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 혼자가 아니다(2)
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
흔히들 코첼라 페스티벌, 혹은 코첼라페스트라고 부르는 축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인디오의 사막 지대 코첼라밸리에서 행해지는 야외 록 페스티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음악 축제다.
그것도 세계 삼대 축제로 꼽힐 만큼 규모도 크고 라인업도 화려하다.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Weekend 1, Weekend 2 두 번에 걸쳐서 진행된다.
그런데도 한번에 몰려드는 사람들만 무려 25만 명.
1월달에 하는 티케팅도 4시간 만에 모두 매진될 정도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돈 얘기까지 들어가면 입이 딱 벌어지는데, 나로선 관심 없으니 패스.
마루 누나가 보여주는 사진들을 보면서 예년에 치러진 페스티벌의 모습들을 살펴보다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히피네, 히피.
말로만 듣던 그 히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런데 웃긴 건 히핀데 스타일이 장난 아니란 점.
뭐랄까, 핏이 쫘악 빠진 미녀들과 울룩불룩한 근육으로 뭉쳐진 남자들이 바글거리는 느낌이랄까.
그런 관객들이 가득한 가운데 노래를 부르는 싱어들의 모습에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사진에서도 박력이 팍팍 느껴지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지 상상도 되질 않는다.
아무튼, 내가 여기서 공연을 해야 한다는 거지?
그것도 오프닝.
흠, 나야 그렇다 치고 에단이랑 크리스티나, 조안나가 버텨줄지 의문이네.
뭐,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국인인 나보다 오히려 걔들이 더 나을는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이런 유의 문화엔 태생 자체가 미국인인 그들이 훨씬 익숙할 테니까.
“더 포어는 일 주차와 이 주차 때 각각 한 번씩 오프닝을 서면 되고, 넌 따로 각주 두 번째 날 공연에 참여하게 될 거야.”
마루 누나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우린 언젠데?”
디알로의 물음에 마루 누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나를 대신해서 내가 말했다.
“그걸 왜 누나한테 물어? 브라이언한테 물어야지.”
“에이, 그냥 초가 말해줘. 브라이언한테 전화하기 귀찮단 말…….”
“이것들이 진짜! 여기가 니네 회사야? 버젓이 지들 소속사 놔두고 왜 여기서들 이러는 건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어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에요.”
“도준. 영화 못 봤어? 올 포 원! 원 포 올! 우리랑 넌 하나야! 위 아 더 월드, 몰라?”
제롬에 이어 디알로가 쳐대는 드립에 어처구니 상실. 이놈들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은 걸까?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브라이언이 요즘 많이 바빠서 그래. 네 앨범 제작 문제로 정신이 없나 보더라.”
콜린의 얘기에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앨범? 무슨…….”
콜린은 종이컵에 가득 담긴 믹스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뭐긴. 김도준 교향곡이지.”
“아!”
쩝, 할 말이 없네.
그렇긴 하지만…….
“아니 CDM엔 사람이 브라이언만 있어? 다른 직원들 시키면 되잖아!”
“믿을 수가 없으니까.”
헐! 진짜 할 말이 없다.
잠시 생각하다가 혀를 내둘렀다.
“에잇! 불쌍해서 봐준다. 누나 얘들 스케줄도 좀 봐줄 수 있어요?”
“혹시 몰라 자료는 챙겨두긴 했는데, 이래도 되나?”
그때 콜린이 어느샌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브라이언, 많이 바쁘지? 그러니까! 내가 그래서 초한테 좀 부탁했거든. 뭐긴. 코첼라 때문에 그렇지. 그치? 그녀만큼 일 잘하는 사람도 드물지. 흐흐흐. 오케이. 잠시만.”
녀석은 마루 누나한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브라이언과 통화를 한 마루 누나가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반짝거린다.
“오케이! 그렇게 하죠. 대신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나한테 뭐라고 그러기 없기에요!”
전화를 끊은 누나가 날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대체 무슨 얘기가 오갔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혹시 페이라도 받기로 했나?
아니지. 얼마를 준들 그 정도로 웃을 누나가 아닌데…….
그럼 뭘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루 누나는 한층 신바람이 난 목소리로 레이크헬들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
일정은 말할 것도 없고, 부를 노래에 대한 논의까지 전부 끝내고 난 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눈앞에 줄지어 놓여 있는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봤을 때보다 곱절은 늘어난 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팬들이 보내온 편지에 덧붙여 번역가들이 한글 혹은 영어로 바꿔놓은 편지가 함께 묶여 있었으니까.
“뭐부터 봐야 하나?”
상자들을 둘러보던 나는 리비아에서 왔다는 편지부터 집어들었다.
안녕하세요. 킴.
제 이름은 라일라고 열다섯 살이에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리비아 벵가지에요. 수도는 아니지만, 매우 번성한 도시에요. 그것도 전부 옛날 얘기지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쉽지 않아요.
그나마 우리 집은 천장이 뚫리진 않아서 모래바람이 들이치진 않지만, 그래도 역시 먹을 걸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래도 행복해요.
얼마 전 시가지에서 주운 MP3기기 덕분이죠.
잃어버린 사람에겐 무척 미안한 일이지만, 밤마다 몰래 싸미라와 함께 도준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직 저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편지를 쓸까 말까 많이 망설였어요. 전해질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고요. 하지만, 써요. 부디 킴에게 이 편지가 전해지길 바라면서.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거든요.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도 킴의 콘서트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솔직히 가능할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요.
다시 한번 얘기하고 싶네요.
고마워요. 킴. 우리 자매에게 당신의 노래는 유일한 빛이 되어주었어요.
편지를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당연히 편지 내용을 이해 못 해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 내 팬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뭉클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빛이라니…….
나 역시도 누군가가 내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길 바랐다.
적어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노래라는 수단을 통해 전해지길 바란 걸 욕심이라고 생각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부른 노래가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 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가슴이 울렁인다.
그러면서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묘한 기분이었다.
이걸 달리 얘기하면, 감동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길지도 않은 편지 속에 라일라라는 이름의 소녀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는지가 고스란히 전해져 와서.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펴곤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나야말로……. 고마워요.”
그때부터 난 본격적으로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리비아를 비롯해 아프리카까지. 이제껏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지역에서 날아온 수많은 편지들.
라일라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접어든 여자애들도 있었고, 전쟁터에서 팔을 잃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청년도 있었다. 일찍 결혼해 19살에 불과한데도 벌써 두 아이의 엄마인 여성도 있었으며 폐교된 학교에서 얼마 전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년의 남자도 있었다.
그들이 보내온 편지를 하나하나 읽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때론 웃고, 때론 묵직해진 가슴을 나도 모르게 움켜쥐고…….
또 때로는 뭉클해져서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꼬옥.
언제 왔는지, 부드러운 손 하나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누나…….”
굳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살짝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마루 누나는 아무런 말없이 날 안아주었다.
“누난 알았어요? 저런 곳에 제 팬이 있대요. 제 노래를 듣는데요.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날 안은 채 등을 쓸어주던 누나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준아. 때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때가 있듯이, 노래에 담긴 감정만으로도 누군가에겐 힘이 되어 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노래를 계속하는 한, 저 사람들에게 그건 한낱 꿈이 아니라 언젠간 닿을 수 있는 현실인 거지. 그러니까…….”
“…….”
“앞으로도 넌 웃으면서 노래해야 해. 왜냐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네 노래를 듣고 있으니까.”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와 마주한 내 얼굴에 어느새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그 시각, 남아공에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관례라고요, 관례!”
답답하듯 외쳐대는 백인 남자를 최혜원은 감정이라곤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눈길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게 더 답답했던지 백인 남자가 고개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마치 선생이 학생을 타이르듯이.
“이사장님, 아시다시피 구호물품을 전달하기 위해선 사람 손이 필요해요. 그걸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현지에 있는 놈들한테 그대로 전해봐요. 어떨 거 같아요? 전부 그 새끼들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게 나아요. 돈 좀 주어주고 사람들한테 제대로 물건을 전달하는 게 최선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최혜원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잠시 남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남편.
흔들리던 그녀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근 10여 분 동안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그럴 순 없어요. 이 돈……. 내 아들이 나를 믿고 맡긴 돈이에요. 근데 그런 식으로 쓸 순 없다고요. 뇌물이요? 예, 알아요. 세상 일이란 게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걸 나라고 모르진 않아요. 하지만, 다른 돈이라면 몰라도 이 돈은 안 돼요! 저한테서 이 돈은……. 제 아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벌떡 일어나는 그녀를 백인 남자, 사무엘은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곤 외쳐 물었다.
“미세스 최! 그럼, 대체 어쩌잔 겁니까!”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최혜원이 멈춰 서는가 싶더니 시선을 돌렸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지요. 그게 제가 여기 온 이유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떠나버린 최혜원. 그리고 그녀의 남편. 혼자 남게 된 사무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진짜 꽉 막힌 여자네. 돈도 많으면서 왜 그렇게 어렵게 일을 하려고 하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무엘이었다.
“예. 장관님. 아무래도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사무엘.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
캘리포니아로 가기 전까지 사흘 정도 남은 시간. 3층에 있는 작은 회의실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브라이언이 회의를 주도했다.
“우리 회사에선 도준이 코첼라 페스티벌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월드 투어를 떠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이쪽의 의견을 들어보고 난 후 시기는 최종적으로 결정하겠지만, 우선은 월드 투어할 지역은 일단 이렇게 정해봤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정중한 어조로 얘기하는 그에게서 서류를 받아든 HS 엔터테인먼트의 식구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바라보았다.
그간 브라이언과 만나면서 몇 번이나 논의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갓 입사한 실비아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얼마 전까지 한국에 있었던 도준조차 그러려니 하는 눈빛……이 아니다?
브라이언이 눈에 이채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을 때, 도준이 손을 들고 있었다.
“아, 도준. 왜요?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랄 건 없고요.”
“흠, 그런데요?”
“몇 군데 더 추가하고 싶어서요.”
브라이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묘한 눈빛을 흘렸다.
“혹시 중국 쪽에…….”
“아뇨. 거긴 아니고요.”
도준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브라이언은 의아한 눈빛이 되어 강혁수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데,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이미 도준과 얘기를 나눴는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큼. 그럼 어디를 추가하고 싶은 겁니까? 문제만 없다면 도준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도준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럼에도, 브라이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누가 뭐래도 이번 월드 투어의 주체는 도준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도준과는 꽤 친해져서 사실상 나이만 많을 뿐 친구나 다름없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되도록 그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 때였다.
도준이 더듬더듬 얘기했다.
뜻밖의 말을.
“벵가지는 어렵겠죠?”
브라이언의 얼굴이 하얗게 물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