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 월드 클래스(3)
The O2 arena.
영국 런던 동남부 지역. 템스 강을 따라가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 강변 가까이에 위치한 다목적 실내 경기장 겸 공연장이 바로 오투 아레나다.
당초 밀레니엄 돔으로 쓰였던 곳을 개조해 위쪽의 돔 조형물은 그대로 놔둔 채 아래쪽에 공연장을 조성해놓았는데, 그 때문에 영국에선 아직도 그냥 돔 즉 ‘The Dom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크기만 해도 2만석 규모로 맨체스터에 있는 아레나 다음으로 영국에서 큰 경기장이고,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공연장으로 꼽히기도 한 이곳, 오투 아레나에선 오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입장도 하기 전부터 벌써 몇 시간째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 아무것도 바뀐 건 없어.
변하지 않는 건 세상이니까.
수만 명의 관중이 어둠 속에서 팬라이트를 흔들며 부르는 떼창이 공연장을 뒤흔든다.
희한한 건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한국말이라는 것.
그럴 수밖에.
도준이 김도준 앱을 통해 발표한 노래들은 하나같이 한국어였고, 그나마 영어로 된 제목이 몇 곡 있을 뿐, 가사만 놓고 보면 영어로 번역된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잘만 따라부르고 있었다.
어눌하게 느껴지는 발음이긴 해도.
- 내가 달라져야 해?
아니, 그렇지 않아.
지금 이 순간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가면 돼.
그럼 언젠가는 다다를 수 있어.
그게 내가 꿈꾸는 인생.
그러니까 바뀌지 마.
바꿔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세상.
김도준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하나가 되어 부르는, 그것도 반주 하나 없이 입을 모아 부르고 있는 노래, <바뀌지 마>. 현재 빌보드 차트 1위에 랭크된 채 2주간 내려오지 않고 있는 곡 였다.
그렇게 한바탕 떼창을 부른 뒤, 터진 함성.
연이어 여기저기서 김도준을 호명하는 외침이 들린다 싶더니 일제히 도준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들 직감한 것이다.
콘서트의 시작이 임박했다는 걸.
아니나 다를까.
김도준!
김도준!
김도준!
팬들이 팬라이트를 흔들며 목청을 돋워 미친 듯이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을 때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대로 조명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바지 차림에 헐렁한 박스티를 입은 채로.
엄청난 환호성 속에 무대 중앙으로 나아간 그가 손을 흔들자, 또다시 팬들의 함성이 터졌다.
잠시 후 함성이 가라앉자, 도준이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 반가워요. 여러분. 김도준입니다.
허리를 깊게 숙이는 그의 모습에 갈채가 쏟아졌다.
***
놀랍다.
다른 게 놀라운 게 아니라, 설마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조금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무대에 올라오기 무섭게 함성이 들려오는 순간, 눈앞에 생겨난 새하얀 빛의 향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음(音)의 시공간.
······이라고 내가 명명한 것. 정확히 말하면 시간도 공간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그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새로운 영역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기에 그렇게 부르는 중이었다.
아무튼, 예상치 못했다.
음악도 아니고, 지난번처럼 웃음소리도 아니었다.
그저…라고 말하기엔 팬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와 난감할 지경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짐작조차 못 한 것도 사실이었다.
설마하니 함성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거라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음악은 소리로 만들어내는 예술이 아니다.
제이미 핸드릭스가 그의 수첩 마지막 페이지에 남겨놓았던 문장. 그 문구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제 알겠다.
음악은 단지 소리가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고 감정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이라고 짐작된다.
이를테면 감정의 표출.
그것이 어떤 수단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든 간에 소리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 바로 그것이 제이미가 말하고자 했던 ‘음악’이 아니었을까.
바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경기장을 가득 메우며 찬란하게 빛나는 저 빛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나도 모르게 웃었다.
팬들의 감정 하나하나가 마치 음표처럼 튀어나와 허공을 노닐며 빛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시공간에서 뛰어노는 것을 보면서. 아니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하다.
영국에 이렇게 내 팬이 많았나 싶기도 하고.
그 열기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뜨거운 탓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지금 눈앞에 음의 시공간이 나타난 걸지도 모르지.
음, 사실 콘서트 전까진 혹시라도 모를 위험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와 보니 그런 걱정이 싹 쓸려나가는 느낌이다.
내가 이렇게나 사랑받고 있구나.
기쁘다.
단지 기분이 좋고 나쁘다의 의미가 아니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느낌.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에는 손에 댈듯한 뜨거움과 함께 그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난 잠시간 선 채로 팬들의 함성이 그치길 기다리며 만끽했다.
온몸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그 기분을.
그러길 잠시.
이윽고 함성이 그치자, 난 마이크를 들고 기쁨에 겨워 얘기했다.
“반가워요. 여러분.”
진심을 담아 말했고,
“김도준입니다.”
허리를 깊게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공연장이 떠나갈 듯 터져 나와 울리는 박수소리.
쏟아지는 갈채 속에 허리를 편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관객들을 둘러보았다.
저들이다.
날 보기 위해,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 노래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아준 팬들.
그들의 마음 하나하나가 음의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만히 그들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새하얀 빛의 시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팬들에게서 나온 음표들도 여전히 시공간 속에서 뛰놀며 내게 손짓하는 듯하다.
어서, 어서 빨리 함께 놀자고.
그래. 놀아야지.
그러기 위해서 2만명이 훌쩍 넘는 팬들 앞에 선 것인데.
천천히 눈을 뜬 뒤,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팟!
공연장을 밝혀주던 조명들이 일제히 꺼지고,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팬들이 들고 있는 팬라이트만이 점점이 빛을 뿜어내며 사방을 별처럼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흡사 은하수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너무 설레서.
꾹.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고선 외쳤다.
“시작합니다. 이미 알고 있어!”
와아아아아아아!
함성 속에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내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번져 있다는 게 느껴졌다.
***
암전.
광분해서 함성을 내지르는 이들의 손에 들린 팬라이트만 아니라면 공연장은 완벽한 어둠에 휩싸여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무대 위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도준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쉼 없이 예전에 했던 공연 때의 모습을 틀어대던 LED 전광판도 꺼져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대는 어둠에 휩싸인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는 알고 있었다.
잠시 후면 도준이 자신들을 흥분시켜주리란 것을.
그러기 위해 폭풍 전야처럼 세상을 잠재운 것임을.
때문에 함성이 그치자, 공연장은 정말이지 이제껏 떠들썩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고요해졌다.
웅성거림은 사라졌고, 다들 숨소리조차 죽인 채 어둠에 묻힌 무대 위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팟!
핀 조명 하나가 무대 뒤편 한곳을 비추는 순간이었다.
탕!
스틱 한 자루가 크래쉬를 때리는 소리가 침묵에 잠겨 있던 공연장을 깨웠다.
그때부터였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스틱이 쉴 새 없이 탐을 두드리자, 흡사 한 마리 야생마가 들판을 거칠게 질주하는 듯한 드럼 소리와 함께 공연장이 일제히 들끓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팬들의 함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도준이 미친 듯이 드럼을 두들겨대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 탕! 타당! 탕! 탕!
그렇게 한바탕 드럼을 두들긴 도준.
그의 손에 들린 스틱이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둥! 두둥! 둥! 두둥!
드럼 소리가 흥겹게 느껴질 정도로 박자를 맞추었다.
그 속에서 도준이 노래를 시작했다.
- 알고 있어.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제껏 해온 것들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목소리에 팬들의 외침이, 아니 노래가 따라붙었다.
- 알고 있었다니까.
떼창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자 도준은 싱긋 웃으며 드럼을 두들겼다.
물론 노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우리, 이제, 또다시…….
마치 공명이라도 하듯, 팬들이 따라불렀고,
-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한다는 걸.
도준은 그들과 호흡하듯 노래했다.
- 말했잖아. 알고 있었다고.
세상은 거친 모래가 흩날리는 사막과 같고,
지금 서 있는 곳은 메마른 대지의 한가운데.
그래도 나 외치고 싶어.
탕!
드럼 스틱이 하이햇을 때리는 찰나, 도준이 팬들을 바라보자, 그에 호응하듯 팬들이 노래했다.
- 나는 세상의 중심!
내가 있는 곳이 오아시스!
펑! 펑! 펑!
폭발적인 소리와 함께 무대 위 곳곳에서 스모그가 터지고,
슈아아아아아아아악!
하얗게 뿜어진 안갯속에서 검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때였다.
지이이잉……지잉!
어느새 드럼에서 벗어난 도준이 기타를 긁어대며 운무 속에서 걸어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팬들의 환호성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MR이 흘러나오며 본격적인 연주가 들려왔다.
그에 맞춰, 신들린 듯한 도준의 기타 연주도 시작되었다.
엄청난 스피드로 내달리던 기타소리에 팬들이 광분해 날뛰고 있는 사이, 간주가 끝이 나고…….
“알아, 내가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이.”
- 이제껏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란 것을.
그래도 두렵지 않아.
나는 이제 시작했을 뿐이니까.
“왜냐하면…….”
노래하던 도준이 씨익하고 웃으며 관중을 쳐다보자, 팬들이 일제히 소리 질렀다.
- 나는 세상의 중심!
오투 아레나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몰라도 오늘 공연에 다른 싱어는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프닝 또한 김도준의 몫이었다.
어떻게 보면 다채롭지 못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팬들로서는 그렇게 느끼진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좋아들 하는 눈치였다.
하긴 오늘 이곳을 찾은 팬들의 입장에선 그 점이 더욱더 기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무래도 한 곡이라도 더 그의 노래를 듣고 싶은 게 그들의 마음이었으니까.
그리고…….
다들 놀라는 중이었다.
아니 광분했달까.
첫 곡부터 그들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동안 음원으로만 듣던 것과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바로 눈앞에서, 아니 김도준과 함께 하는 공간에서 듣는 노래는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안겨주고 있었으니까.
뭐랄까.
온갖 감정으로 가득한 바다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다.
김도준의 연주는…….
무엇보다 노래는…….
매혹 그 자체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때문이었을 거다.
그동안 영국 내의 팬들이 클럽이나 다른 콘서트에서 내질렀던 함성보다 더 크게, 목청이 터져라 소리지르고 있는 까닭은.
첫 번째 노래인 ‘I ALREADY KNOW(이미 알고 있어)’가 끝나는 순간, 수많은 팬들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김도준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또다시 암전된 무대.
그러길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김도준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반복되고 있을 때였다.
번쩍!
무대 위에서 섬광이 터진 것은.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언제 나왔는지, 무대 뒤편에서 세션들이 각자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자세를 잡기 시작할 때 김도준이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얼---롸이이이이잇!”
동시에 섬광이 가시며 김도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허리를 뒤틀며 포효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세션들이 일제히 연주했다.
두 번째 곡, 김도준의 노래들 중에서 몇 안 되는 영어 제목의 노래. 가 시작된 것이다.
- 암흑 속에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리고 김도준의 노래가 시작되는 그 순간, 팬들이 뜨겁게 환호했다.
- 노래를 불러.
세상의 모든 빛이 너와 함께 할 거야.
얼마 후, 그렇게 두 번째 곡도 폭발적인 반응 속에 끝이 났다.
“후욱 훅…….”
숨을 몰아쉬며 무대에서 내려온 도준을 맞아 조마루가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쭈뼛거렸다.
“훅……. 왜 그래요, 누나? 꼭 뭐 마려운 사람처럼.”
조마루는 도준을 곱게 흘겨보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금 대기실에 손님 와 계셔.”
“예? 손님이요?”
의아한 표정을 짓던 도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기실로 향했다.
거의 연달아 두 곡을 불렀기 때문에 잠시지만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곧장 대기실로 간 도준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익숙한 느낌의 남자가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앞쪽으로는 누군가 앉아 있는 거 같았고.
누구지?
정장을 쫙 빼입은 남자.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어?
“이 실장님?”
옅은 미소를 머금은 이 실장님을 보곤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을 때였다.
이 실장님이 돌아서는데…….
그의 두 손이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하, 할아버지!”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외할아버지가 여길 어떻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휠체어는 왜 타고 계신 거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어어 꺼리고 있을 때였다.
“할애비가 손주 녀석 얼굴 좀 보겠다고 왔는데.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거냐? 뭘 그리 놀라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