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222. 생명의 무게(2)
정말 바보 같긴 한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예은이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외할아버지께서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 안다.
그게 다 욕심에 불과하다는 걸.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도 한 달이 지나 태어난 아이다.
그나마도 예정일을 일주일이나 앞당겨 태어났으니, 어떻게 보아도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쉽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솟구친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땐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는데…….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자 이번엔 뭐라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기쁘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런 게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태어나고…….
한데, 이걸 또 말로 내뱉으니 어딘지 모르게 현학적이고, 뭔가 개똥철학 같아서 영 탐탁지 않다.
그럼에도, 감정은 계속해서 바뀌며 묘한 기분이 들고 있다.
그렇기에 음악이다.
말과 글과는 달리 아직은 이 감정을 달리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할 수단이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이나 몰두해 머릿속에서 악상을 그리고 가슴속에서 솟구쳐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악보에 옮겼다.
그리고…….
정신없이 연필을 움직여 적어나가다가 마지막 음표를 그려넣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외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네 할애비라서 좋았다.”
동시에 떠오른 외할아버지의 얼굴.
돌아가시기 직전 편안한 얼굴로 따스한 웃음을 지어 보이시던 외할아버지의 모습.
그와 함께 떠올랐다.
갓 태어나 뭐가 그리 서러운지, 아니면 힘든 건지 쉴 새 없이 울어대던 예은이의 얼굴이.
어?
난 멍해지고 말았다.
툭.
오선지 위에 떨어져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가는 얼룩이 눈에 보였다.
당황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왜 눈물이?
그런데도 이상하게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져 있다.
뭐지? 이 감정은?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부모님이신 모양이다.
얼른 눈가를 훔치며 책상을 정리했다.
아니 그러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오선지들.
그새 얼마나 그려댄 건지.
이건 숫제 리포트 수준이다.
“아들, 자니?”
방 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음성에 정신을 차린 나는 조금 놀라서 멈췄던 손을 움직여 오선지들을 그러모았다.
후우, 모아서 묶어내면 공책 한 권은 되겠다.
대체 무슨 곡을 쓴 거지?
무아지경이라고 밖에는 말하기 어려운, 그런 상태에서 작곡한 곡인지라 내가 만들고도 무슨 곡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기로 하고…….
난 서둘러 움직였다.
오선지를 정리한 후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전 문 옆에 걸려 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 확인했다.
다행히 눈에 핏발이 서 있거나 하진 않았다.
부어 있지도 않고.
눈물 자국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야 문을 열었다.
“이제 오셨어요?”
어머니가 보인다.
한데, 날 보시는 게 아니라 거실 벽 한가운데로 시선이 가 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소파에 등을 세우고 앉아서 방금 켰는지 손에 리모컨을 든 채로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셨다.
눈길이 TV로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저러시는…….
“……!”
말문이 콱 막혔다.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물. 어디선가 본듯한 건물이 어둠 속에서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 자막에는…….
-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폭탄이 터져……. 정확한 피해 상황은 전해지지 않은 가운데, 많은 사상자가 있을 것으로 예상.
“테러?”
중얼거리는 내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줄 요량인지, 화면이 바뀌며 또 다른 장면이 보인다.
먼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짙은 회색빛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공항으로 보이는 곳이 대파된 가운데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소방차와 구급차가 달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 시리아 다마쿠스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차량 폭탄 테러.
-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괴한들의 총격으로 12명이 죽고 50여 명의 중상자가 난 것으로…….
급보로 전해진 뉴스에서 현장으로 보이는 곳에 서 있는 리포터가 급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현재 터키 당국이 공항 일대를 봉쇄한 가운데, IS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공항을 점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터키의 대테러 부대가 출동해 교전을 벌이고 있으며, 제리프 대통령이 지금 막 대국민 성명을 하는 중으로…….”
이어지는 화면에선 터키의 군통수권자인 제리프 파타인 에르디온 대통령이 심각하면서도 침통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 빠르게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IS의 소행으로 짐작되며, 만일 그것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응할 것임을…….”
터키만 그런 게 아니라 모스크바에선 푸톤 대통령이 단호하면서도 강경한 어조로 IS의 만행을 강하게 성토하고 있었다.
“미리 그들의 움직임을 예측해 막지 못해 많은 이들의 죽음을 불러온 것에 대해 러시아 국민들께 고개를 숙여 사과함과 동시에 이 자리에서 약속합니다! 이번 테러에 대응해 본국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복을 가할 것을…….”
섬뜩하다.
테러도.
앞으로 벌어질 보복도.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화면에선 테러 당시로 보이는 영상들이 뒤늦게 입수되었는지, 폭탄이 터지던 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방송되고 있었으며 폭발 직후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사람들과 폭발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혼비백산해서 흩어지는 사람들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난 테러로 인한 여파는 엄청났다.
아비규환도 그런 아비규환이 없었다.
공항에선 총성이 쉴새 없이 울리고, 끝내 총격으로 인해 테러범들이 전원 사살되었다.
현장 수습을 위해 병력이 대거 투입되고, 생각보다 많은 피해가 있었는지 많은 이들이 들것에 실려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중에는 이미 숨졌는지 하얀 천이 얼굴까지 덮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어떡하니…….”
어머니께서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 한층 더 가슴이 무거워졌다.
왜일까?
어째서 저들은…….
아직 IS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테러를 일으킨 자들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들에겐 가족도 없는 걸까?
아니, 그 가족들의 생사도 그들에겐 중요치 않은 건가?
그렇게 생명의 무게가 하찮은 건지…….
나로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한가지만은 안다.
어떠한 명분을 내세워도,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저건 아니라는 것.
사람이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그런 권리는 누구도 부여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목숨은 단지 그 한 사람의 것이 아니므로.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다는 건, 그저 그 누군가의 삶이 거기서 끝난다는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삶에서 소중한 부분이 억지로 뜯겨나가는 아픔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어떤 이에겐 친구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겐 혈육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도 사람으로서 느껴지는 감정은 또 어떤가.
지금 이 순간 TV를 통해 전해진 뉴스 한 자락을 접하고도 가슴이 메어지는 느낌인데…….
꾸욱.
주먹이 절로 말리며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 IS 측에서 성명 발표.
예상은 들어맞았다.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IS 측에서 선언했다.
러시아와 터키가 IS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시리아 북부 도시 락까에서 당장 군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테러는 계속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미국과 서방측에 대한 테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밝힘으로써 전 세계가 들끓기 시작했다.
어딘가는 이미 늦은 밤이었고, 또 어딘가는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많은 이들이 피켓을 들고 나와 시위했다.
특히 러시아와 터키에선 유족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메운 채 행진하며 정부의 단호한 대처를 요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IS에 대한 강경한 대처로 수많은 피를 뿌리고 있는 시리아가 더없이 위험해지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그나마 남아 있던 몇몇 국가의 대사관들이 철수를 서둘렀고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들까지 황급히 공항을 통해 빠져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대규모 토벌이 코앞으로 다가온 셈이었다.
***
털썩.
힘없이 의자에 앉자, 입술 사이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안타까운 상황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아는데….
가슴이 아프다.
예전 같으면 그저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 치부했을 수도 있고, 안쓰럽긴 해도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세계 어디에나 있는 내 팬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가족 그리고 친지들을 생각하면…….
이젠 그럴 수가 없다.
특히 외할아버지와 예은이에게까지 생각이 미치면…….
해선 안 되는 생각이지만, 만일에 하나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았다.
그 때문인지 어느새 나는 입술을 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에 띈 오선지.
책상 위에 놓인 오선지들에 절로 손이 갔다.
아마도 지금 가슴속에서 일고 있는 파문을 어떻게든 가라앉히고 싶은 생각에 그러했을 것이다.
사라락.
첫 음부터 시작해 끝 음까지.
오선지들을 살펴나간 나는 어이가 없어져 웃고 말았다.
1악장?
이거…….
“…교향곡이었나?”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연필을 그러쥐었다.
스스스슥.
그때부터 나는 다시금 작곡에 몰두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뿐.
이내 작곡에 푹 빠져들었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열중하기 시작했다.
***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끝난 작곡 작업.
지하로 내려가 직접 연주해보고 싶었지만, 머리가 무거워 그렇게까진 하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고, 눈을 감자마자 지쳐서 잠들었다.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방을 나왔지만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식탁 위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만이 보일 뿐.
[아들, 너무 곤하게 자길래 먼저 나가. 국 데워서 먹고. 엄마 아빤 병원에 있을게.]
형수한테 간 모양이다.
하긴 안 그래도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무리했는지 몸이 안 좋았던 형수다. 거기에 13시간의 진통을 겪고도 자연분만을 하지 못하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는 바람에 한동안 몸을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일 터.
뭐, 예은이가 보고 싶은 것도 있었겠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벌써부터 예은이의 그 꼬물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 덩달아 마음이 바빠진다.
급한 마음에 얼른 샤워를 하고 나온 뒤, 밥을 먹으며 TV를 켜는데…….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지난밤 테러에 대응해 IS에 대한 총공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터키는 물론이고, 미국을 위시해 UN 평화유지군이 속속 시리아 땅을 밟고 있었다. 거기에 이라크군까지 가세해 이번 기회에 IS를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주었다.
하나같이 IS에 대한 뉴스들이라 그런가 입안이 꺼끌꺼끌하며 좀처럼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지.
아니 어젯밤에만 수없이 많은 사상자들이 났을 터였다.
결국,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부르르르.
전화가 울렸다.
반가운 이름이 떠 있었다.
그럼에도, 반갑게 받을 수만도 없었다.
“예. 밥.”
밥 데일런이 이 시간에 내게 전화를 한 건 아마도 나와 같은 심정이기 때문일 터이니.
모르긴 몰라도 그는 지난밤 내내 안타까운 심정으로 TV를 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은 테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에서 격분한 음성이 들려왔……?
- 도준. 지난번에 말했던 거 기억하나?
어라?
차분한 음성이네.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지난번이요? 뭘…….”
그가 말했다.
담담하면서도 확고한 어조로.
- 콘서트.
“콘서트요?”
- 그래. 자선 콘서트 말이네.
이런 시기에?
아, 이런 시기라서인가?
뭔가 생각이 복잡해지려는 찰나였다.
밥 데일런이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격한 감정이 느껴지는 어조로.
- 많은 이들이 죽었어.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고통받을 거고. 전쟁이란 그런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닐 터다.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에 목숨을 잃는 이들도 문제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더 큰 문제다.
다친 사람들도 다친 사람들이고, 부모를 잃거나 아이를 잃은 이들의 슬픔은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테니까.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겪게 될 경제적인 문제들까지 생각하면…….
“……그렇겠죠.”
씁쓸하게 대답하자, 밥이 비감한 어조로 말해왔다.
- 그러니, 하세.
“…….”
-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