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204. 코첼라 페스티벌(1)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때였다.
빠----앙!
응? 누가 이렇게 클랙슨을 울려대는…….
돌아보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지붕이 뻥 뚫린 오픈카 운전석에 타고 있는.
“도준!”
이젠 제법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게 된 그녀였다.
“아, 크리스티나! 이차 뭐야?”
“뭐긴. 한 대 구입했지.”
“비싸 보이는데……. 아차! 나 지금 이럴 때가! 미안 나 먼저 갈게!”
“학교 가는 거 아니었어?”
“응. 니콜 교수님 뵈러…….”
“그럼 타. 나도 지금 학교 가는 길이었거든.”
잘됐다 싶어서 얼른 보조석 쪽으로 가자, 차 문이 덜컥하더니 저절로 열린다.
오오! 엄청 비싸겠는데?
아, 내가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 아직 면허가 없어서 그렇지. 차는 이미 가지고 있는 나였다. 예전에 내 생일 때 콜린이 준 차였다.
그걸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을 때였다.
“있잖아. 도준. 이번에 발매한 앨범 수익 확인해봤어? 나 진짜 완전 감동 먹었다니까! 게다가 새해에 집에 갔을 땐 식구들이 날보곤…….”
음, 친해진 건 좋은데 이젠 예전처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후우. 남자고 여자고 말문이 트이면 수다쟁이가 되는 건 진짜 금방인 거 같다.
그래도 좋긴 하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이들이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또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근데, 니콜 교수님은 왜?”
“아, 다른 게 아니고 이번에 코첼라 문제 때문에 전화드렸는데, 완전 삐치신 거 같더라고.”
“음, 알 거 같네. 요새 기분이 안 좋아 보시던데, 그게 너 때문이었나 보다.”
헉!
생각했던 거보다 심각한가 보다.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짓고 있자, 크리스티나가 풉하고 웃는다.
뭐야! 누군 심각한데…….
“괜찮을 거야. 널 자식처럼 생각하시는 분인데, 별일 있겠어? 그러니까, 앞으로 잘해. 교수님이 널 얼마나 총애하는지 알면서…….”
“그러게.”
한숨을 푹 내쉬며 니콜 교수님을 떠올렸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스승 중에 한 분이셨다.
한데,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으니…….
쩝. 입맛을 다시며 후회하고 있는 사이 차가 줄리아드에 도착했다.
난 서둘러 차에서 내리며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태워다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며칠 뒤에 코첼라 가야 하는 거 잊지 않았지? 다른 애들한테도 내가 다시 연락한다고 좀 전해주고.”
“오케이! 알았으니까, 얼른 가봐! 니콜 교수 더 화나시기 전에.”
손을 흔드는 그녀를 뒤로하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래서요?”
다리를 꼰 채 날 표정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니콜 교수.
“죄, 죄송합니다. 미리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뭘요.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 지난번 센트럴 파크 공연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죠?”
발끝을 건들거리며 날 응시하는 니콜 교수님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나?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우리나라에 이런 말이 있는데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늘 우러러 봐야 한다고. 심지어는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하죠. 제가 그러거든요. 사실 마음은 항상 니콜 교수님을 생각하고 언제나 저 하늘처럼 저와 함께 있다고…….”
아, 씨! 지금 내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피식.
응? 니콜 교수님이 내가 이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그 특유의 여왕 같은 미소를 내보이신 것이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저기서 채찍만 들면 진짜 장난 아닐 거 같다.
“그래서, 제가 킴의 그 ‘스승’이란 얘긴가요?”
“당연하죠. 제 인생의 멘토가 우리 회사 대표님으로 계신 아저씨라면, 절 음악적으로 끌어주시는 분은 니콜 교수님이잖아요?”
“아저씨? 아, 그분 말씀이군요. 그러니까, 그분 말고 제가 당신의 스승이란 말이죠, ‘스승’.”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엄한 서류를 뒤적이시는 교수님. 입가에 스쳐 가는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마음을 푸신 모양이다.
줄리아드에서 잘리건 말건 그건 둘째 문제다.
진심이었다.
화를 푸시길 바랐다.
니콜 교수님이 나 때문에 화가 나셨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탓이니까.
“그래요. 스승이 돼서 제자를 감싸지 않는다면, 스승의 자격이 없는 거겠죠.”
스승이라는 말이 몹시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
“이번 코첼라에는 저도 함께 가겠어요.”
“예.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상관없겠지.
이치상으로도 틀린 말이 아니니까.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에단과 함께 한 소모임을 연주홀까지 이끈 건 누가 뭐래도 니콜 교수님이시니 문제 될 것도 없다.
그건 그렇고…….
“근데, 저 제적…….”
“그게 무슨 말이죠? 어디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몰라도, 그간 과외활동을 한 걸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한테 얘기하도록 하세요. 제가 확실히 얘기해주죠. 어디서 감히 내 제자한테!”
음, 이거 지금 나 혼내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감싸주시는 건지 헷갈리는데…….
“그 문제는 됐고. 앞으로가 문제에요. 월드 투어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두 달 이상 걸릴 테고……. 원칙적으로는 휴학을 하는 게 맞는데, 일단 허먼 교수랑 상의 중이니까 나중에 그 문제에 대해선 얘기해 줄게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까닥까닥.
니콜 교수님은 이제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되찾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리를 꼰 채로 한쪽 발을 까닥거리고 계셨다.
그러면서 살짝 미소까지 머금고 말씀 중이셨다.
“킴. 이번에 앨범 나오고 나면 어쩌면 유럽 쪽에서도 연주회가 열릴지도 몰라요.”
“예? 연주회요?”
씨익.
나왔다.
아저씨랑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악마의 웃음.
니콜 교수님이 양쪽 입꼬리를 광대뼈까지 쭈욱 끌어올린 채 말씀하시고 계셨다.
“무슨 일이든 밀어붙일 땐 가차없이 밀어붙여야 하는 거랍니다.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거든.”
***
와, 씨! 진짜 진이 다 빠진다.
10분 좀 넘었나?
니콜 교수님이랑 얼마 얘기한 거 같지도 않은데, 한 시간은 얘기한 듯한 기분이다.
“지친다, 지쳐!”
그렇긴 한데, 한편으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유럽 쪽에서 연주한다라…….
이번에 공연한 게 꽤 성황리에 끝났다곤 하지만, 그 정도일 줄 몰랐는데.
“한 곡 더 작곡해볼까?”
솔직히 저번엔 실험적인 시도가 많았는데, 그래서 그런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리고 실제로 연주되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고.
뭐,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해보자.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들만으로도 벅차니까.
일단 코첼라 페스티벌부터 다녀와서.
“킴!”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돌아보니 에단 3인방……. 음, 이젠 4인방이라고 해야 하나? 아즈마엘까지 포함해 네 명이 날 보고 있었다.
“교수님은 잘 뵙고 왔어?”
“방금 나오는 길이야.”
“얘기가 잘됐나 보네.”
방긋 웃으며 다가오는 크리스티나를 보면서 난 픽하고 웃고 말았다.
친구는 친구인가보다.
안색만 봐도 다 아는 걸 보니.
“간만에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실까?”
내가 제안하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
화살처럼 빠른 게 시간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뉴욕으로 온 지 며칠 지난 거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준비됐지?”
아저씨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아. 그럼 가자.”
코첼라로 가기 위해서 CDM에서 빌린 전세기에 오르면서 일행들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레이크헬 멤버들과 브라이언이 보였다.
그리고 에단 3인방과 니콜 교수님도.
거기에 리노까지.
이미 비행기에 타고 있는 고 팀장님과 마루 누나 그리고 실비아와 스텝들.
조금 뜻밖이긴 하지만, 아저씨가 함께하는 길이었다.
코첼라 페스티벌에 참석한 후엔 곧바로 월드 투어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기나긴 여정의 시작인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코첼라 페스티벌도 페스티벌이지만, 월드 투어라니…….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떨린다.
돌이켜보면 진짜 짐작도 못 했던 일이다.
노래방에서 주구장창 마이크를 잡고 악악거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점수 1, 2점에 일희일비하던 내가 전 세계를 돌며 콘서트를 하게 될 줄이야. 아무런 감정이 생겨나지 않을 리가 없다.
아직까진 실감이 나질 않지만, 그래도 설렌다.
잘할 수 있겠지?
그래, 잘할 거야.
아니, 잘해야지!
다만…….
또 쓰러지거나 하진 않을까?
노인과의 대화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고 말았다.
“도준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옆자리에 탄 마루 누나가 걱정스럽게 물어온다.
“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이거라도 마실래?”
“……!”
누나가 내미는 박X스.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또 언제 챙기신 거래?
나도 모르게 픽하고 웃음소리를 내며 박X스를 까는 순간이었다.
딸깍!
“뭐야! 이 청량한 냄새는!”
“어? 도준이 뭔가 혼자서만 좋은 걸 마시는 거 같아!”
“와아! 배신감! 지만 몸에 좋은 걸 먹는다니!”
“뭔데, 뭔데?”
“딱 보니까, 엄청난 비약이네요. 그걸 도준 혼자서 몰래 먹다가 딱 걸린 거구요.”
아, 진짜! 애들 앞에선 슝늉도 못 마신다더니.
아주 그냥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별거 아니거든! 그냥 자양강장제……. 아이씨! 이걸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거야!”
투덜거리고 있을 때, 마루 누나가 박X스를 박스째로 들어 올리며 외쳤다.
“줄을 서시오!”
순식간에 줄이 생겨나며 누나한테서 박X스를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받아가는 레이크헬 멤버들이었다.
거기에 실비아랑 니콜 교수님까지 있었다는 게 뜻밖이었지만, 아무튼 마루 누나도 대단하다.
단번에 사태를 잠재우고, 마치 약장수처럼 박X스의 효능에 대해 유창한 영어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걸 다들 눈을 빛내며 듣다가 잠시 후, 여기저기서 캬하!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오! 곰 같은 힘이 솟는 거 같아!”
과장된 디알로의 외침은 덤이었다.
***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푼 후, 난 에단 3인방을 꼬셔서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한번 가보는 게 좋지 않겠어?”
아직 며칠 남았기 때문에 굳이 오늘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레이크헬에게 말해봤지만,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안가.”
“작년에도 갔었어.”
“거기 별거 없어.”
“공연 전에는 볼 거 없다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반응들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없이 에단을 꼬셔야 했다.
“택시는 좀 그러니까, 차 몰고 갈까?”
“그러려면 회사에 말해야 하는데, 못 가게 하는 거 아냐?”
“그러진 않겠지만……. 귀찮다. 그냥 택시 타고 가자.”
“그럼 올 땐?”
“쯧, 안 되겠네. 내가 가서 키 받아 가지고 올게.”
난 서둘러 마루 누나한테 가서 사정을 설명했고, 누난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가자.”
“예?”
“같이 가자고. 너희만 어떻게 보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저희야 좋죠.”
그렇게 해서 마루 누나를 앞세워 코첼라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걸려서 도착한 곳에는…….
아직 해가 지기 전인 드넓은 공간에 펼쳐진 공연장.
야자수가 곳곳에 보이는 가운데 묘한 모양의 구조물들과 안내판 그리고 공연을 알리는 배너가 걸린 기둥들과 함께 라이트들이 보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역시나 공연무대였다.
이제 막 완성했는지 깔끔해 보이는 거대한 무대.
그 무대를 앞에 두고 난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여기서…….
공연하는 거구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