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외전> 그와 그녀의 사정 I(1)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간다.
드디어 계단 끝에서 베릴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자, 제롬이 툭 하고 내뱉었다.
“산책한다고 나가더니, 시카고에라도 다녀온 모양이네?”
반달처럼 휘어진 눈이 되어 묻는 제롬에게 베릴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차례 힐끔거리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을 뿐이다.
“흠, 확실히 의심스럽지?”
디알로의 말에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해.”
“말수도 적어졌고.”
“말수는 원래 적지 않았나?”
“이전보다 더 적어졌으니 문제지.”
“으음…….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디알로가 불쑥 물은 것도 그때였다.
“근데, 뭐가 문제지? 도준도 일어났고, 콘서트도 무사히 마쳤잖아? 그저 긴장이 풀린 거 아닐까?”
제롬이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쯧쯧쯧.”
혀를 찬 뒤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알 수가 있다고. 지금 베릴은…….”
“베릴은?”
“심각한 상황이 분명해.”
“어? 정말?”
“그렇다니까요. 확실해.”
“……그렇다면 문제긴 한데. 뭐가 어떻게 심각한지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씨익하고 웃은 제롬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디알로 역시 한층 더 가깝게 다가왔다.
“베릴은 우리랑은 다르잖아? 감정 표현도 적고, 멤버들 중 가장 배려심이 많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툴단 말이야.”
“호오. 듣고 보니 그럴듯한데?”
“봐봐. 디알로가 보기도 요즘 베릴이 한층 더 가라앉은 거 같지 않아?”
“그, 그런가?”
“그렇다니까! 요즘의 베릴은…. 뭐랄까, 꼭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달까. 아무튼, 위험해!”
“그러니까, 네 말은 폭풍 전야 같은? 뭐 그런 거다 이런 얘기야?”
“맞아! 분명 뭔가 있어. 어쩌면…….”
“어쩌면?”
“호르몬 분비 이상일지도!”
“헉!”
제롬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지만, 디알로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베릴 역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마흔을 넘겨버린 터라, 제롬의 얘기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이 가득한 눈길이 되어 베릴이 들어가버린 방 쪽을 쳐다보는 디알로였다.
***
요즘 같기만 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하는 베릴이었다.
적어도 도준이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때에 비하면 확실히 좋았다.
딱히 걱정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있었으니까.
한창때라 할 수 있는 이십 대는 아니었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을 좀 더 넓고 깊게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인지 오히려 마음은 편하기만 했다.
특히나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무엇과 비교해도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일이었다.
다만…….
‘벌써 10년이 다 됐네.’
도준이 이곳, 뉴욕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서 파티에 초대했을 때 만난 후로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인연이다.
그동안 여자를 한 명도 안 만난 것은 아니지만, 매번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워낙 도준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아직 의식이 깨지 않고 있는 도준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거와는 전혀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쪽보다는…….
“왔어?”
베릴은 혼잡한 거리가 훤히 보이는 커피숍 야외 테라스에 앉은 채로 니콜 교수를 맞이하며 옅게 웃어 보였다.
“조금 늦었지?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아, 내가 가서 커피 좀 주문하고 올게. 잠시만…….”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가게 안으로 발길을 향하는 니콜 교수를 베릴이 불러세웠다.
“주문해놨어. 곧 나올 거야.”
“응?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아까 통화했잖아. 택시 타면서. 도착할 때쯤 됐다고 생각해서. 카푸치노 맞지?”
선 채로 잠시 베릴을 바라보던 니콜 교수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기지개를 켰다.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자기밖에 없네.”
베릴은 자신의 앞에 앉아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치고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니콜 교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모습만 보자면, 뭔가를 관찰하거나 어딘가를 살피는 듯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습관이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의.
그걸 아는 데만 4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밖에도 베릴이 니콜 교수를 만나면서 알아온 것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 하나하나가 꼭 수수께끼 같아서 나름 재미도 있었다.
더불어 의아하기도 했다.
우선 그녀는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동안이었다.
한때는 유럽을 발칵 뒤집어놨을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 출신.
집안도 좋았다.
사촌 중 누군가는 월가를 주름잡는 투자가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미국 정계를 뒤흔드는 실력자라고도 했다.
한마디로 명가의 일원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여태 결혼도 안 하고 혼자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임을.
당연한 얘기다.
지난 9년간 도준이가 일어나지 않고 있던 시간 동안 줄리아드에서 머물 때를 제외하곤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준이 작곡한 교향곡 1, 2번 곡의 연주를 성사시키는 데만 열중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니콜 교수에게 대쉬하는 남자들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하다못해 연애라도 할법하지만, 이 여자는 도통 그럴 낌새조차 보이질 않았다.
아마 베릴도 일 때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어 둘이서만 만나는 일도 없을 거다.
도준이 결성했던 혼성 밴드인 ‘더 포어’의 앨범 준비를 포함해 김도준 교향곡 1, 2번의 앨범 작업 그리고 몇 차례에 걸친 연주회에 대한 조언과 협력차 만나기 시작한 게 벌써
9년째였다.
“식사는?”
베릴은 상념을 떨치며 물었다.
“알면서.”
아직 안 먹었다는 얘기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밥부터 먹으러 갈까?”
픽하고 웃은 니콜 교수가 묻는다.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안 그래도 큰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그녀를 베릴은 가만히 쳐다만 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며 말했다.
“카푸치노 가져올게.”
“뭐하러 그래. 알아서 갖다 줄 텐데.”
뒤통수에서 니콜 교수가 타박하듯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베릴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어라? 둘이 뭐하는 거지?”
“도준이 결혼식 준비 때문에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아,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카페 한편에서 베릴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몸을 숨겨가며 지켜보던 두 사람은 옥신각신 떠들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아, 진짜! 사람이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아, 그러니까 뭐가?”
“참네. 분위기가 그렇잖아! 분위기가!”
“응? 분위기?”
“모르겠어? 두 사람, 베릴이랑 교수님이랑 사이에서 뭔가 묘한 분위기가 안 느껴져?”
제롬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던 디알로가 그 두껍고 큰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엔 평상시랑 그다지 다른 거 같지 않은데.”
그런 디알로를 제롬이 입을 살짝 벌린 채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을 말지. 곰이랑 얘기하는 게 낫지.”
고개를 내젓던 제롬이 한순간 눈을 빛냈다.
베릴과 니콜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쩌려고? 설마 뒤쫓으려고?”
“아,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자고?”
제롬의 질문에 디알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던 까닭이다.
어차피 저들의 문제는 두 사람 간의 문제일 뿐이다.
제롬이 어떤 의구심을 가지든 간에 제삼자가 관여할 일이 아니란 생각에서였다.
“쩝. 난 여기서 빠지련다.”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는 디알로를 보았지만, 제롬은 오히려 눈을 빛낼 뿐이었다.
“그래. 그럼.”
“넌 어쩌려고.”
씨익.
웃을 뿐 제롬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다가 디알로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해 보이며 한마디 했다.
“야, 그거 스토킹이야, 스토킹.”
“에이, 그건 아니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들기던 제롬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혹시 들어봤어?”
“응? 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
“주, 중이 뭐? 머리? 머리를 왜 깎아?”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해 보이며 시선을 돌린 제롬의 눈동자가 베릴과 니콜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찰리스 건물로 돌아온 베릴이 집으로 올라가기 전 찰리의 가게를 유리창 사이로 바라보다가 픽하고 웃고 말았다.
레스토랑 한가운데에 놓인 피아노.
그곳에는 유진이 앉아서 건반을 두들기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일이다.
세계적인 락 밴드의 키보디스트가 뉴욕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연주를?
그 자체만으로도 토픽에 날만 한 일인데, 자연스럽게 손님들과 어우러져 노래를 함께 부르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란…….
웃기는 건 이미 저런 상황이 한 해 두 해 이어져 온 일이 아니란 거였다.
그 때문에 레스토랑은, 아니 찰리스 건물 자체가 뉴욕의 명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다.
단지 도준이 소유한 건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녀석이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이곳은 HS 엔터테인먼트의 미국 지부로 운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레이크헬을 비롯한 팝스타들이
툭하면 머무르면서 간혹 1층의 레스토랑에서 연주를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젠 뉴요커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락커들이 마치 성지 순례하듯 이곳을 찾곤 했다.
오늘도 비슷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가게 안쪽에선 재즈를 연주하는 이들을 필두로 많은 싱어들과 연주자들이 손님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한창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베릴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2층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우우우우웅.
잔잔하게 울리는 진동음.
어디서 걸려온 건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한 베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지금 집에 들어왔어.”
- 그래? 잘됐네. 메일 보내 놨으니까, 확인하고 전화 줄래?
“그렇게 할게.”
- 응. 그럼. 삼십 분쯤 있다가 연락해. 난 피곤해서 일단 좀 씻어야겠어.
끊긴 전화를 보면서 베릴은 한쪽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올렸다.
피곤에 절어서 욕실로 기어들어가는 니콜 교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해서.
잠시 후, 집으로 들어간 그를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조마루였다.
“어? 일찍 왔네? 니콜 교수님 만나러 나간 거 아니었어?”
“할 얘긴 다 했으니까.”
담담하게, 아니 다소 무뚝뚝하게 얘기하는 베릴을 조마루가 멍하니 쳐다본다.
방금까지 작업 중이었던지, 거실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노트북에서 눈을 뗀 채로.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저기, 베릴.”
“……?”
“너, 그러다가 죽으면 사리 나온다.”
무슨 뜻인지 몰라 조마루를 쳐다보자, 조마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둔한 것도 어지간해야지.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야?”
잠시 조마루를 바라보던 베릴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뜻이야?”
조마루가 베릴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한 것은 몇 분인가 지났을 때였다.
“니콜 교수님한테 약혼자가 있다는 건 알아?”
순간 베릴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야, 약혼자?”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에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였다.
3층 계단을 내려오던 제롬이 혀를 차며 얘기했다.
“하아, 디알로랑은 다른 의미로 곰 같다니까. 도준이 결혼식 준비에만 열심이지. 제 머리 깎을 줄은 모르니…….”
“그러게. 저러다가 닭 쫓던 개꼴이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의 말을 받듯이 조마루가 얘기하고 있었지만, 베릴은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