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211. 나는 손자다(1)
“할애비가 손주 녀석 얼굴 좀 보겠다고 왔는데.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거냐? 뭘 그리 놀라느냐?”
저리 말씀하시니, 뭐라 말씀드려야 하나?
“그런 건 아니…….”
에잇. 갑자기 찾아오셔선…….
어?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왜 휠체어를 타고 계세요?”
나도 모르게 얼굴이 어두워졌던 걸까?
외할아버진 혀를 차시며 말씀하셨다.
“쯧. 사내놈이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은.”
대답을 해주실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파고들면 못들을 것도 없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실장님이 눈짓을 보내며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 오실 거면 연락 좀 주시지. 그럼 마중 나갔을 거 아니에요!”
“뭐하러?”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씀하시는 외할아버지.
“바쁜 놈 괜히 오라 가라 하면 퍽이나 마음이 편하겠다.”
“에이, 그래도 그게 아니죠. 저 할아버지 손자라고요.”
“그놈의 손자 타령은. 이놈아. 나한테 손자가 너 하나뿐이더냐?”
“누가 그렇대요? 그냥 걱정되니까 그렇죠.”
툴툴거리고 있을 때였다.
외할아버진 날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손을 휘휘 내저으신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가봐라.”
“예?”
“콘서트 중이란 걸 잊은 거냐?”
“그렇긴 한데…….”
아이씨.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잠시 머뭇거리자, 외할아버지께서 역정을 내신다.
“어허! 얼른 가보래도 그러네!”
아니 뭘 또 그렇다고 화까지 내신데?
“아, 마음이 편하질 않으니까 그러죠! 그러지 마시고, 귀빈석으로 자리라도 옮기시던가요.”
“뭐하러?”
“제가 노래하는 것도 보고…….”
“일없다.”
말은 저리 하시는데, 뭐가 그리 좋으신지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한층 짙어지셨다.
그런 채로 말씀하셨다.
“중간 중간 이리로 오는 거 아니냐?”
“그건 그렇죠. 옷도 갈아입고 잠시 숨도 돌려야 하니까.”
“됐다. 그럼. 예 있으마.”
아이고, 우리 외할아버지 고집을 누가 꺾을까.
마음 같아선 당장 호텔로 모셨으면 싶지만…….
어디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시겠냐고.
고개를 내저으며 대신 당부드렸다.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꼭 얘기하셔야…….”
“이눔이! 내가 최중한이야! 최중한! 어디서 감히…….”
이크!
여기 더 있다가는 진짜 불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싶다.
얼른 자리를 피하며 이 실장님과 시선을 교환했다.
‘부탁드려요.’
‘걱정 말고 다녀와라.’
고개를 끄덕이곤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당장에라도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 삿대질이라도 할 것 같던 최 회장이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많이 큰 거 같지?”
이 실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그랬나?”
“그랬지요.”
가만히 도준이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던 최 회장이 불쑥 이 실장을 불렀다.
“이 실장.”
“예.”
“내가 얘기했던가?”
“…….”
“저놈이 다섯 살 때였지, 아마.”
아련한 눈빛을 해 보이며 최 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왜 있잖은가? 나이가 들면 말이야. 뭔 날이 되면 손주들 쭈욱 모아놓고 용돈 주는 재미가 쏠쏠하거든. 한데, 여기서 문제는 손주들 나이가 다 제각각이란 말이지. 우리 같은 옛날 사람들은 당연히 한 살이라도 많은 놈에게 돈을 더 주기 마련 아니겠나? 나 역시 그랬지. 큰놈한텐 2만원, 그보다 작은놈한텐 만원. 이런 식인 게지. 한데 말이야. 저놈이 가장 막내거든. 어쩌겠나? 늘 제일 적게 받아야 했지. 저놈은.”
피식.
다시 생각해도 웃긴지. 최 회장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얘기했다.
“그런데 한날은 말이야. 저놈이 제 손에 들린 5천원짜리 지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보란 듯이 바닥에 버리는 거야. 그러곤 팩 돌아서지 뭔가. 그날 지 애미한테 엄청 혼났더랬지.”
급기야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최 회장.
“그때부터였지. 저놈한테도, 큰놈한테도……. 똑같이 줬더랬어.”
“도준이라면 그러고도 남지요.”
“그래. 저눔이 그런 놈이야.”
기꺼운 눈빛이 되어 문을 바라보던 최 회장이 중얼거렸다.
“……나랑 판박이처럼 닮은 놈은 저놈 하나뿐이더란 말이야.”
***
솔직히 말하자면…….
이보다 더 즐거울 수 있을까 싶었다.
무대 위에 올라 팬들의 환호성 속에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렇게 한바탕 열정을 불태우고 나서 대기실로 돌아오면 외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도.
그저 옷 갈아입는 걸, 메이크업을 고치는 모습을 말없이 보시기만 하는 건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뭐랄까.
인정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봐요. 할아버지! 제가 이런 손자예요.
하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대기실에서도 들을 수 있는 함성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어째 외할아버지랑 함께 듣고 있으니 꼭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쯧쯧. 뭘 그리 실실 웃는 겐지. 이놈아! 그러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에이, 여기 파리가 어딨다고 그러세요?”
“움직이시면 안 돼요. 눈썹 삐뚤어진단 말이에요!”
“언니! 재킷은 이걸로 하면 돼요?”
“3분! 3분 남았다!”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는 스탭 사이에 앉아 계시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만 짓고 계시는 할아버지. 마치 공원에라도 나오신듯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좋아?”
마루 누나의 물음에 난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러게요.”
“참네. 남의 일 말하듯 하네.”
“제가 좀 그런 경향이 있죠.”
“시간 됐다. 얼른 나가!”
“예.”
씨익하고 웃어 보이곤 다시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또다시 터져 나오는 팬들의 함성 속으로 몸을 던졌다.
***
공연 내내 새하얀 시공간, 즉 음의 시공간은 전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기실로 돌아와 외할아버지와 있을 때조차도.
그래서 그런가, 나중에는 살짝 현기증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꼭 감기약을 두세 봉지쯤 입안 털어 넣고 나서 10분 정도 지났을 때의 느낌이랄까.
몽롱한 건 아니지만, 기분이 업되어 있는 건 분명했다.
감정이 한껏 고조된 상태.
아무튼, 그 상태로 열 곡이 훌쩍 넘는 노래를 불렀고, 세션들도 큰 실수 없이 연주를 해준 덕분에 오투 아레나에서의 첫 번째 콘서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몰려드는 팬들을 피해 첩보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은밀하고 빠르게 공연장을 떠난 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후였다.
“후우! 끝났네요.”
소파에 몸을 던지며 말하자, 마루 누나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어.”
“뭘요. 이제 시작인데요.”
“그래. 이제 시작이지.”
“아, 할아버지는요?”
“이 실장님이랬나? 우리 공연장 떠나기 전에 그분이 먼저 모시고 갔어. 아마 지금쯤 주무시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요?”
전화를 한번 해볼까 하다가 관뒀다.
그렇게 먼저 들어가시라고 해도, 공연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을 지키시던 외할아버지도 외할아버지만, 덩달아 고생했을 이 실장님도 쉬셔야 하니까.
그때였다.
부르르르.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이 실장님이 보내온 거였다.
- 지금 씻고 주무시니까, 걱정 말아라.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여간 세심하시다니까.
냉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정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 역시 샤워실로 향했다.
내일 당장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른 씻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저씨는요?”
샤워실로 가면서 마주친 고 팀장님께 묻자, 즉각 대답해주신다.
“브라이언하고 나갔다. 호텔 지하에 있는 바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연락해볼까?”
“아뇨. 그냥 어디 가셨나 해서 물은 거에요.”
아마 내가 쉬는데 방해가 될까 봐, 둘이 따로 나간 거 아닐까 생각되었다.
“얼른 씻고 쉬어. 배고프면 룸서비스 시키든가 하고.”
“괜찮아요.”
밥이고 뭐고, 진짜 피곤해 미치겠다.
고 팀장님께 손을 흔들어 보이곤 샤위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씻은 뒤 침대에 몸을 누이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잠이 쏟아졌다.
***
다음날이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실 줄 알았더니, 외할아버지는 계속해서 남아계셨다.
휠체어에 타고 계신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나로서는 나쁠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외할아버지시니까.
당신 말씀대로 업어 키우셨다는 손주가 바로 나다.
그만큼 날 아껴주신다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구멍가게 하나를 운영하는 일조차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그냥 회사도 아니고 나름 한국에서 재벌 소리를 듣는 그룹을 이끄시는 분이니 당연히 바쁠 수밖에.
때문에 지난번 뉴욕에 오셨을 때도 금방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오래 계실 모양이셨다.
“좋구나.”
템스 강을 따라 걸으며 휠체어를 밀고 있을 때, 외할아버지께선 기분 좋은 어투로 말씀하셨다.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진즉에 너랑 여행 한번 가는 건데 그랬다.”
“왜요. 어릴 때 곧잘 낚시 가시는데 데리고 가셨었잖아요.”
“그랬지. 딴 놈들은 얼굴 가득 지루해서 싫다는 티를 내는데 유독 너만은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오곤 했었지.”
“재밌잖아요.”
“뭐가? 낚시가?”
“아뇨. 할아버지랑 함께 낚시가는 거요.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수다 떠는 것도, 낚시하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해주시는 거 듣는 것도, 매운탕인지 라면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찌개를 끓여 먹는 것도요. 그래 봐야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했지만요.”
따지고 보면 열 번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기억이 생생하다.
마치 수도 없이 다닌 것처럼.
뭐, 그것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끝이 났지만.
그 이유는…….
“아직도 원망하느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도 이해를 못 했고,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알 거는 같다.
외할아버지 눈에는 우리 아버지가 한참 못 미쳤을 테지.
중역은 고사하고, 회사에 계시는 동안 내내 외삼촌들한테 치이고 사람들한테 괄시받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난 외할아버지의 손자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하니까.
“저 거짓말 못하는 거 아시면서요.”
딱히 앙금이 남은 건 아니라서, 담담하게 얘기하자 할아버진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바람을 맞으며 강변에 난 길을 걷고 있을 때, 불쑥 말씀하셨다.
“변명은 안 하마.”
“…….”
“그래도 김 서방한테 여러 번 기회를 준 건……. 그나마도 널 봐서였다.”
말없이 듣고만 있자 외할아버지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오히려 이제 와서 미안한 건 민준이구나. 녀석이 태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네 애비를 받아들인 탓인지 영 못마땅했다. 그 녀석이……. 하기야. 어디 그 녀석뿐이겠느냐? 손자 놈들 중에 마음에 드는 놈들이 있었던지. 반면에 넌 태어났을 때부터 이제껏 단 한 번도 이 할아버지를 실망 시킨 적이 없지.”
“왜요? 저 노래한다고 할 때는 길길이 뛰셨잖아요.”
“큼. 그 얘긴 또 왜 하고…. 인석아. 너도 나중에 애 낳아봐라. 어디 마음이 그런가.”
말씀 중에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시는 외할아버지셨다.
그러시더니 가만히 날 부르셨다.
“도준아.”
“예.”
“이 할애비 부탁 하나 들어주련?”
“부탁이요?”
되묻고 있을 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강변을 따라 핀 꽃잎들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