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 싱어입니다만(1)
출국하기 전, 다들 회사에 모였다.
그럼에도 일정 조정은 없었다.
사정이 어떻게 돌아갈지 몰라서 공연 한두 군데 정도는 펑크를 낼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일정을 여유롭게 짜놔서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온전히 브라이언의 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초 CDM측에선 스케줄 자체를 타이트하게 잡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었다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반대한 게 그였다고 한다.
이유는 별거 아니다.
내가 한 번도 월드 투어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
거의 반년 가까이 걸리는 월드 투어인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줄 알고 함부로 계획을 짜겠냐는 논리였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그 점에 대해선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나름의 배려일 터였다.
회의 내내 오로지 일에 대한 얘기만 오갈 뿐이었다.
“그럼, 문제없는 거지?”
“오브 코스!”
미국에서 직접 날아온 브라이언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데, 별다른 말이 없다.
그저 믿음직한 파트너를 바라보는, 아니 너만 믿는다는 눈빛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피하진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일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편이 다른 생각이 안 나고 좋았으니까.
더불어 외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도 있었고.
“노래…. 불러라. 네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날 바라보시던 외할아버지의 따스했던 눈빛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곤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곤 스케줄 표를 바라보았다.
파리, 베를린, 암스테르담에서의 유럽 공연을 끝으로 미국으로 날아가 다시 LA부터 시작해 오클랜드, 포트워스, 시카고, 뉴욕을 거쳐 캐나다 해밀턴으로 넘어간다.
그 후 중국과 일본에서의 공연과 동남아시아, 러시아 그리고 중동 쪽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한국으로 와 월드 투어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같은 초짜가 감당할만한 일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월드 투어를 떠날 때만 해도 반쯤은 농담처럼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리기도 했었고.
물론 그때마다 다들 ‘너라면 할 수 있다는’ 상투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심 가득한 말들로 날 다독거리긴 했지만.
한데, 지금은 외려 내 쪽에서 말하고 싶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월드 투어를 제대로 끝내고 싶었다.
어떠한 난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 알고 있겠지만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서 계속 연락이 오는데, 이것도 얼른 결정을 내려줘야 할 거 같아.”
브라이언이 조심스럽게 물어오고 있었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워낙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그쪽의 제안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제가 심사위원이 된다는 것도 부담되긴 하지만, 일정상으로도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
“흐흐흐. 그럴 줄 알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아메리칸 갓 탤런트 녹화 일정과 월드 투어 일정이 겹치지 않게 스케줄을 짜놨다는 거 아니냐. 뭐, 대신 그렇게 되면 스케줄이 엄청나게 타이트해지겠지만.”
브라이언이 B급 영화의 사기꾼 2나 보일 법한 찌질한 악당 웃음을 서슴없이 날리는 걸 보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하여간, 생긴 거랑은 달리 빈틈이 없다니까.
후우, 하긴 같이 일하는 사람이 프로페셔널하면 그것만큼 믿음직스러운 게 없긴 하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생각해볼게요.”
“오케이. 그렇게 하지.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사이몬도 그렇고 티아라 뱅크슨이 시도때도없이 전화하고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회의를 마쳤다.
이제 파리로 날아가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
방에서 챙길 것도 얼마 없는 짐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뉴욕에 있을 때의 버릇처럼 영어로 대답하려다가 피식 쓴웃음을 짓고는 직접 걸어가 문을 열었다.
형이다.
“짐 싸고 있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캐리어가 너무 작은 거 아냐?”
“뉴욕에서 보내놓은 게 있어서 그냥 몇 가지만 챙기면 돼.”
“그럼, 사람보다 짐이 먼저 간 셈인가?”
형은 별것도 아닌 걸로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날 신경 쓰는 걸 테지.
난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러곤 다시금 싸던 짐을 챙겼다.
그때 들려왔다.
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무슨 일 있으면…….”
머뭇거리더니 말하고 있었다.
“언제든 전화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생각하다가 나직하게 얘기했다.
“그럴게.”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지고 있던 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얘기했다.
품에서 지갑을 꺼내면서.
“너, 아직 우리 딸 사진 못 봤지?”
형이 내미는 초음파 사진 한 장.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검은 바탕에 도드라진 흰색을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살짝 떨린다.
조카라…….
살짝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예쁘네.”
진심이었다.
윤곽도 또렷하지 않았고, 형체도 흐릿하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사진 속의 아기가 예쁘게만 느껴졌다.
“그치? 네 눈에도 예쁘게 보이지? 하아, 진짜 미치겠다니까. 요즘 얘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아무것도 못하겠다니까!”
날 생각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형은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둘 다지 싶다.
심술이 났던 걸까.
“팔불출.”
형의 이마에 혈관이 돋는 것처럼 보인 건 그저 착각만은 아니었을 거다.
“얀마! 너도 결혼해서 애 가져봐! 넌 안 그럴 거 같아?”
대답할 가치가 1도 없는 물음이었다.
“형수님은 괜찮아?”
“뭐, 운동도 열심히 했고……. 병원에선 괜찮다고 하니까……. 괜찮은 거겠지?”
오히려 내게 되묻는 형이었다.
살짝 어두운 얼굴. 산달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래저래 집안에 큰일을 치르다 보니 형수님 건강이 조금 안 좋아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병원에 가 있었다.
오늘 형만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음 달엔 꼭 들어올게.”
“그래. 꼭 와라.”
“형수님 잘 챙기고.”
형은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린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함께 거실로 나왔다.
“아들, 어떡하니? 하필 오늘 약속이 잡혀서…….”
어머닌 안타깝다는 얼굴로 날 보고 계셨다.
“바쁘면 좋죠, 뭘. 저야 고 팀장님이 태우러 오실 거고.”
“항상 조심하고.”
아버지의 당부에 난 그저 옅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요즘 정계 쪽에서 압박이 심하다던데, 문제 생기면 말씀하세요. 정 안되면…….”
“우린 걱정 말고, 아들 건강이나 좀 챙겨. 아유, 속상해. 애 얼굴이 이게 뭐야? 며칠 새 반쪽이 됐네.”
어머니께서 내 볼을 쓰다듬으며 우는 얼굴을 해 보이는 걸 보다가 말씀드렸다.
“잘 먹을게요. 운동도 하고. 그럼 됐죠?”
그렇게 말하곤 어머니 뒤에 서 있던 희주와 함께 집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진짜 이렇게 얘기하니까, 꼭 멀리 가는 거 같네.
아니, 멀리 가는 건 맞나?
“공연 잘하고!”
“예. 자주 연락할게요.”
희주와 함께 현관문을 나서자 부모님과 형이 따라나오려고 하기에 간신히 만류하고야 집을 떠날 수 있었다.
***
“나랑 약속 하나 해.”
공항에 도착한 후, 탑승 직전에 희주가 난데없이 한 말이었다.
“약속?”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얘기했다.
“얘기 들었어. 뉴욕에 있을 때 쓰러졌었다며?”
쯧. 또 누가 얘기한 건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녀가 심각하다면 심각한 얼굴로 말해왔다.
“스트레스성이라고 하던데……. 힘들면…….”
뒤의 얘기는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혹시라도 내 자존심을 건드릴까 싶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 대신 말했다.
“응. 얘기할게.”
그제야 안심했다는 얼굴이 되는 희주였다.
다들 왜 이렇게까지 날 신경 쓰는 건지.
그렇게 걱정이 되는 걸까?
진짜 괜찮은데…….
웃어 보였다.
“희주야.”
“……?”
“고맙다.”
볼을 붉히는 그녀를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외할아버지 장례식장에 와준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걸.
파리에 도착하면……. 아니, 탑승하기 전에라도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영이 형도 그렇고, 이성원 형님도. 곽미영 기자도 왔었지 아마?
아, 송 감독님한테도 전화해야겠구나.
방송국 사람들에게도 해야 하나?
그래야겠지.
“이만 갈게.”
“응. 조심해서 다녀와.”
출국장 앞까지 따라와 손을 흔드는 희주를 뒤로 하고 돌아섰다.
그러곤 기다리고 있던 회사 식구들과 함께 탑승장으로 향했다.
***
정신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테러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브라이언을 비롯해 CDM 측에서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프랑스에서의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뿐만 아니라 곧바로 독일로 넘어갔고, 지금 막 콘서트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IS는 예고한 대로 시리아 곳곳에서 테러를 벌이는 중이었고, 이에 러시아와 터키 측은 대거 군부대를 투입해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 탓에 지금 시라아는 벵가지부터 시작해 나라 곳곳이 전쟁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러는 동안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미국의 강력한 주장하에 평화유지군 파견을 결의한 상태였다.
이를 두고 걸프전 때처럼 또다시 중동에 피바람이 부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작은 러시아와 터키가 시리아에 비무장 지대를 두기로 합의했던 건데, 어느새 사안은 IS 토벌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테러 위협이 사라져서 다행이긴 한데, 마음이 편치는 않네.”
마루 누나의 얘기대로다.
정의가 어느 쪽에 있든 간에 전쟁은 전쟁. 총탄과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희생이 잇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미국 측으로선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거지.”
운전대를 잡고 계시던 고 팀장님의 촌평에 마루 누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깊이 들여다보면 이권 다툼이란 얘기잖아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지.”
“진짜 너무들 하네.”
혀를 차면서 고개를 내젓는 누나를 보다가 나 역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때였다.
아저씨께서 전화를 받은 것은.
“아, 브라이언. 아 그래? 흐음……. 일단 얘기는 해보도록 할게.”
브라이언한테 온 전화인 듯했다.
“무슨 일이에요?”
전화를 끊은 아저씨한테 마루 누나가 물었다.
한데 아저씬 누나한테 대답하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도준아.”
“예?”
“사이몬이 왔다는데?”
사이몬?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기다리다 못해서 직접 온 모양이다.
어쩐다?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께서 덧붙이셨다.
“근데,”
“……?”
“티아라 뱅크슨도 같이 왔다고 하네.”
어안이 벙벙해서 아저씰 쳐다보았다.
그때, 누나가 내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얘기했다.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네. 도준아, 아무래도 해야겠다, 너.”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누나가 마저 말했다.
“심사위원.”
난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죠.”
어? 하는 얼굴들이 된 회사 식구들.
심지어 실비아마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당연히 내가 거절할 거라고들 생각했던 모양인데.
솔직히 지금 같아선 조금이라도 더 일에 열중하고 싶었다.
아메리칸 갓 탤런트의 심사위원이라…….
까짓 못할 건 또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