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17화 (217/260)

# 217

#217. 싱어입니다만(4)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잘난 척이나 하려고 즉흥적인 연주를 한 건 아니다.

완성도?

그런 건 애당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 따윈 없었고, 그저 티아라가 오프닝으로 연주를 부탁했을 때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에서 부른 노래였다.

뭐, ‘LONGING TIMES’처럼 허밍으로 이루어진 노래라 누군가가 따라부를 만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아!”

탄성을 흘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티아라. 그녀는 날 한참 동안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당신…….”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마는 티아라였다.

진짜 쑥스럽다.

그러면서도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 탓인지, 감정이 쉬이 정리되지 않아 가슴 한편이 쿡쿡 쑤시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의아해졌다.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빛.

그건 뭘까?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나타나는 새하얀 시공간. 음의 시공간에 얼마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노란빛. 따스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의 이 빛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다른 때는 안 그런데 어째서 외할아버지와 관련되는 경우에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지?

정말 외할아버지의 마음인 걸까?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손자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져 내 노래 속에 자리를 잡은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진짜 생각지도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무대였어요, 킴! 앞으로도 종종 들려주세요. 방송에서 힘들다면 사적으로도 괜찮아요. 킴의 노래를 들을 수만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갈 테니까요!”

“설마 날 빼놓는 건 아닐 테죠?”

사이먼이 꼽사리 끼듯 끼어들자, 티아라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글쎄요. 가능하다면 전 독점하고 싶은데요? 원래 좋은 건 나누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김도준이었습니다!”

뒤늦게 박수소리가 터졌다.

“광고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티아라의 멘트를 뒤로 한 채 관객들에게 고개를 숙여 간단히 감사를 표하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곡에 제목도 안 붙였네.

하긴, 이제 막 만든 노래인데 제목이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픽하고 웃음이 났다.

어울리는 제목이라곤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외할아버지……라고 하면 이상하려나?”

작게 중얼거렸지만, 캘리가 들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만 움직여 카메라에 잡히지 않게 묻는 그녀였다.

“웨하라브지?”

옅게 미소 짓자, 그녀는 싱긋 웃고는 다시 물었다.

“그거……. 지금 부른 노래 제목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되뇐다.

노래 제목을.

그러곤 물어왔다.

“나중에 다시 들려줄 수 있어?”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그녀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속닥이는 사이, 광고가 끝났다. 아니 광고가 들어갈 타이밍에 스탭들이 부지런히 움직여 오늘 첫 출연할 오디션 참가자들을 준비시켰다.

오디션이 시작된 것이다.

***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실비아가 도준의 노래를 듣고 나서, 아니 연주하며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고 나서 한 말이었다.

“벌써부터 놀라면 어떡해?”

조마루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실비아를 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그녀의 시선은 시종일관 도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상태로 조마루가 얘기했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것도 보게 될 거야. 도준인 그런 아이……. 아니 이젠 청년인가? 아무튼, 각오하는 게 좋아. 심장이 무사하려면.”

“그, 그 정도에요?”

회사 직원으로서의 특권으로 비록 무대 뒤에서라지만 그동안 콘서트를 봐왔던 실비아였지만,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그간 겪은 것만으로도 놀라 자빠질 정도인데, 이보다 더 놀라게 될 거라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였다.

조마루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실비아. 너 원래 시나리오 작가였지?”

“예.”

“난 뭐였을 거 같아?”

“……작사가였다고 알고 있어요.”

“흐응. 도준이 골수팬이라서 그런가 제법이네. 근데 이건 아나 몰라? 요즘 나 도준이 곡들 중 반의반도 손 못 대. 웬 줄 알아?”

“왜요?”

진짜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며 묻는 실비아에게 조마루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겁나서.”

“……?”

“뭘 그렇게 봐? 겁나서라니까.”

실비아의 얼굴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힐긋 보곤 조마루가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도준이가 만든 곡을 망칠까 봐. 저 아이가 노래에 담아 놓은 감정을 해칠까 봐. 혹여라도 내가 손을 대서 두고두고 회자될 명곡을 형편없는 쓰레기로 만들어버릴까 봐. 그게……. 너무너무 겁나는 거야.”

한차례 자신을 본 후론 또다시 스튜디오에 있는 도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조마루를 실비아는 한참이나 말없이 쳐다만 보았다.

**

첫 출연자는 스무 살은 족히 됐을 거 같은 금발머리의 여자였다.

한데, 내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헐! 어딜 봐서 저게 열여섯이냐고!

키나 발육상태는 둘째치고, 얼굴 자체가 이미 완성형 아냐?

저 얼굴이 열여섯 살이라고 하면, 한국에 와서 술집에 가도 무조건 통과겠는데? 미성년자라곤 누구도 생각 못할 거다.

“낸시. 자기소개는 잘 들었어요. 그럼 이제 아까부터 그렇게 자신하던 노래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준비되면 얘기하세요. 저흰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티아라의 매끄러운 진행에 낸시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여성…. 아니 그렇게 말하기에도 너무 어린 틴에이저는 떨리는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미리 약속된 대로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0초 남짓한 전주가 흐른 뒤, 곧바로 노래를 부르는 낸시.

“Share my life, take me for what I am.”

시트니 휴스톤의 이었다.

그녀가 살아생전 직접 출연해 찍었던 영화 ‘그는 경호원’의 OST이기도 한 노래로 R&B 발라드의 정수를 보여주는 멜로디에 시작부터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와 함께 후렴에선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주는 곡이기도 하다.

또한, 듣기는 좋아도 부르긴 엄청나게 어려운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영화의 흥행은 말할 것도 없었고, 당시 OST 앨범만 무려 4천5백만 장이 팔려나갔으니 긴말이 필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는 경호원’의 주제가로 기억하는 노래, 와 함께 각종 차트를 휩쓴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아무튼, 낸시의 노래실력은 출중했다.

- Share my life, take me for what I am.

'Cause I'll never change all my colours for you.

Take my love, I'll never ask for too much.

Just all that you are and everything that you do.

내 인생을 나눠서, 나를 데려가 줘요.

‘왜냐면 난’ 결코 당신을 위해 나의 색깔을 바꾸진 않을 거니까요.

내 사랑을 가져가요, 난 결코 많은 걸 요구하지 않을 거에요.

그저 당신의 모든 것과 당신이 하는 전부를 바랄 뿐.

낸시는 노래 시작 전 자신했던 것만큼이나 잘 부르고 있었다.

R&B 특유의 맛도 잘 살리고 있었고, 음색도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고음을 잘 소화했다.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면서 느껴진 음의 시공간, 즉 새하얀 음표들로 이루어진 시공간 역시 확실히 보이고 있었고.

- I have nothing, nothing, nothing.

If I don't have you, you, you, you, you.

난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만약 내가 당신을 갖지 않는다면, 당신, 당신, 당신, 당신.

마침내 낸시의 노래가 끝났을 때였다.

스튜디오가 떠나가라고 터져 나온 환호성.

그리고 엄청난 갈채.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티아라를 포함해 사이몬을 비롯한 심사위원 모두가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만큼 잘 불렀다는 얘기다.

솔직히 저 나이 때에는……. 아니 나이를 떠나서 어지간해선 저 정도까지 부를 수가 없다.

이미 스탭들은 참가자들의 실력을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일부러 그녀를 첫 타자로 내세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낸시는 뛰어났다.

그건 그렇고.

뭐? 어쩌라고?

왜 다들 나만 바라보는 건데?

쯧, 알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포문을 열어라?

참네, 이것도 일종의 신고식인가?

잠시 망설이고 있자, 티아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와우! 실력이 대단하네요! 사이몬? 그렇죠?”

덕분에 자연스레 사이몬 쪽으로 관심이 넘어갔다.

“확실히 티아라의 말대로군요. 이번 시즌은 시작부터 좋은데요? 진짜 엄청난 노래 실력입니다. 낸시? 혹시 따로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나요?”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칭찬 일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객석 여기저기에서도 원더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엄지를 치켜들며 낸시를 추켜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묻고 대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는 동안 낸시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져 있었고.

꼭 우승자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주로 사이몬과 멜리나가 묻고 있었고, 캘리는 그저 지켜보는 중. 그러다가 결국 내 차례가 되고 말았다.

“음……. 낸시양, 앞서 두 분께 칭찬 많이 들으셨으니까, 전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왠지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듯한데?

두 사람의 연이은 칭찬에 한껏 상기되어 있던 낸시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진 것도 같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과감히 얘기했다.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어조로.

“엉망이네요.”

어어…?

그, 그렇다고 울 것까진 없잖아!

게다가 객석은 또 이렇게 웅성거리는 거야?

“와우! 킴!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갱스터처럼 말하다니. 도대체 오늘 하루 동안 절 얼마나 놀라게 만들 작정이죠?”

티아라가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한 분위기를 다시 띄우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극적인 효과를 노리며 내가 뛰어놀 판을 깔아주려는 건지 나름의 멘트를 치고 있었다.

어쨌든 난 하고자 했던 말들을 이어갔다.

“호흡이나 발성은 둘째치고요. 대체 왜 이 노래를 부르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악평 일색.

아무래도 이 방송이 나가고 나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지 않을까?

악마적인 심사였다고.

뭐, 그런다고 신경 쓸 나도 아니지만.

적어도 노래에 관해서 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충분히 에둘러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랑노래잖아요. 그런데 왜 저는 듣는 내내 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거죠? 대신 기교만 잔뜩 있는……. 뭐랄까, 꼭 쓸데없이 보석으로 잔뜩 치장된 걸 보는 느낌이었어요.”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해진 낸시가 안쓰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면, 그녀는 확실히 뛰어난 실력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보였으니까.

노래에 감정만 제대로 실을 수 있다면.

“낸시. 당신은 보석이에요. 그래요. 타고났다고도 하죠. 맞아요. 저랑은 달리 당신은 싱어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재능들을 잔뜩 가지고 태어난 거 같아요. 그런데 왜 그런 재능들을 가졌으면서 욕심이 그렇게 많은 거죠? 어째서 부풀리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그래요. 그냥……. 멜로디가 가진 힘을, 가사가 품고 있는 진심을, 당신이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노래에 담기만 하면 되는데…….”

내 얘기가 뜻밖이었던 걸까?

낸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크게 뜨곤 날 바라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칭찬을 하자는 건지, 아니면 욕을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의 목소리로 부르면 좋겠어요. 그럼 빛을 내기 시작할 거에요. 당신이 품고 있는 그 보석이.”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뭐야?

이건 또 무슨 반응이람?

갑자기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낸시는 낸시대로 코를 훌쩍이며 웃고 있었고.

뭐냐고, 이거?

나 지금 따끔하게 충고한 건데?

오히려 놀라서 눈알을 굴리고 있을 때, 캘리가 날 보며 배시시 웃고 있는 게 보인다.

나 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심사는 두 시간에 걸쳐서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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