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35화 (235/260)

# 235

#235. 달라지지 않은 것(2)

그날 이후로 도준에게선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그래도 다들 묻거나 하진 않았다.

도준이 깨어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 정말 아무것도 안 한다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놀랍다는 듯 물어오는 샤오린에게 희주는 그녀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노래만 안 할 뿐이죠.”

- 작곡도 안 한다면서요? 연주도 안 하고.

“예.”

- 흠, 대체 무슨 생각일까.

의아해하는 건 샤오린만이 아니었다.

가족들을 비롯해 회사 식구들까지 궁금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도준은 현재 음악과 관련된 건 일절 손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라면 도준이 그러는 까닭을 알지는 못해도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무리인가?’

강나리가 데뷔한 이후, 워낙 바빠서 항상 잠이 모자란다고 투덜대는 조마루 대신 사실상 공백상태나 다름없는 팬클럽 회장 자리를 메워온 건 샤오린이었기에 혹시나 하고 물었던 건데…….

그렇기에 누구보다 도준을 잘 알 거라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을까.

희주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거 아닐까요?

그 점은 이미 희주도 생각해보았던 거였다.

실제로 의사들한테 자문을 구해보기도 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발생할 수 있는 정신 신체 증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증후군이 지금의 도준을 설명하는데 가장 합당했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엊그제 노래 한 곡 불러달라니까 순순히 불러주더라고요.”

- 음……. 개인적으론 부르지만, 활동은 안 한다. 뭐, 그런 건가 보네요.

이번엔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제 생각에는 일단 지켜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솔직히 도준 씨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너무 조급하게 굴면 오히려 그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것보다, 프러포즈는 받았어요?

“예? 아, 아뇨…….”

- 에? 아직도요? 나참! 그 남자 진짜 못쓰겠네. 안 되겠네요. 제가 가서 한번 혼쭐을 내야…….

빈말이란 걸 알지만, 희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그러지 마세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도준이도 도준이 나름대로 생각이 많을 거에요.”

- 후우. 하긴. 도준 씨가 잠들었던 때로부터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니까.

아닌게아니라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도준이 정신을 잃고 난 이후로.

왜 안 그렇겠는가.

강산도 10년이면 바뀐다는데.

요즘처럼 뭐든지 빠른 시대엔 5년이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미 지금 세상은 도준이 살던 세상이 아닐지 모른다.

- 도준 씨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군요.

“예.”

- 하아. 희주 씨가 힘들겠네요. 이럴 때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하필이면 계약 때문에 파리에 와 있어서 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괜찮아요. 지난번에 봤잖아요.”

도준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왔던 샤오린이었다. 그 때문에 깨질뻔한 계약을 수습하고 마무리 짓기 위해 파리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런 샤오린을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라 가라 한다는 건 희주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희주 역시도 이젠 어엿한 사회인, 그것도 S 그룹 산하 제이패션의 부사장이었으니까.

-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게요.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동병상련이랄까.

도준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서로 의지하며 견뎌왔다.

그래서 그런지, 부쩍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희주는 한창 바쁠 텐데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주는 샤오린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후우…….”

다시금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있는 도준이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준이 깨어나기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천천히 가는 거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고 가녀린 손을 말아쥐는 희주였다.

***

놀랍긴 하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아니, 그 반대다.

내가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바뀌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단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여전히 휘발유 차들이었고, 심지어는 아직 자율주행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영화에서처럼 차들이 날아다니지 않을까 생각했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 기차 속도가 시속 1,000km를 넘어가는 건 놀랍긴 하다.

하이퍼 루프라고 하던가?

덕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16분 걸린단다.

그럼 뭐하나?

아직도 북한과 철로 하나 놓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쓸만하네.”

핸드폰이 접혔다 펴졌다 하는 게 꽤 편리하다.

곧 홀로그램 기술이 접목된 디바이스도 나온다는데, 기계에 큰 관심이 없는 나조차 호기심이 일 정도다.

동영상 쪽도 많이 바뀌겠다 싶어서.

그렇게 되면 영상매체 쪽도 급변하지 않을까.

TV나 모니터들도 빠르게 세대교체를 이룰 테고.

아무튼, 세세하게 살펴보면 바뀐 점도 많았다.

특히 달 쪽에 우주개척을 위한 전진 기지를 건설 중이라는 얘기에 혀를 내둘렀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역시나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혀 실감이 나질 않는다.

꼭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어떻게 보면 공상과학 같기만 하다.

그렇긴 해도…….

“역시 이런 건 쉽게 바뀌질 않네.”

양로원이며 고아원이며 여전히 존재하는 소외된 계층을 생각하며 중얼거리고 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선미가 물어온다.

“뭐가요?”

아, 선미는 이번에 ONEZ에서 마련한 자원봉사에 참여한 대학생이다.

“아니, 그냥.”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하며 간간이 뒷자리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친구들한테 브이 자까지 해 보이는 선미를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나랑 같이 앉아가는 게 그렇게 좋을까.

벌써 10년가량이나 쉰 탓에 내 노래도 잘 모를 테고. 설사 안다고 해도 벌써 29살이나 된 나는 저 나이대 애들 눈에는 아저씨로만 보일 텐데.

“아! 다 왔나 봐요!”

“그러네.”

저만치 양로원이 보인다.

잠시 후 버스는 양로원 앞마당 안에 멈춰 섰다.

“남자분들은 박스들을 들어주시고요. 여자분들은 나머지 짐 좀 부탁드립니다.”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자원봉사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남자들 틈에 섞여서 커다란 종이박스를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박스 안에 든 것들은 대부분 라면과 같은 식료품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박스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가 들기엔 충분한 무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 누워 있었던 나조차도 쉽게 들 정도였다.

물론 무의식 안에 있을 때 꾸준히 몸을 관리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어?

왜들 저러지?

다들 신기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하지만, 자원봉사를 왔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닌가?

재단 이사장이 어머니라고 해도, 여기선 그저 한 명의 자원봉사자일 뿐이니까.

조금 계면쩍어져서 선미를 비롯해 오면서 친해진 이들에게 웃어 보이곤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한차례 짐들을 안으로 옮기고 나서 허리를 펴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기도 안산시 외곽.

아파트들이 드문드문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론 산이 많고 조용한 편이다.

하기야 어르신들이 지내시기엔 오히려 복잡한 도심보단 여기가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저기 혹시……? 어머! 맞죠?”

“아, 예. 김도준입니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듯한 여성을 보면서 나는 웃고 말았다.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진짜 오실 줄 몰랐어요! 아, 안녕하세요. 여기 원장을 맡고 있는 김희진이에요.”

사십 대쯤 되었을까.

웃는 게 묘하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여자였다.

“반가워해 주시니 고맙네요.”

“무, 무슨 소리세요!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뭘 또 영광씩이나.

난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김희진 원장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저 팬이에요.”

“그러시구나. 그럼, 사인이라도 한 장 해 드릴까요?”

“정말요?”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손뼉까지 치는 김희진 원장에게 사인을 해주고, 내친김에 사진까지 찍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며 너도나도 사진을 찍자고 한다.

뭐, 닳는 것도 아니고 못 찍을 것도 없지.

잠시 사람들과 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크크큭. 현장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긴 한데.

현장 맞다.

작업현장.

내가 말은 작업은 다름 아닌 빨래.

여자들 몇 명과 함께 이불빨래를 하게 됐는데, 얼마 못 가서 한소리 듣고 말았다.

“아유,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팍팍 좀 밟아봐요!”

아주머니 한 분이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 제가 제대로 밟으면 이불 구멍 난다니까 그러네요! 그래서 힘 조절하느라 얼마나 애쓰고 있는데……. 진짜 팍팍 밟아봐요?”

또다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피식 웃고는 힘껏 밟는데…….

“지금 제대로 하는 거 맞아요? 헤유! 이래가지고 나중에 장가가면 밤일이나 제대로…….”

“와아! 아줌마! 그거 지금 성희롱이에요, 성희롱!”

어쩌다 보니 아주머니와 만담 콤비가 되어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지만, 기분은 더없이 좋았다.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라 그런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도 그렇고.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무의식 안에서 혼자 있으면서 얼마나 꿈꾸었는지 모른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순간들을.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붙인 채 미친 듯이 이불빨래를 밟다가 올려다본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높았다.

***

아, 미치겠네.

- 노래해! 노래해! 노래해!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들 즐겁게 해 드리려고 장기자랑 하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꼭 나한테까지 노래를 시켜야 하겠냐고.

머리를 한차례 긁적거리다가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간 오늘 하루가 다 갈 때까지 다들 저러고 있을 거 같아서.

그래, 한다 해!

쯧. 뭘 불러야 하나?

앞으로 나서서 노인분들을 바라보니, 그저 흐뭇하게 날 바라보고 계신다.

마치 손자를 보는 듯한 눈빛들이시다.

갑작스레 떠올랐다.

외할아버지 얼굴이.

코끝이 시큰해지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이씨! 뭐야, 이거. 왜 이 타이밍에 이런 감정이 드는 거야?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기타를 매고 있는 청년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그러자,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곤 날 쳐다본다.

그 눈빛이 정말? 하고 묻는 듯하다.

왜? 내가 못할까 봐서?

아니지. 그냥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피식.

이래 봬도 노래방 경력만 천 년이네요.

웃음을 흘리며 강당 한편에 놓여 있는 탬버린을 잡았다.

청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 역시 씨익 웃더니 신 나게 기타를 쳐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반주에 맞춰 탬버린을 흔들었고.

“꺄아아아아아악!”

“오빠아아아아!”

함께 온 자원봉사자들이 거의 광분 상태가 되어 고함치는 걸 보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속에서 노래했다.

마이크조차 없이.

“어차피 잊어야 할 사람이라면-”

와아아아아아!

비교적 적은 크기의 강당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지며, 박수소리가 한층 커지고.

이내 사람들이 따라부르기 시작한다.

할아버지 한 분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둥실둥실 춤까지 추고 계신다.

- 근심을 내려놓고.

다 함께…….

“찬찬찬!”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 ‘다 함께 찬찬찬’이 강당을 벗어나 양로원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래.

다른 건 다 바뀌어도 안 바뀌는 게 있는 법이다.

강당 안을 신 나게 뛰어다니며 탬버린을 치면서 노래하고 있는 내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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