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215. 싱어입니다만(2)
얘기는 들었다.
사이몬이 내 광팬이라는.
그렇다곤 해도…….
“오오! 킴! 정말 감동입니다!”
느끼해 보이는 백인 중년 남성이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덤벼드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난 엉겁결에 그가 내미는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악수를 하면서 어찌나 꽉 잡는지.
뭔 힘을 이렇게 주는 거냐고.
어떻게든 사이몬의 솥뚜껑 같은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였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티아라 뱅크슨이 우아하게 걸어와 날 덥석 안는다.
응?
안아?
와! 무슨…….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내 볼에 살짝 키스를 하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악!”
뭐, 뭐야! 갑자기 왜?
안 그래도 지금 상황을 뇌가 제대로 처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비명이라니!
혹시라도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당황하고 있는데, 티아라 뱅크슨이 꺅꺅거리며 소리쳤다.
“봤어요? 킴이 부끄러워하는 모습? 꺄아아아악! 너무 귀여워!”
미치겠네.
마흔 살도 넘었지, 아마? 저 여자?
하아, 나이만 놓고 보면 엄마 혹은 이모뻘이긴 하지만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귀엽다고 하다니.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근데, 더 황당한 건 사이몬이 그런 그녀를 부럽다는 듯 쳐다본다는 거였다.
그러다가 날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덤이었고.
“이럴 게 아니라 사진! 사진 찍어요, 우리!”
티아라 뱅크슨이 덥석 팔짱을 낀 것도 그때였다.
웃긴 건 사이몬이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거였고.
“와우! 사이몬! 지금 바로 나한테 전송해줘요. SNS에서 올릴 거니까!”
티아라 뱅크슨이 여전히 내 팔을 잡은 채로 신나서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며 벙찐 표정이 되고 말았다.
뭐야?
사이몬만 팬인 게 아니었나?
그때, 브라이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
한차례 손뼉을 치더니, 진화에 나선 것이다.
“자, 다들 팬심은 잠시 넣어두시고요. 이제부턴 비즈니스를 좀 해봅시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 한가지는 합의했다.
심사위원을 맡기로 한 것이다.
다만…….
“미리 말씀드리지만, 두 분이 저한테 원하시는 게 어떤 건지는 몰라도 한가지는 확실히 해둘게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부담을 팍팍 주고 있는 두 사람, 티아라와 사이몬에게 단단히 말해두었다.
“전 다른 건 할 줄 몰라요. 곡을 만들고 연주하고 부르는 것. 그 외엔 젬병이라고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오 마이갓!”
응? 이 반응은 또 뭐야?
미국인 특유의 오버스러운 티아라의 반응에 이어 사이몬이 지져스를 외치고 있는 모습에 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괜히 한다고 했나?
잠깐 같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앞으로 이들이랑 함께 녹화를 한다고 생각하니까 뒤늦은 후회가 밀려든다.
한데, 뒤이은 티아라의 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킴! 당신,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군요.”
가치?
지금 나에 대해서 나보다 더 그녀가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오프라 얘기대로네.”
양념 같은 사이몬의 추임새는 무시하기로 하고.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의아해하자, 티아라가 한숨을 폭 내쉰다.
이봐요, 아줌마.
한숨은 내가 쉬고 싶…….
“잘 들어요. 킴.”
“…….”
“지금 당신은 아이콘이에요, 아이콘!”
아이콘?
설마 김도준 앱의 그 아이콘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티아라가 싱긋 웃어 보였다.
“진짜 모르나 보네.”
사이몬과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듯 눈짓을 주고받더니,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화면을 켜 인터넷에 접속하더니 몇 장의 사진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뭐지?
봐도 모르겠다.
백인에서부터 흑인까지. 동양인들과 아랍 쪽 사람들로 보이는 청년들까지. 아니, 여자들도 보였다.
그뿐이었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어디서나 볼법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대답 대신 눈을 껌뻑이자, 티아라가 픽하고 웃는다.
“패션.”
“……?”
“여기 이 사람들이 걸치고 있는 옷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요?”
음, 그러고 보니…….
“혹시?”
“그래요. 킴의 패션을 따라 한 거에요. 단순히 옷뿐이 아니에요. 헤어 스타일도 비슷하죠? 맞아요. 지금 온 세상의 젊은이들이 당신을 따라 하고 있어요. 이게 뭘 뜻하는지 알아요?”
“…….”
“당신은 한낱 싱어가 아니라고요. 당신은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란 말이에요! 누구나가 닮고 싶어하고, 또 따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그게 바로 킴! 당신이라고요!”
헐, 뭐 이런…….
나도 모르게 살짝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지 못하고 티아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왜냐하면…….
“티아라.”
“……?”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요.”
딱히 그녀가 말한 바를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워너비가 되는 걸 단순히 광대놀음쯤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가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닌 거다.
“누가 뭐래도, 전 싱어예요.”
난 티아라는 말할 것도 없고, 사이몬을 비롯해 브라이언 그리고 회사 식구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그건 오직 싱어로서일 뿐이에요. 만일 그 외에 다른 걸 제게 원한다면…….”
그새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 아니 브라이언까지 더해서 세 사람에게 확실히 못 박았다.
“방송에 출연하기는 어렵겠네요.”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객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바닥에 카페트가 깔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귀청에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고요했다.
그 정적을 티아라의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깨뜨린 건 1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뭐지 싶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웃음을 그친 그녀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다시 한번 날 꽉 껴안았다.
동시에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 너무 매력적인 거 아냐?”
흠칫.
살짝 몸을 떨고 말았을 때, 그녀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매우 은근한 어조로.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절대로 당신을 그냥 두지 않았을 거에요.”
“큭큭큭. 티아라, 지난번에 잔뜩 취해서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라고 했던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사이몬!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고요! 제가 만일 킴과 염문이라도 나봐요. 그땐 진짜 난리도 아닐 걸요? 어쩌면 저, 길다가 총 맞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냥 전 킴의 팬으로 만족할게요. 아니, 사이좋은 동료? 아니면 나이를 떠나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 그래요. 딱 그 정도 포지션이 좋겠어요. 흐응, 킴, 그 정도는 괜찮겠죠?”
“오! 그거 좋네. 친구라……. 킴, 앞으로 잘 부탁해요!”
***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티아라와 사이몬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돌아가고 난 후였다.
“자, 여기.”
브라이언이 건네준 스케줄 표를 보곤 정말이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뭐랄까, 이건…….
그래.
꼭 내가 빨랫감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아주 꽉꽉 쥐어짠 스케줄.
단 하루도 비어 있는 날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콘서트와 방송 녹화일 간의 간격은 충분했지만, 문제는 이동 시간. 주도면밀하게 계획되고 빈틈없이 짜인 스케줄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심지어는 건강관리를 위한 트레이닝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당신은 소중하니까요.”
예, 예. 저에게도 저는 소중합니다.
농담처럼 말하는 브라이언을 한차례 노려본 뒤, 아저씨께 물었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건 어떻게 됐어요?”
“지난번?”
“왜 있잖아요. 씨크릿걸즈랑 리노, 강나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저씨의 입꼬리가 광대뼈까지 쭈욱 올라간다.
그러곤 예의 그 악마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리노하고 강나리는 지금 뉴욕에서 트레이닝 중이고, 씨크릿걸즈는 며칠 전 우리랑 계약했지.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남았나?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저씨께서 턱을 쓰윽 훑으며 얘기했다.
“준영이도 합류했지. 뭐, 씨크릿걸즈랑 유닛하게 해달라는 이상한 요구가 있긴 했지만.”
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아니, 그전에 준영 형한테서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아! 이건 비밀로 해달라고 했었는데. 나중에 너 깜짝 놀래켜 준다고.”
피식.
노골적으로 의도하신 거네.
오히려 모른 척하다가 나중에 한방 먹이라 이거지.
나 역시 웃어 보이곤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니, 못 들은 척했다.
그러곤 다른 걸 물었다.
“그럼 매니저랑 차량이 더 필요하겠네요?”
“그건 마루가 알아서 할 거다.”
내가 마루 누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누나는 하얀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손을 들어 브이 자를 해 보이며.
그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뭐랄까.
이제까지 아저씨와 고 팀장님 그리고 누나, 이렇게 세 사람이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번 기회에 싹 다 털어버리겠다는 그런 웃음이었다.
***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자, 티아라 뱅크슨이 무대로 걸어나왔고 이내 방청석에서는 엄청난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벌써 14시즌을 맞았는데도 이런 환대라니. 이젠 좀 지겨울 만도 한데 말이죠. 저 아직 쓸만한 건가요?”
그녀의 농담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이런저런 수식어는 집어치우죠. 미국의 재능 넘치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꿈을 꾸고 있다면 언제든 도전하고, 그 꿈을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세요! 아메리칸 갓 탤런트! 지금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지자, 티아라는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함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럼 심사위원들부터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이 들려오는 가운데, 그녀가 호명하기 시작했다.
“저번 시즌을 끝으로 그만두겠다며 그렇게 제 속을 썩이더니, 올해도 나와주셨습니다. 사이몬 코렐!”
박수가 터지며 엄청난 환호가 터졌다.
뒤이어 티아라의 입에서 멜리나 J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리고…….
“놀라지들 마세요, 여러분! 요즘 전 세계를 뒤흔드는 분이시죠. 캘리 제니퍼! 나와주세요!”
캘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석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티아라는 내색하지 않은 채 속으로 되뇌었다.
‘자, 이제 다들 놀랄 준비들 되셨나요?’
그녀는 심사위원석 중에서 남아 있는 한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면서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이건 생각지도 못했을 거라는 듯이.
“캘리, 하나만 묻죠.”
“예.”
“당신과 나 그리고 사이몬. 이렇게 세 사람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지 아시겠어요?”
“음, 글쎄요. 외계인이 아니라는 거?”
장난스러운 캘리의 대꾸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티아라 역시 가볍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고개를 내젓더니 말했다.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의 공통점이죠. 그래서, 모실까 합니다. 어쩌면 이분이야말로 진짜 외계인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사람을 설명하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저랑 사이몬을 한순간에 사로잡은 분입니다. 아, 캘리도 마찬가지인 걸로 알고 있고요.”
과격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과장된 손짓으로 무대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키는 티아라. 그녀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티아라와 사이몬, 그리고 방송 관계자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그날, 아메리칸 갓 탤런트 14시즌의 첫 방송은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