 복잡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기에.

다행히 기타를 잡는 순간, 흐릿해졌던 눈빛이 되돌아오며 생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을 뜯어가는 손길에 집중하면서 어느샌가 그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연습실에선 기타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니콜 교수는 이번에 새롭게 출시하는 김도준 교향곡 2번의 앨범을 기획 중이었기 때문에 꽤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애초에 김도준 교향곡과 관련해서는 첫 공연을 시작으로 니콜 교수가 거의 모든 연주회를 성사시켜 왔었고, 앨범 제작 또한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힘입어 출시했었던 탓에 지금에 와선

HS 엔터테인먼트에서도 그녀에게 전적으로 권한을 주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결혼부터 할 일이지, 3개월 동안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콘서트 끝나자마자 결혼발표를 하는 건 또 뭐람?”

니콜 교수가 그녀답지 않게 툴툴거리는 모습에 베릴은 슬며시 웃고 말았다.

희미한 미소였기에 눈치채지 못했는지, 니콜 교수는 계속해서 도준의 험담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다 좋아. 다 좋은데, 어째서 교향곡은 작곡하지 않겠다는 거냐고!”

역시나 결론은 이거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도준이 더 이상 클래식과 관련해선 어떠한 음악 활동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그야말로 인류사의 커다란 손실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게.”

이럴 땐 역시 맞장구쳐주는 게 백번 옳은 일이라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베릴이었다.

영혼이라곤 1도 없는 대꾸와 함께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베릴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고 도준을 성토하고 있던 니콜 교수를 힐끗 바라보았다.

멈칫.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만 베릴. 그의 눈에 니콜 교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비쳤다.

못 보던 반지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약지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며칠 전 조마루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약혼자가 있다고 했었지.’

어지간해선 자신의 얘기, 그중에서도 집안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니콜 교수였기에 베릴로선 처음 듣는 얘기기도 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여태 결혼을 하지 않고 있기에 당연히 독신주의라고만 했지, 설마하니 혼약한 남자가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으니까.

그저 이런 식으로 만나면서 가끔 차도 마시고, 일 얘기와 함께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는데…….

그게 한순간에 망가져 버렸다.

유부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임자가 있는 여자와의 만남은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다.

“뭐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베릴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 내 말 안 듣고 있었던 거야?”

“듣고 있었어.”

“흐음, 정말?”

커피숍 야외 테라스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꼬고는 한 손으로 턱을 바치며 묻는 니콜 교수.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반짝였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유난히 붉게 빛나는 것은 오늘따라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탓만은 아닌 듯했다.

“교향곡이 힘들면 합주곡이라도 작곡해보라고 권해볼까? 소나타 같은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고.”

베릴이 이제까지 제대로 듣고 있었다는 걸 어필할 겸 말을 돌리며 대꾸했지만, 니콜 교수의 눈은 한층 더 가늘어질 뿐이었다.

“이상한데? 오늘. 무슨 일 있는 거야?”

니콜 교수의 물음에 베릴은 지긋이 웃으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그녀가 턱을 받치고 있는 손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전직 피아니스트답게 길고 가는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박힌 투명한 보석이 유난히 반짝인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관계니까.

서로 친구라고 선을 그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괜스레 감정에 휩쓸려서 대쉬를 한다든가, 그게 아니라도 술김에라도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일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자칫 지금껏 유지해오던 관계가 엉망으로 망가질 수도 있었기에.

그러니, 두 사람은 흔히들 말하는 베프. 좀 더 솔직해지자면 연인만큼이나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 모두 그동안 몇 번인가 누군가를 사귀는 것조차 전혀 개의치 않았던 거고.

한데 지금은…….

베릴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여전히 자신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니콜 교수에게 말했다.

“오늘 예쁘네.”

순간 니콜 교수는 턱을 받치고 있던 손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살짝 입을 벌렸다.

“하!”

어이가 없는지 묘한 탄식을 흘리곤 그녀가 물었다.

“이보세요. 당신 누구야?”

픽하고 웃고만 베릴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딴소리를 한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러든가.”

“가끔 가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괜찮지?”

“어디든, 그대만 함께 가준다면.”

장난스럽게 말하며 싱긋이 웃어 보이는 니콜 교수를 잠시 바라보던 베릴이 한차례 고개를 내저으며 돌아섰다.

그 뒤를 니콜 교수가 우아한 몸짓으로 따라붙었다.

***

메디슨 스퀘어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은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다만, 고급스러운 가게 분위기만큼이나 가격이 높아서 니콜 교수는 조금 놀라워했다.

먹는 거에 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른바 뭐든 입에 넣는 거라면 잘 먹는 편인 베릴이 선택한 가게답지 않아서였다.

“괜찮네.”

스테이크 맛도 일품이었고, 곁들인 와인도 훌륭했다.

간만에 입이 즐겁다며 식사 내내 즐거워하는 니콜 교수였다.

베릴이 그런 그녀를 가끔 한 번씩 쳐다보며 와인을 홀짝이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집에 가서도 일하겠네?”

“글쎄. 오늘은 좀 쉬고 싶긴 하네.”

말은 저렇게 해도 집에 들어가면 다시 또 일에 파묻히고 말 거란 걸 잘 아는 베릴이었다.

“그럼 슬슬 일어나야겠군.”

“아, 계산은 내가 할게. 이렇게 좋은 델 알려줬는데, 돈은 내가…….”

“오늘은 내가 낼게. 여기로 오자고 한 건 나니까, 굳이 말하면 초대한 셈이잖아.”

“호호호. 그래? 그럼 좀 더 비싼 걸 시킬 걸 그랬나?”

니콜 교수가 농담을 하는 동안, 베릴이 직원을 불러 카드를 내밀었다. 물론 적당한 금액의 팁까지 적어서 결재했다.

그러고 나서야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두 사람.

“봄이라곤 하는데, 밤 바람은 좀 차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제법 커서 지금 걸치고 있는 숄 가디건만으로는 추운지 두 팔로 몸을 안고 있던 니콜 교수의 어깨 위로 외투가 걸쳐진 것도 그때였다.

“어머. 웬일이래? 오늘 진짜 이상하네.”

“왜, 싫어?”

자신의 외투를 벗어 니콜 교수의 몸에 걸쳐준 뒤에 희미하게 미소 짓는 베릴. 그런 그를 어디선가 찍고 있는지 촬영음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어? 저거 괜찮아?”

“놔둬.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도 인터넷에 올라가면…….”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거면 방에만 처박혀 있어야겠지.”

“하긴.”

두 사람은 잠시 뉴욕의 밤거리를 걸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도준을 봐도 그렇고. 유명인으로 산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거 같아.”

“뭐, 그렇기도 한데. 조금만 둔감해지면 나름 견딜만해. 가끔 알아봐 주는 사람들 덕분에 즐거울 때도 있고.”

“가끔? 호호호. 해마다 연말 시상식에 꼬박꼬박 이름을 올리고 있는 밴드의 멤버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아무렴 도준만 할까?”

“도준은 아직 시상식에서 상을 탄 적이 없지 않아?”

“직접 받지 못했을 뿐이지. 지난해까지 포함해서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만 벌써 9번이나 상을 받았잖아? 그래미에서도 그렇고.”

“하긴 매년 미국 3대 뮤직어워드엔 꼬박꼬박 이름을 올리는 녀석이니까. 왜, 부러워?”

피식.

“녀석이 깨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깟 상이 뭐라고.”

진심이 묻어나오는 말에 잠시 베릴을 쳐다보던 니콜 교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이쯤에서 헤어져야겠다. 찰리스까진 걸어서 금방이지? 난 여기서 택시 타고 들어가면 되니까.”

베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니콜은 그에게 외투를 벗어 건네주곤, 다시 한차례 웃더니 도로 쪽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침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다가왔다.

달칵.

멈춘 택시에 다가가 손을 뻗어 차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스윽.

니콜 교수의 팔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녀가 돌아보기도 전에 베릴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가지마.”

“……?”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아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니콜 교수. 그녀의 눈이 점차 커져만 갔다.

평소의 담담한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또 늘 침착해 보이던 표정은 어쨌는지, 초조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베릴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또한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나와 같이 있자.”

니콜 교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안해요.”

어느새 그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택시 기사에게 말하곤, 차 문을 도로 닫았다.

그런 뒤 돌아서며 베릴에게 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베릴은 팔로 니콜 교수의 허리를 천천히 감싸며 말했다.

“후회는 아까부터 하고 있었어.”

“…….”

“……지금도 충분히 늦었다고.”

도심 한복판, 밤거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미풍 한줄기가 스쳐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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