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 벽(2)
큰 외삼촌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셨다.
하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내 연락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던 목소리가 생생하니까.
그건 작은 외삼촌 역시 마찬가지.
아마도 두 분 다 내가 자신들의 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만큼 둘은 지금 백중세.
그동안 시간만 나면 내게 연락을 해온 것만 봐도 충분히 알만한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너 지금…….”
분노가 이는지 큰 외삼촌이 볼 살을 부르르 떨면서 내게 삿대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반면 작은 외삼촌은 미동도 하지 않으셨지만, 표정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배신감에 치를 떠는 얼굴이셨던 것이다.
나 참. 한 번도 누구의 편을 들어준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는데.
“고정하시고요. 일단 숨 좀 돌리세요. 삼촌.”
“이놈이! 지금이 내가 그러게 생겼냐!”
방방 뛰는 큰 외삼촌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두 분과 차례로 시선을 마주치며 천천히 말했다.
“그럼 제가 어찌 해야 할까요? 진짜 둘 중 한분 손을 들어주면 좋겠어요? 정말로?”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씀도 못하는 삼촌들.
그럴 수밖에.
내가 정말 마음먹고 한명을 밀기 시작하면 나머지 한명은 영락없이 물을 먹을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세력구도가 팽팽하다 못해서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인 상황에서 그랬다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역전은 불가능할 테니까.
한마디로 내손에 칼자루가 주어져 있다는 얘기다.
쯧. 하여간 외할아버지도…….
이걸 다 내다보고 계셨다는 거겠지.
하긴, 지금의 상황 자체를 만들어 내신 것도 외할아버지시니까.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아마 짐작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당신을 똑 닮은 나라는 걸 너무나 잘 아셨으니까.
“불편하신 거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죠.”
금방이라도 고함을 내지를 것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시는 큰 외삼촌.
말씀도, 얼굴 표정도 변함이 없으시지만 이제까지 날 살갑게 대하던 눈빛과는 달리 싸늘한 눈으로 날보고 계신 작은 외삼촌.
이러니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해봐라.”
작은 외삼촌의 나직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이 잔뜩 선 음성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말했다.
“두 분은 이제부터 저를 없는 셈 치세요.”
“뭐?”
큰외삼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쳐다보았고, 작은 외삼촌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들 놀라시기엔 너무 이르지.
난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얘기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하나뿐입니다. 틀림없이 두 분 중 한분께 힘을 실어드릴 겁니다.”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런가, 두 분은 아무런 말없이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다만, 삼촌들이 예상했던 것과 순서가 다를 뿐이죠.”
“그게 무슨 뜻이냐?”
큰 외삼촌이 버럭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모습에도 난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무슨 뜻이긴요.
이런 뜻이지.
“제가 보태드린 힘으로 회장 자리에 오르지 마시고, 직접 싸우셔서 그 자리를 쟁취하시란 겁니다. 그러면 그때 제가 지지하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큰 외삼촌이 인상을 팍 구겼다가 이내 소리쳤다.
“그래서야 뭔 소용이 있단 말이냐!”
하아, 진짜 어떻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못하실까.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날 노려보면서 부들부들 떠시는 큰 외삼촌.
아, 이해는 한다.
한쪽은 그룹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음료를, 또 한쪽은 음료를 제외한 나머지를. 그렇게 사이좋게 나눠가지고 있다 보니 사실상 어느 쪽도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
이제까지는 내가 한손 보탤 것을 믿고서 적당한 선에서 경쟁해왔지만, 이렇게 되면 정말 피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을 거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도준아!”
큰 외삼촌이 울컥하는 표정을 감추며 날 큰 소리를 불렀을 때, 작은 외삼촌이 물어오셨다.
“음……. 진짜 우리가 그러길 바라는 것이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시겠지만, 나로서도 정말 오랫동안 고민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나만 묻자.”
워낙 다혈질이라 연신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지 못하고 계신 큰 외삼촌과 달리 비교적 차분한 태도로 다시금 내게 물어 오시는 작은 외삼촌이셨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뭐냐?”
어딘지 모르게 의심스러운 눈빛.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오려한다.
설마 내가 두 분이 박 터지게 싸우는 틈을 타서 그룹을 통째로 삼키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
어이가 없네.
이런 말 하면 좀 뭐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현재 내 가치가 두 분이 그렇게 사활을 거고 덤벼드는 D그룹의 가치보다 크다는 걸 아시는지모르겠다.
그룹의 경영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어찌 보면 다소 잔인해보일정도로, 내가 이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후우. 삼촌. 두 분이서 멱살을 잡으시던, 주먹다짐을 하시던 전 상관 안 해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진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두 분이 제 삼촌이란 것도 변함이 없고요. 무엇보다…….”
날 빤히 쳐다보는 삼촌들께 얘기했다.
“애당초 외할아버지께서 왜 두 분께 그렇게 지분을 나눠줬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힘을 보태서 원하시는 걸 얻은들 그게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싸우세요. 손수 쟁취하세요. 그리고 받아들이시라고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말이에요.. 그게 최 씨 가문의 방식 아니었던가요?”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작은 외삼촌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 큰 외삼촌조차 어느새 흥분을 가라앉힌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 외삼촌이 물어왔다.
“하면, 지금 그게 아버지의 뜻이란 말이냐?”
난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제 생각이에요.”
내 대답에 큰 외삼촌이 뭐라고 다시 물으려는 찰나, 먼저 말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으면 저랑 별반 차이 없으셨을 거 같네요.”
말문을 닫고 날 바라보시는 큰 외삼촌.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계신 작은 외삼촌.
두 분께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것은 경고이자, 부탁이기도 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싸우시되 담장을 넘기진 마세요. 만일 담 밖에서 힘을 빌려온다면, 그땐 저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지키고 싶은 건 외할아버지의 회사지, 외삼촌들이 아니니까요.”
진심이었다.
둘 중 하나가 떨어져나가서 거지꼴이 되던, 아니면 둘이 상생하는 길을 택해 사이좋게 회장 부회장을 하던 난 상관치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집안이 아닌 외부의 누군가가 그룹을 좀먹는 건 참지 못하겠다.
그랬다간 지하에 계신 외할아버지께서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 거 같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할 말 다했으면 이만 가보마.”
먼저 일어선 것은 예상대로 작은 외삼촌이셨고, 큰 외삼촌도 별 얘기는 없으셨지만 아까완 달리 한층 냉정해진 표정이 되어 객실을 떠나셨다.
***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입국했던 터라 돌아갈 때도 그렇게 했다.
사실 시간이 많지도 않았고.
만일 주총이 머지않았다면, 이렇게 급하게 나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무튼 나름 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은 뒤, 뉴욕으로 돌아온 나는 지금 니콜 교수님과 마주하고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평소와 달리 다리도 꼬지 않은 채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눈빛에 걱정이 한 가득이다.
그러면서도 외할아버지일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으신다.
이미 한차례 오갔던 얘기를 다시 꺼내면 혹여 내가 상심이라도 할까봐서 걱정하시는 거겠지.
봐라. 숨 한번 안 돌리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거.
“내가 킴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에요. 교향곡 앨범 발매를 위한 녹음이 끝난 건 알고 있죠?”
“예.”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 교수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얘기했던 거 같은데, 조만간 독일에서 연주회가 열릴 거예요.”
어떤 곡을, 누가 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미국과는 달리 어지간히도 클래식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게 유럽. 특히나 독일이었으니까.
내 속내를 읽으신 건가.
니콜 교수님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지만, 좀 더 자신을 가져요. 장담하는데, 앞으로의 시대는 킴의 시대가 될 거에요.”
제자를 믿어주시는 스승. 좋기는 한데……. 무지하게 부담스럽다.
거기에 우리 스승님께선 무게 추 하나를 더 올리신다.
“그래서 말인데. 설마 이걸로 끝은 아니겠죠?”
“……그 말씀은?”
“김도준 교향곡 2번. 아니면 피아노 협주곡이라도 하나 작곡해야죠. 안 그래요?”
멍하니 니콜 교수님을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아니 되물었다.
“저 아직 콘서트 중인데요?”
그러자, 니콜 교수님께선 이미 내가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 입 꼬리를 끌어올리셨다.
“봐요. 도준. 언제는 킴이 시간이 차고 넘쳐서 작곡을 하고 앨범을 발표했었나?”
어느새 달라진 말투였다.
눈빛도 마찬가지.
힐책까진 아니지만, 엄한 스승의 눈빛을 하고 계셨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넌 아니지. 그렇잖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건 능력이 안 되어 못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문제. 특히나 넌 내게 약속했었잖아?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겠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건……. 그래. 직무유기나 다름없지.”
뭔 말씀인지……. 논리적으로 맞는지 틀린지는 둘째 치고. 한 가지는 알겠다. 만일 여기서 고개를 흔들기라도 했다간 살짝 한기가 감돈 채 미소를 짓고 계신 니콜 교수님이 가만있지 않을 거 같다는 거였다.
더구나 이렇게까지 날 몰아붙이시는 거 아마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음악에 집중함으로서 가슴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슬픔을 떨쳐내길 원하는 게 아닐까 짐작되었다.
“노력은 해보죠.”
“그래요.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아, 그리고 이번 학기는 월드 투어 일정상 어쩔 수 없이 휴학 처리했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피아노를 멀리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못한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
“콩쿠르 한번 나가보는 게 어때요?”
에? 콩쿠르?
난데없는 제안에 황당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크게 변한 건 없었지만,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김도준 앱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곡이 발표 중이었고, 그런 와중에도 내 이름은 계속해서 빌보드 차트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아메리칸 갓 탤런트 역시 엄청난 이슈몰이를 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 공연을 위해 돌아와 있던 터라 녹화가 한결 쉬워졌다는 점이랄까.
그래봐야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차로 움직일 생각은 엄두도 못 냈지만.
그리고 한국에선 D그룹의 주총이 나흘을 남겨놓은 시점에 미국에서의 첫 공연이 열렸다.
LA로 날아가 CDM 측에서 준비한 호텔에서 하루 묵은 뒤, 공연장으로 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차장을 가득 메운 텐트들.
“이, 일주일이요?”
무려 일주일 전부터 노숙을 하며 공연을 기다렸다는 팬들. 황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코끝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무대 위에 오르기 전부터 눈앞에 생겨난 새하얀 빛들.
음의 시공간이 평소와 달리 강하게 느껴진 것은.
와, 무슨!
여태 경험한 것들 중에 가장 강렬한 느낌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꼭 무슨 약에 취한……. 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해도 장담할 순 없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환상적인 느낌이었다.
아마도 팬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나 역시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은데….
화아아아악!
콘서트 시작과 함께 팬들에게 인사대신 불러제낀 첫곡에서부터 터졌다.
엄청난 빛이.
눈이 멀 듯한 섬광이 말이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헉헉헉!”
무대에서 내려온 내게 마루 누나가 말했을 때 난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진짜 대단하네! 근데 괜찮아? 하아, 그래도 그렇지. 앵콜만 네 곡이라니…….”
응?
뭐지?
앵콜?
방금 시작했는데, 웬 앵콜?
난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루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공연이……끄, 끝났다고요?”
뭔가를 느낀 건가?
마루 누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도, 도준아. 괜찮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날 걱정하는 누날, 아니 모두를 생각하면 괜찮다고 말해야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조리 날아간 것이다.
콘서트 내내 내가 무얼 했는지, 심지어 방금 앵콜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통째로 사라졌다.
내 기억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