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23화 (223/260)

# 223

#223. 생명의 무게(3)

밥 데일런과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선 일단 알겠다고 말했다.

회사에 말해봐야 하겠지만, 안된다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오늘 중으로 연락드릴게요. 죄송해요. 마음은…….”

- 이해해. 그럼 기다리고 있겠네.

전화를 끊고 나서 곧바로 아저씨께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설명했고, 아저씬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선 잠시 말씀이 없으시더니 금방 다시 전화한다고 말하곤 끊으셨다.

아마 CDM측과 얘기를 해보려는 거겠지.

뭐, 그쪽에서도 안된다고 할 리는 없겠지만 시기가 미묘했다.

현재 내가 월드 투어 중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도 심사위원으로 출연 중이고.

그러다 보니 사실상 스케줄은 꽉차다 못해서 잠잘 시간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오늘 오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쯧, 예은이를 생각하면 한동안은 한국에 있고 싶은데…….

부르르.

다시금 울리는 전화.

진동이 시작되자마자 받았다.

“예. 아저씨.”

- 브라이언도 오케이라네.

“스케줄엔 문제없겠죠?”

안 그래도 지난번에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스케줄이 꼬일뻔했었다.

막말로 누군가는 그까짓 콘서트가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회사 사정도 그렇고 팬들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런데 이번엔 예은이가 갑자기 태어나는 바람에 서둘러 한국에 들어온 참이다.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나 하나 때문에 브라이언을 비롯해 CDM과 회사 식구들은 지금쯤 속깨나 앓고 있을 거였다.

일정이라는 게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좀처럼 회복이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 브라이언이 걱정 말라고 전해달라더라. 밥 데일런 쪽하곤 알아서 스케줄 조정한다니까, 내일 아침까지만 와달라고 하네.

“그럴게요. 지금 병원 가는 길이니까, 예은이……. 아, 말씀 안 드렸죠? 조카 이름이 예은이에요. 예쁘죠?”

- 그러네. 진짜 예쁘다. 민준이한테도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예. 형하고 형수한테 전할게요. 병원 들렀다가 곧바로 출발하면 아침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에요.”

-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마지막 당부가 왠지 따스하게 느껴져 미소를 머금은 채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얼른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망설였다.

원래는 한국에 들어오면 회사에 잠깐 들릴 참이었는데…….

이참에 준영이 형도 좀 보고, 씨크릿걸즈 앨범에 실린다는 곡들도 한번 봐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겠다.

“뭐, 그건 메일로 확인해도 되니까.”

병원으로 가면서 준영이 형이랑 통화나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넋을 잃고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이건 의식적으로 그러는게 아니다.

그래, 본능이다.

아직 눈도 못 뜬 채 꼬물거리는 아이인데…….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 있지?

아니,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어제의 그 쭈글쭈글하던 피부는 다 어디로 간 거람?

손발도 도톰한 게 너무 사랑스럽고,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엔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크크크. 진짜 예쁘지 않냐? 이게 다 날 닮아서 그런…….”

“장난해? 어딜 봐서. 형을 닮았다는 거야? 미쳤네, 진짜. 그치 예은아?”

형이랑 투닥거리고 있자, 형수가 풉하고 웃는다.

그러더니 아이를 살며시 내게 내민다.

“어? 저, 저요?”

고개를 끄덕이는 형수.

아, 어쩌지?

살면서 한 번도 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는데.

괜히 잘못 안기라도 하면…….

아니, 그전에 나 세균 없나?

손발은 아까 화장실 다녀올 때 씻었고.

옷은 갈아입고 왔으니까…….

“뭐해, 인마! 예은이 안기 싫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헐! 천하의 김도준이 얼어붙었네. 햐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탁!

형이 내 등을 미는 게 느껴진다.

그 바람에 앞으로 한걸음 나아간 나는 엉겁결에 형수가 내민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아!”

작고 여린 아이가 양팔에 들리는 순간,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웅얼웅얼.

예은이가 붉고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고 있을 때였다.

덥석.

인형 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작은 손이 내 손가락을 잡아왔다.

순간 뭔가 울컥한다.

그러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가슴.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봐, 봤어? 지금 나한테 삼촌이라고 하는 거?”

“쯧, 이거 영 헛빵이네. 얀마! 태어난 지 이틀 됐다, 이틀. 응? 세상에 이틀 만에 말하는 애가 어딨냐? 아무리 우리 애가 날 닮아 영특하다지만…….”

“그, 그런가? 이상하네. 삼촌이라고 한 거 같……. 응? 봐봐! 지금 예은이 입술. 삼촌이라고 하는 거…….”

퍽!

뒷머리를 강타하는 통증에 벌컥 화를 냈다.

“아,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다 애 떨구면 어쩌려구!”

“아우, 이 팔불출 새끼!”

“애 앞에서 욕하지 마. 우리 예은인 이쁜 말만 듣고 자라야…….”

“풉!”

형수가 웃음을 터뜨리고, 양가 부모님들께서도 미소를 머금은 채 보고 계셨다.

진짜 신기하다.

식구가 한 명 더 늘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예전과는 백팔십도 다르다니.

병실 안이 따스하다 못해서 포근한 봄날 같은 건 날씨 탓만은 아닐 거다.

와아아아아아아앙!

예은이가 울음을 터뜨린 것도 그때였다.

나랑 형이 투닥거리는 바람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어찌할 줄 모르다가 흥얼거렸다.

자장가라도 불러줄 심산이었는데, 하필이면 나온 게 어젯밤 작곡한 곡이었다.

물론 허밍이었다.

한데…….

예은이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그치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그러곤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동시에 내 손가락을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내게 몸을 기대어온다.

아, 진짜 귀엽다.

근데, 예은이의 상태가…….

어째 내 노래, 아니 허밍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착각이겠지?

“어떡하냐? 삼촌 이제 가야 하는데. 우리 예은이 보고 싶어서 아무것도 못하겠다. 응? 예은이도 그렇다고? 흐흐흐. 역시 예은인 세상에서 삼촌을…….”

“아이고, 문딩아! 그만하고 이리 줘. 예은이한테 바보병 옮겠다.”

와, 내가 살다 살다 형한테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기가 막혔지만,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느낌이라 코만 훌쩍이며 아이를 형수한테 건넸다.

혹여라도 실수할까 봐 무척이나 조심하면서.

그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고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큰 오빠?”

어머니의 외침에 돌아보니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 내외가 서 있었다.

***

형과 형수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선물 한 꾸러미를 안겨준 외삼촌들은 외숙모들만 병실에 남겨놓고 나와 함께 병원 1층에 있는 커피숍에 와 있다.

“좀 갖다 주면 안 되나? 정말이지, 이놈의 커피숍들은 당최 적응이 안 돼요, 적응이.”

큰 외삼촌의 투덜거림에 작은 외삼촌이 피식 웃는다.

“자꾸 그러니까, 애들이 촌스럽다고 하는 거요. 벨 울리며 가서 가져오면 되는데 이게 뭐 어렵다고, 쯧쯧.”

혀까지 차는 작은 외삼촌이었지만, 큰 외삼촌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것보다는 아까부터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음, 그러고 보니 주주총회가 있었겠구나.

“말씀하세요.”

조심스럽게 말하자, 큰 외삼촌이 공연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곤 하신다는 말씀이.

“맛은 있네.”

속으로 웃음이 났지만, 티 내지 않았다.

어지간히 민망하신 모양이다.

그럼에도, 난 가만히 기다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입장은 아닌 거 같아서.

그걸 아는지, 큰 외삼촌이 작은 외삼촌과 시선을 교환하는 듯하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결과만 얘기하마.”

“…….”

“회장직은 내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네 작은 아버지가 부회장을 맡기로 하고.”

말은 저리 간단히 하시지만 모르긴 몰라도 피 말리는 신경전, 아니 피 튀기는 싸움이 있었을 거다.

그것도 다른 조력자도 없이, 이제까지 쌓아왔던 힘만 가지고 싸웠을 테니 두 쪽 모두 힘겨운 싸움이었겠지.

어찌 되었든, 되었다.

나로선 만족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그럼 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네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큰 외삼촌께 말씀드렸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앞으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제가 가진 지분은 큰 외삼촌께 우호지분이 될 겁니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 보였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이란 뜻을.

만일 그 별다른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 배를 갈아탈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알겠다.”

“후우. 그럼 이제 끝난 건가?”

큰 외삼촌에 이어 작은 외삼촌이 웃으며 물어왔다.

“배도 고픈데 어디 가서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어때?”

여전히 친근하게 물어오시는 외삼촌이셨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내겐 그럴 여유가 없었던지라.

“죄송해서 어쩌죠? 저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해서요.”

“출발? 아! 지금 콘서트 중이었지. 이런, 잘못했으면 널 보지도 못할 뻔했구나.”

웃으면서 먼저 몸을 일으키는 작은 외삼촌.

혹여 내가 불편해할까 봐서 그러는 걸 테지.

난 두 분 외삼촌들께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언제 왔는지 병실로 돌아와 보니 희주가 와 있었다.

“왔어?”

“방금. 근데, 애기가 너무 예뻐!”

그렇게 한참 동안 예은이를 중심으로 대화가 오가는 사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후우, 한 시간이 무슨 5분 같냐.

“이제 가야 할 거 같아요.”

형과 형수에게 인사를 하고 부모님께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러고도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삼촌, 얼른 다녀올게. 우리 예은이 잘 있어야 해? 알았지?”

“어이구! 해 지겠다, 자식아! 아까부터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기나 하냐?”

“아, 간다 가! 되게 구박하네. 예은아, 삼촌이…….”

형의 손바닥이 뒷머리를 강타하는 순간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병실을 나서며 다시 한 번 예은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씨! 눈에 밟히네.

그런 나를 희주가 배웅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왜애? 나 공항 갈 거야.”

“아냐, 지금도 좀 늦었거든. 나 때문에 고 팀장님 미친 듯이 밟아야 할 거 같아서 그래.”

내 말에 희주가 시선을 돌린다.

저만치 주차장에 세워놓은 밴 앞에서 고 팀장님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우릴 발견하곤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아, 알겠어.”

“미안해. 이따가 도착하면 연락할게.”

“응. 꼭 전화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쳐다보는 희주를 뒤로 하고 고 팀장님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

***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탑승 수속을 마치고 부랴부랴 출국했다.

내가 예은이 얼굴 한번 더 보겠다고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비행시간을 놓칠 뻔했던 것이다.

덕분에 다음 달에는 회사로 꽤 많은 속도위반 과태료 통지서가 날아오지 싶다.

“죄송해요.”

“뭘. 그런 거 가지고. 끽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냐?”

“…….”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 팀장이 저리 말씀하시니 농담처럼 느껴지질 않는다.

살짝 섬뜩해서 져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을 때, 고 팀장님이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들썩이신다.

하아,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진짜 모르겠다.

고 팀장님의 웃음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자라. 도착하면 스케줄 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예.”

아닌게아니라 며칠 쉬는 바람에 스케줄이 잔뜩 꼬인 상황.

아마 공항에서부터 마루 누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날 그 지옥 속으로 밀어 넣지 않을까.

그래, 잘 수 있을 때 자자.

딴 생각하지 말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몽롱해지면서 곧바로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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