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40화 (240/260)

# 240

#240. 나는 싱어다(2)

앙증맞게 말하며 두 손을 모아 인사하는 예은이었다.

“작은 엄마,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희주의 얼굴이 대번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예은의 모습이 귀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자, 작은 엄마…….’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였다.

희주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도준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미리 말하지만, 보수라고 해봐야 경비 수준밖에 안 될 거야.”

“이 자식이! 우릴 어떻게 보고! 얀마! 돈만 밝혔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10년을 잠들어 있다가 깨서 그러나 본데. 그동안 우리가 번 돈이 얼만 줄이나 알아?”

“돈자랑만큼 천박한 건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10년이 아니라 9년이에요.”

“크윽! 그러는 네가 더 얄미워!”

“흠흠, 원래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운…으헙! 으어어어억!”

제롬의 볼을 잡아당기고 있는 디알로의 모습에 모두가 웃고 있었지만, 희주 만은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엊그제도 통화한 샤오린의 얘기가 떠올라서였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마는 희주였다.

그런 희주의 귓가에 도준의 음성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왜 그래? 걱정 있어?”

“아, 아니.”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웃어 보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도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기야 지난 9년간 도준이 잠들어 있었을 때를 빼곤 거의 매일 붙어 있다시피 했던 사이다.

아니, 도준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신을 피했다지만 희주는 단 한시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도준의 옆자리엔 항상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거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혹여라도 들킬까 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두려워하는지를.

“곧 있으면 패션쇼가 있어서 좀 무리를 했더니, 조금 지쳤던가 봐.”

봐라. 도준은 미소만 짓고 있다.

다 아는 거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라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먼저 가볼게. 요새 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시거든.”

“그게 좋겠다.”

희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일행들에게 인사를 했다.

물론 예은이를 한번 안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고.

그렇게 도준의 집을 나오는데…….

“이만 들어가도 돼.”

“좀 걷고 싶어서.”

운전사인 최 실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희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 역시도 도준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으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도로를 달려가는 차들이 연이어 불빛을 쏘며 지나가고, 수많은 이들이 추위 속에서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준의 손끝이 자신의 손에 닿은 것도 그때였다.

화들짝 놀란 희주가 눈을 치뜨는 순간, 도준이 말했다.

“잡자, 손.”

“응? 으응.”

대답하기 무섭게 도준이 희주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다시 말했다.

“놓지 말자.”

“……?”

“다시는…….”

도준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차마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희주를 도준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러면서도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도준의 말을 들으며 희주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고, 고백인가? 지…진짜? 설마 프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준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 그곳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내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앞으로 나아갈 힘이 돼주었다. 만일 가족들이 없었다면……. 예은이가 없었다면…….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돌아올 수 없었을 거다.”

뚝.

순간 걸음을 멈춘 도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웃고 있다.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잠시 그러고 있던 도준, 아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아……. 난 뭘 그렇게 조급해했던 걸까?’

희주가 자신을 책망하다가 이내 눈을 치떴다.

“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흐릿하지만, 분명 눈이었다.

희주의 손을 쥐고 있는 따스한 손과는 달리 차가운 눈이 하늘하늘 내려앉고 있었다.

머리 위로, 어깨로, 손등 위로.

그리고 그때였다.

***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눈이 내리는 순간.

깨달았다.

아니 떠올렸다.

뭘 그렇게 재고 있었던 걸까?

인생에서 최적의 타이밍?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나 참. 그렇게나 당해놓고서…….

그때……. 무의식 안에 갇혔을 때. 아니 그전에 노래방 때에도 그랬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감동?

좋지.

그런데 그건 누굴 위한 감동인 거지?

누군가의 속을 바짝 태우고, 그러고 나서 짜잔 하고 놀래켜주면 엄청 감동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은 거다.

그걸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그 안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는데.

매일매일 말해줄 것을.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모두에게.

그리고 희주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

다시 멈춰서 바라본 희주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날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옅게 웃어 보였다.

쑥스러워서.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까 보냐.

나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냈다.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다.

벌써 몇 달째 가지고 다니는 상자였다.

언제가 좋을지, 어떻게 주는 게 좋을지,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상상하며 지니고 있던 것이다.

달칵.

눈발이 나리는 밤거리에서 나는 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반지를 꺼냈다.

수수하지만, 희주만큼이나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에 끼워주며 말했다.

“나랑 함께하자.”

파르르 떨리는 희주의 눈. 그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손을 들어 훔쳐주곤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앞으로 계속……계속……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고 싶다. 그래도 괜찮을까?”

머리 뒤에서 그녀의 울음이 터졌다.

그러곤 울음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응!”

“……나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속 좀 썩일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응!”

“……한 달에 며칠씩, 아니 어쩌면 몇 달씩 떨어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응!”

“또 어쩌면…….”

와락.

키도 작은 희주인데, 어떻게 내 뺨을 움켜잡은 거지?

의아해졌을 때, 내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잡은 희주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그러곤…….

입술에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거칠게 덤벼드는 희주를 꼭 껴안은 채 키스를 나누는 동안 눈발은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

띠띠디, 띠디. 띠리리릭!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누군가 물어왔다.

“희주는 잘 바래다줬니?”

어머니셨다.

“예.”

“눈이 많이 오나 보네? 어머, 아들! 손 빨간 것 좀 봐. 얼른 샤워부터 해. 감기 들라.”

“예.”

연거푸 대답을 하며 샤워실로 향하다가 멈춰 섰다.

그러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다.

“희주한테 청혼했어요.”

“그러니? 희주한테 청……. 아, 아들! 지금 뭐라고 했니?”

달칵.

뒤에서 어머니의 놀란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이미 난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간 후였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픽하고 웃으며 옷을 벗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

한참을 시달렸다.

일차로 어머니의 엄청난 질문 공세를 받았고, 겨우 풀려났나 싶었더니 그다음은 형이었다.

“후후후. 복수할 때가 왔군.”

참네. 뭔 복수?

설마 형 결혼식 때……. 큼, 자전거는 좀 그런데…….

머리를 긁적이다가 눈이 마주친 아버진 그저 빙그레 웃고만 계셨다.

하아, 그래 여기까진 좋다.

가족들이니까.

예은이가 늦은 밤이라 잠들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고.

문제는…….

“오올! 드디어 가는구나!”

“총각파티 해야지?”

“우리, 섬으로 갈까?”

“미친놈아! 희주가 눈치 못 챌 거 같아?”

“음, 그렇겠구나!”

“이런 일은 게눈 감추듯 해치워야 하는 것이에요.”

이상한 비유인데, 묘하게 설득력 있네.

레이크헬 멤버들에게 둘러싸인 채 한참을 시달리다가 흠칫하고 말았다.

리노와 강나리가 눈을 반짝이며 날 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그 눈빛들은?

뭔가 동경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은 뭐냐고?

“어른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헐. 니들도 충분히 어른……. 아! 둘 다 아직 성년이……. 아니지. 리노는 그렇다 치고, 나리는 이미 스무 살이 넘지 않았나?

아, 긴가민가하네.

이상한 데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튼, 축하한다.”

“그래서 언제 하려고, 결혼은?”

“글쎄. 일단은 이번 일 끝내고 해야겠지?”

“근데, 프러포즈는 어디서 한 거야?”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고요? 설마 길거리에서 막 반지를 끼워주면서 ‘나랑 결혼해줘!’ 따위로 해치웠을라고요.”

흠칫.

속으로 찔려서 시선을 피하고 있을 때, 디알로가 깔깔 웃는다.

“그럼, 미친 거지. 그랬다간 평생 시달릴 텐데.”

“크크큭. 그럼, 그럼. 아무리 도준이라도 그 정도는 아냐.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자한테서 결혼이란 게 얼마나 중대사인데. 웨딩드레스, 결혼식장. 웨딩촬영 그리고 프러포즈. 하나하나 안 중요한 게 없어요. 그러니 리노. 너도 명심해라. 이중 앞서 세 가지는 어지간하면 넘어가 주는데, 프러포즈를 잘못했다가는…….”

“했다가는요?”

“뭐, 한평생 원망 듣는 거지. 조금이라도 서운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 그리고 결혼 후에도 조심해야 해. 결혼기념일을 잊기라도 했다간, 바로 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헉! 그, 그런 거에요?”

와, 말하는 거 보소.

사람 완전 뭐 만드네.

근데, 진짜 그러려나?

에이, 설마…….

“모,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야.”

“물론 그렇긴 하지. 모든 남자가 다 같은 게 아닌 것처럼.”

“당연하죠. 사람마다 다 다른 건데. 일반론처럼 말하는 건 좀 아니죠.”

“아, 딴소리 말고. 도준, 말해봐. 어디서 한 거야? 프러포즈.”

“뻔하지. 우리 몰래 어디 좋은데 예약해놓고…….”

“오호! 그래서 바래다준다고 둘이서만. 와, 이 자식 완전 선수인데?”

카똑.

톡이 온 것은 그때였다.

- 지금 들어왔어.

“여어! 희주야?”

“뭐래? 뭐래? 감동받았대?”

“저리 좀 가!”

자꾸만 달라붙는 디알로를 밀쳐내며 일어선 뒤,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러면서 바라보니, 저만치서 어머니께서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계시는 게 보였다.

내 이름이랑 희주 이름이 언뜻 들리는 걸 보니, 친구에게 자랑이라도 하시나 보다.

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희주와 톡으로 대화를 나눴다.

***

참 이상한 일이다.

늘 하던 채팅이었는데, 그것만으론 갈증이 가시질 않는달까.

결국, 전화를 걸었고 두 시간이나 통화를 한 후에야 끊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함께 있고 싶었다.

심지어는 지금이라도 희주네 집으로 달려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올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미쳤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전화가 걸려오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이었다.

하지만,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희주가 아니었다.

순간, 실망스러워져서…….

“아, 교수님!”

- 응? 뭐지? 이 반응은? 어째 반기는 목소리가 아닌데?

“아…하하하하. 그, 그럴 리가요.”

- 음, 웃는 것도 그렇고. 의심스러운…….

“아유, 그럴 리 있나요? 방금 씻고 나와서 자려고 누운 참이라서 그런…….”

- 계속 통화 중이던데?

“그, 그야……. 준비할 것도 많고 해서…….”

- ……뭐, 그렇다니까 이번엔 넘어가 주지. 그건 그렇고. 일주일 뒤에 들어갈 예정이야. 무대 설치만 해도 닷새는 걸리니까, 바로 시작해야 할 거고. 설마 장소가 변경됐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그럭저럭 넘겼다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이미 계약까지 완전히 끝내놨으니까요.”

- 그럼, 3주 후로 잡으면 적당할 거 같은데. 어때? 연락은 다 해놓은 거지?

“예. 회사랑도 얘기 끝났고, 밥이랑 폴도 와준다고 하네요. 아, 베델도 참여한다고 하고요.”

잠시 말씀이 없으시던 니콜 교수님께선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얘기했다.

- 다들 그때 일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예. 그래서 더 미안하고……고마워요.”

- 알면 잘해. 모두 네가 일어나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예.”

- 잔소리는 여기까지. 이만 끊을게.

그렇게 얘기하곤 전화를 끊으시려던 니콜 교수님께서 느닷없이 물어오셨다.

- 근데, 희주랑 결혼은 언제 하는 거니?

히끅.

놀라서 나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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