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218. 벽(1)
첫 방송이라 그런지 두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진 녹화에서 재능이 출중한 출연자들이 대거 출현했다.
그 덕분에 사이몬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의 거침없는 입담이 이어졌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던 캘리조차 때때로 감탄하고 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할 정도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이 방송이 나갈 때쯤에는 시청자들 역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터였다.
때문에 티아라가 녹화 내내 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을 지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심사 도중 기가 막힌 타이밍에 끼어들어 그 특유의 거침없는 말솜씨로 때론 날카롭게 또 때론 부드럽게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이 훌쩍 넘어 거의 세 시간이 다 되었을 때야 비로소 방송 촬영이 마무리 되었다.
“이거 뭐 버릴 게 없겠는데요?”
“편집만 잘하면 오프닝 포함해서 2회차까진 무난하겠어요.”
“호호호. 무난? 그런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죠. 제가 장담하는데 방송이 나가면 난리가 날 걸요. 뭐, 킴이 심사위원석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할는지도 모르지만요.”
티아라의 얘기에 사이몬이 맞장구를 쳤다.
아니 한손 더 보태고 있달까.
“크큭. 그럼 킴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다 뒤집어지겠군. 근데 그 노랜 신곡으로 발표할 겁니까?”
무슨 노래를 말하는 지야 뻔한 얘기고.
그저 빙긋이 웃고 있자, 멜리나가 불쑥 물어왔다.
“제목이 뭐에요?”
“글쎄요. 아직…….”
그때였다.
캘리가 말했다.
“웨하라브지.”
“응? 그게 무슨 말이죠? 혹시 한국어인가?”
멜리나를 비롯한 모두가 의아한 눈빛으로 캘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거참, 사람 민망하게.
근데, 캘리는 저 단어의 뜻을 알고 하는 말인…….
“그랜파더.”
어?
한국말을 못 알아들은 줄 알았더니 정확히 알고 있네?
뜻밖이란 생각에 캘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날 마주 바라본다.
그 눈빛이 마치 이정도로 노력했으니 칭찬해달라는 듯 느껴졌다.
“어 뭐야? 두 사람!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아! 그러고 보니 스캔들 났었…….”
사이몬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적극적으로 달려들려고 하자, 캘리가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촬영 끝났으면 먼저 좀 가 봐도 될까요?”
“그래요. 다들 고생 많았어요.”
티아라가 쿨하게 대답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채로.
***
마루 누나와 실비아를 양쪽에 끼고 주차장 쪽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니, 은빛 찬란한 곡선을 자랑하는 매끈한 스포츠가 한 대가 서 있다.
뚜껑이 열린 채로.
그곳에는 캘리가 선글라스를 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픽하고 웃고는 그쪽으로 걸어가자, 그녀가 말한다.
“나 배고픈데.”
헐! 지금 온 세상 남자들의 워너비인 여자가 이 무슨 얄팍한 수작질인지.
고개를 내젓다가 물었다.
“진짜 겁도 없네. 저기랑 저기. 파파라치들 안보여? 내가 여기 타면, 내일 아니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우리 사진이 인터넷을 도배할 걸?”
틀림없다.
만일 저 기자들이 타블로이드지 소속이거나 자극적인 정보들을 팔기 위해 발품을 파는 하이에나들이라면 한 시간은커녕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랑 캘리의 염문설이 전 세계에 뿌려질 거다.
뭐, 지금 이 장면도 충분히 위험하긴 하지만 곧 아메리칸 갓 탤런트를 함께 촬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금세 가라앉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그녀의 차에 내가 타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그런데도 이 여자, 그저 웃는다.
하는 말은 더 가관이다.
“겁나? 난 괜찮은데. 오히려 바라던 바이고.”
아니 얘,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뭔가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희주와의 관계를 알고부턴 다소 소극적이더니만.
아,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도대체 왜 내주위엔 정상적인 사람들이 없는 걸까?
살짝 두통이 와서 이마를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캘리, 오랜만이네? 근데 이걸 어째? 2인승이라서 다 같이 타긴 어렵겠는데?”
마루 누나가 끼어들었다.
“뭐, 우리 도준이도 슬슬 연애라는 걸 할 때가 되었으니, 말릴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둘만 보내긴 좀 뭐하지? 보는 눈도 많은데. 그러니까, 다음엔 못해도 4인승은 끌고 와주시면 좋겠네. 아니면 우리 밴에라도 다 같이 타던가.”
여유롭게 웃음을 흘리며 누나가 덧붙였다.
“농담이 아니라, 적어도 출발할 때만큼은 그래야지 싶어서 하는 말이야.”
캘리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리고 조언 고마워요. 다음엔 다른 차 가져오도록 하죠.”
“오케이. 알아들은 거 같으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웃으면서 헤어질까? 도준이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이쪽으로 오렴.”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가는 마루 누나였다.
와, 쩐다.
나하고 있을 때랑은 달라도 너무 다른 거 아냐?
무슨 카리스마가…….
양파도 아니고.
하여간 여자들은 한 꺼풀 벗길 때마다 느낌이 다르니.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 알 길이 없다.
“다음에 봐.”
“응. 기대하고 있을게.”
망설이다가 캘리와 가볍게 포옹을 하는데…….
팡! 팡!
야이 씨!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사진을 찍으면 어쩌자는 거야?
인중을 길게 늘어뜨린 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실비아를 흘겨주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만.”
그러곤 돌아서는데, 뒤쪽에서 캘리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일은……. 못 가봐서 미안해.”
난 천천히 시선을 돌려 웃어보였다.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고맙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연락주지 못해서. 진짜 정신없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해 하진 말고.”
“……아, 알아.”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힘내.”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티아라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메리칸 갓 탤런트 첫 방영일.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워낙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방송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시청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웃긴 건 차에 타고 있는 캘리와 내가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타블로이드지에 실렸을 때, 티아라가 보인 반응이었다.
“둘이 꼭 연인 같네?”
묘하게 뼈있는 말을 하면서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웃었더랬다.
그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일을 아메리칸 갓 탤런트와 조금도 연관 짓지 못했고 여전히 방영 전까지 비밀은 유지되었다.
그 때문에 티아라가 날 소개하고 내가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곧바로 인터넷과 SNS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와 이게 무슨 일이야!
- 킴, 지금 월드 투어 중 아님?
- 그가 심사위원이라고?
- 그런데 이 노래는 뭐지? 처음 듣는 곡인데, 신곡인가?
- LONGING TIMES는 아닌 거 같은데, 뭐지?
- 가슴이 아픈 거 나만?
- 노노. 나도 노래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서 놀라는 중임.
- 제목 알고 있는 사람 손!
- 와우! 근데, 킴 말빨 장난 아님. 신랄한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나뿐인가?
- 킴, 부드럽게 말하고 있는데 장난 아니게 무서워.
- 그래도 부럽네. 따지고 보면 저거 극찬인 거잖아. 낸시, 평생토록 오늘 일을 잊지 못할 거 같다.
- 앞으로 시즌 내내 즐거울 듯. 캘리도 그렇고……. 아메리칸 갓 탤런트 심사위원 라인업 역대 최강인듯요.
농담이 아니라 시청률이 초단위로 급상승. 낸시가 나오고 내가 가차 없이 ‘엉망’이라고 말했을 때 이제껏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찍었대나 어쨌다나.
기사들도 난리였고, 실검 1위에도 올랐다.
그러는 동안 난 이미 유럽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때마침 미국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곧바로 콘서트를 이어간 건 아니었다.
뭐, CDM 측과 회사에선 무대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LA에서 콘서트가 열리는 건 일주일 뒤. 그동안 난 잠시지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혼자서 괜찮겠냐?”
“공식적인 일정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시는 아저씨께 싱긋 웃어보였다.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네요.”
“마루라도 따라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저씨께서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회사에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월드 투어도 월드 투어지만, 김도준 앱을 통해 발표되는 신곡들이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앨범으로 재구성돼 발매되고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비아가 찍은 사진들을 비롯해 각종 굿즈의 확충과 판매도 중요하다면 중요한 일. 게다가 유투븐과 각종 사이트 그리고 SNS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마케팅도 중요했고. 덕분에 회사 직원들을 꽤 많이 뽑았음에도 비는 손은 없었다.
음원만으로 수익을 창출하던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시스템에서 어느 것 하나 허술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씨크릿걸즈를 비롯해 회사 소속 아티스트들이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에이. 금방 갔다가 금방 올 건데 뭐 하러 그래요.”
“하는 수 없지. 항상 조심하고.”
“걱정 마시라니까요. 제가 앤가요?”
***
새벽4시.
세상이 어둠에 빠져있는 시간. 이른 시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조차 쉽사리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시각이 바로 이 시간이다.
굳이 이 시간을 택해 입국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덕분에 기자들은커녕 인적조차 드물다.
게다가 아직 잠이 깨지 않은 건 공항뿐만이 아니었다.
택시를 탔지만, 알아보지 못한다.
뭐,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탓도 있지만.
“W호텔 부탁합니다.”
텅 비다시피 한 도로를 빠르게 달린 차는 한시간만에 구의동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키를 받아 미리 예약해 놓은 객실 들어간 후, 대충 씻고 나왔다.
그러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을 굽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한강이었지만, 주변 풍경은 많이도 바뀌었다.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릴 적에 외할아버지와 함께 곧잘 이곳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기도 했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며 커피한잔과 함께 거진 한 시간을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벨이 울린다.
상념에서 벗어나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침 7시다.
벌써 약속시간이 된 것이다.
문을 열자, 예상했던 얼굴이 보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삼촌.”
작은 외삼촌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일찍 뵙자고 한건 아닌지…….”
“밀회라면 밀회인데 어쩔 수 없지. 오히려 이편이 나도 좋다. 지금으로선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아직까지 회장 자리는 공석. 주총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룹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어 있을 거란 걸 짐작 못할 바가 아니다.
이른바 줄서기가 시작된 거겠지.
큰 외삼촌이나 작은 외삼촌. 둘 중 한명이 회장이 될 거란 건 분명한데, 워낙 박빙이라 어느 쪽에 줄을 대야할지 쉽게 가늠이 안 되는 걸 테다.
순리적으로 생각하자면 큰 외삼촌이 외할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정상적인 흐름이겠지만, 큰 외삼촌 입장에선 안타깝게도 외할아버지께서 살아생전 작은 외삼촌한테도 꽤 많은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가진 지분은 엄청난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고.
작은 외삼촌이 동이 뜨기 무섭게 날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튼…….
“고맙다. 네가 날 지지해…….”
난 손을 들어 작은 외삼촌의 말을 막았다.
의아해하시는 외삼촌.
그런 외삼촌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다시금 벨이 울렸다.
작은 외삼촌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객실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 큰 외삼촌이 서 계셨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또 보는구나. 그동안 잘 지냈…….”
웃음 띤 얼굴로 안부를 묻던 큰 외삼촌의 표정이 무너진 것도 그때였다.
내 뒤쪽으로 보이는 객실 안. 소파에 낭패한 얼굴로 앉아있는 작은 외삼촌을 발견한 탓일 게다.
“누가 볼까 두렵네요. 뭐, 저야 상관없지만. 안 들어 오실건가요?”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던 큰 외삼촌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돌아가시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내가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백방으로 알아봐서 알고 있을 테니까.
잠시 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분이 마주 앉았을 때 내가 말했다.
“이제 다 모였으니, 얘기해보도록 하죠.”
내 입에 흘러나오는 음성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D그룹의 미래에 대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