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224. 자선 공연(1)
뉴욕에 도착해 막 입국장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사람들이 TV 앞에 구름떼처럼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이른 아침이라고 하긴 뭐하고, 새벽이라고 해도 무방한 시간.
그래서 그런가 공항 안에는 그리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 때문에 TV 앞에는 공항 안의 사람들이 전부 몰려든 거 같은 느낌이었다.
“시작됐나 보다.”
고 팀장님의 말씀대로였다.
화면에선 시리아로 진격 중인 전차들과 함께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전투기들이 보였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병력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 제대로 IS를 상대할 모양인데…….
“큰일이네요.”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지만, 전쟁의 참상이 그려지는 듯해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때, 고 팀장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떼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오늘, 브라이언이 보자고 하던데 역시 자선 공연 때문이겠죠?”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뇨.”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밥이 오나 궁금해서요.”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네.”
고 팀장님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니 떠오른 것이다.
공연만 했다 하면 기억이 사라지는 문제가.
이거 누구랑 얘기를 해야 하나?
밥이랑 해볼까?
쯧, 그전에 병원에 가보는 게 먼저지 싶기도 하고.
좀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
마루 누나는 직접 공항으로 나오진 않았다.
대신 전화가 걸려왔는데, 지금 장난 아니게 바쁘단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원래도 일정이 빡빡했는데, 내가 한국까지 다녀왔으니.
하는 수없이 택시를 타고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 실비아가 갔으니까, 타고 와.
오, 우리에겐 빨강 머리 실비아가 있었다는 걸 깜빡했다.
공항을 나서자, 저만치에 익숙한 차가 보인다.
CDM에서 내어준 리무진이다.
우릴 발견했는지, 슬금슬금 다가오는 리무진.
운전석 문이 열리고 실비아가 내리며 인사해온다.
나 역시 손을 치켜들곤 그녀가 열어주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고 팀장까지 탄 후, 실비아가 모는 차는 맹렬한 속도로 공항을……. 응? 맹렬한?
“저……. 실비아?”
“왜요?”
“설마 운전면허증이 없거나 한 건…….”
“저 고등학교 때 땄는데요?”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근데, 되게 터프하네.
끼이이이이익.
차가 도로를 미끄러지며 엄청난 각도로 회전하고 있다.
누가 보면 드리프트라도 하는 줄 알겠다.
보진 못했지만, 방금 차가 꺾어 돈 모퉁이 바닥에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뭐, 습관인가 보지…하고 생각할 때였다.
“차는 처음 몰지만요.”
실비아의 말에 나뿐만이 아니라 고 팀장님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버럭 소리치셨다.
“세워!”
“예?”
“세우라고!”
고 팀장님의 고함에 질겁한 실비아가 차를 도로 한편에 붙이곤 멈춰 세웠다.
그러자 고 팀장님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나가 운전석에서 실비아를 끌어냈다.
그러곤 운전대를 잡으며 중얼거리셨다.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아, 그러셨구나.
‘끽해야 죽기밖에 더한 건’ 두렵지 않은데, 장가 못 가고 죽는 건 두려우신 거구나.
킥 하고 웃자, 고 팀장님이 날 한차례 흘끔 쳐다보곤 콧잔등을 일그러뜨리셨다.
지금의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으신 모양이었다.
그랬건 어쨌건 우리의 실비아 양께선 내 옆에 붙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속해서 사진을 찍어 대고 있었다.
***
집인지 회사인지, 이제는 나도 헷갈리는 찰리스 건물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날 반겨준 것은 다름 아닌 리노였다.
“키임!”
도도도 달려오더니 날 덥석…안지는 않고 내 바로 앞에서 멈춰 서서 공손하게 인사하는 녀석이 귀여워 한차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저만치서 강나리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한국을 떠나서 여기서 트레이닝을 받는 중이라고 하더니만.
“잘 지냈어요?”
내가 묻자, 강나리가 고개를 내젓는다.
응?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나? 아니면 음식이 안 맞거나 잠자리가 불편한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아, 그 뜻이었나?
“그래? 그럼 그럴게. 잘 지냈지?”
그제야 강나리가 활짝 웃는다.
“예. 모두 잘해주셔서요.”
그때였다.
“요올! 도준 왔어?”
디알로가 3층에서 쿵쾅거리며 뛰어 내려왔다.
“나리도 있었네? 도준, 나리보고 노래하라고 한 거 너라며?”
“응.”
“와! 이 자식! 진짜 귀 좋네. 너 어떻게 알았냐? 나리 장난 아니야. 기본기가 얼마나 튼튼한지……. 게다가 성량이랑 고음도 끝내주고. 어쩌면 제2의 베델이 될지도 모를 정도라니까.”
밥 발라드와 블루 아이드 소울이 특징인 창법으로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치며 세기의 디바로 우뚝 선 영국의 여성 싱어. 단지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기엔 엄청난 매력을 지닌 이 아티스트에 비견될 정도라고 나리를 칭찬하는 소리에 난 눈이 동그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였나?
의외네.
노래를 잘한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그래? 그럼 말 나온 김에 좀 들어볼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리는 내가 데려온 아이였다.
솔직히 노래를 잘하는 거 같아서 데려온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 팬클럽의 회장으로서 고생한 데에 감사하는 측면도 없잖아 있었다.
세계적인 수준까진 바라지 않았고, 그저 한국에서만 통해도 될 거란 계산도 있었던 것이다.
“안 피곤하세요?”
“계속 잠만 잤는데, 뭐.”
“우리 이따가 회의하잖아.”
디알로의 물음에 난 시간을 확인해보곤 얘기했다.
“다섯 시간도 더 남았구만 뭘. 가자.”
***
와 놀래라!
한창때의 애들이 아무리 하루 지나면 못 알아본다지만, 진짜 이게 말이 되나?
쿠세가 없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음이 완전 안정되었다.
그러고 나니까, 고음도 더 올라가고 저음 또한 보강된 느낌이다. 게다가 성량도 더 늘어난 거 같고.
하기야 아무래도 혼자서 취미 삼아 부르는 거랑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는 건 다를 수밖에 없겠지.
다만…….
“다시 한 번 불러볼래?”
“예? 예…….”
잔뜩 기대한 눈으로 날 보다가 다시 부르라니까 기죽은 눈치다.
참네. 토끼처럼 귀를 늘어뜨린 모습하고는.
귀엽긴 하다만, 조금 손이 가는 성격이네.
“몇 군데 짚어줄 게 있어서 그래. 그것만 확실히 하면 바로 음반 취입해도 되겠다.”
“으, 음반이요?”
화들짝 놀라는 순간 눈이 커지는 게 진짜 토끼 같다.
픽하고 웃고는 기타를 잡았다.
그러곤 바로 반주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긴 호흡을 하며 노래를 끝내는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전반부에 성량이 조금 부족한 느낌이야. 아, 잘못 불렀다는 게 아니라 음만 쫓다 보면 그럴 수 있어. 경험부족이라고 할까, 아무튼 이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기억해둬.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차라리 음을 놓치더라도 제대로 호흡해야 해. 성량 조절은 단지 목소리가 크다 작다의 문제가 아니니까. 감정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딱 세 군데만 짚어주었다.
그런데도…….
“와! 나리! 나 완전 감동했어!”
“크크크. 내가 그랬잖아? 도준이가 짚어주면 다 끝난다고. 이제 우리 나리 데뷔하는 일만 남았다!”
“좋네.”
“그치? 좋지?”
방안 한쪽에서 듣고 있던 레이크헬이 박수까지 치며 칭찬을 하자 나리가 얼굴이 새빨개졌다.
특히 리노가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자, 눈을 마주치곤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건 그런데…….
저 자식은 언제부터 우리 나리래?
나 참, 기가 막혀서.
내가 디알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왜? 나리 예쁘잖아? 착하잖아? 귀엽고……. 꼭 내 동생 같아서 그러는데, 뭐 잘못됐어?”
할 말 없다.
동생 같아서 그런다는데 뭐라 그러냐?
“도준. 너 나리한테 곡 줄 거야?”
그때 물어온 베릴의 물음에 난 바로 대답했다.
“이미 다 만들어놨는데? 나리 것도 그렇고. 리노 것도.”
아직 기본기가 다듬어지지 않아서 주지 않은 것일 뿐.
“캬! 우리 도준, 일하는 거 봐라. 이렇게 철두철미하고 후배 사랑이 지극하다니까.”
디알로가 엄지까지 척 치켜세우며 웃어 보였다.
반면 당사자들, 즉 나리와 리노는 눈이 더없이 커진 채 날 쳐다볼 뿐이었다.
믿기 어렵다는 얼굴들이었다.
“적어도 내년엔 데뷔한다는 생각으로 해보자구. 오케이?”
“예!”
“……예.”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목소리, 다른 톤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
브라이언은 혼자 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두 사람을 대동했다.
밥 데일런과 폴 매카트넌.
아니, 놀랄 일도 아닌가?
언젠가 두 사람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기회가 되면 함께 자선공연도 하고, 오프닝도 서달라고 했던 얘기들이.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밥과 폴이 연달아 인사를 해왔다.
“저야 늘 똑같죠.”
폭탄이랄지 축복이랄지……. 음의 시공간이 보이거나 공연만 하면 기억이 날아버리는 둥 계속해서 문제가 생기는 중이란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자, 그럼 간만에 다 같이 얘기 좀 나눠볼까?”
브라이언이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가고, 그 뒤를 밥과 폴 그리고 나, 레이크헬이 따라붙었다.
***
“그럼 이제 한 가지만 결정하면 되겠네.”
브라이언의 말대로였다.
공연 날짜는 한 달 뒤.
미국에서의 투어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캐나다로 넘어가기 전 2주일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연지를 미국으로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번 자선공연은 되도록 많은 기부금을 모금하는 게 최우선 목표였고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모를 IS의 테러로부터 가장 안전한 장소가 미국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합당한 결론이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진 지역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명목이었기 때문에 자칫 IS나 여타 이슬람 무장단체들을 자극할 수도 있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만 남은 거죠, 뭐.”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겠는가?
누가 무대에 서는가이다.
특히 이번처럼 여러 명이 무대에 오르는 합동공연의 경우엔 더더욱.
“중요하지. 그렇지만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너도 있고 레에크헬에 밥이랑 폴까지 있으니까. 아마 이 소식이 알려지면 너 나 할 것 없이 참여하고 싶어할 걸?”
“그럼 다행이지만요.”
“걱정 말래도 그러네. 장담하는데, 역대급 공연이 될 거다.”
브라이언이 호언장담하는 걸 들으며 나는 눈길을 돌렸다.
뭐, 공연은 걱정 안 한다.
걱정되는 건 나일 뿐.
아, 다른 건 모르겠는데…….
공연 중에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설마.
기억이 날아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들 긴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병원부터 다녀와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굳혔을 때였다.
밥이 전화를 받는 게 보였다.
“오, 웬일이야? 나한테 전화를 다 주고. 응?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도준? 당연히 함께 하기로 했지. 어, 그래? 우리야 좋지!”
갑자기 껄껄 웃으며 전화를 끊은 밥 데일런이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묻는다.
“도준, 혹시 오프라하고 친해?”
“예?”
친하다면 친하긴 한데…….
근데 그건 왜 묻나 싶어서 바라보자, 밥 데일런이 말했다.
“네가 참여한다고 하니까, 자기도 자선 콘서트에 출연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때였다.
이번엔 밖에서 호들갑스러운 마루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곤 노크 소리와 함께 누나가 들어왔다.
“방금 멜리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 도준이 참여하면 자신도 이번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네요!”
멜리나?
아메리칸 갓 탤럴트에 심사위원으로 함께 출연 중인 그 멜리나?
솔직히 놀랐다.
다들 어떻게들 알고 연락해오는 걸까?
하지만, 이게 시작이란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밥과 폴을 비롯해 레이크헬 그리고 브라이언과 회사 전화로 끝도 없이 전화가 이어졌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는 몰라도 이름만 대도 알만한 싱어들이 혹은 밴드들이 참여 의사를 전해온 것이다.
심지어는…….
“베델한테 전화 왔어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마루 누나의 외침에 나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