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201. 혼자가 아니다(1)
준영이 형의 얼굴이 일그러질 줄 알았더니 웬걸.
활짝 웃는 게 아주 그냥 만개한 꽃 같다.
하는 말도 뜻밖이었다.
“좋긴 좋더라! 애들이 팔팔해서 그런가, 함께 연습만 해도 그냥…….”
그냥 뭐? 설마 결혼도 한 양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준영이 형이 눈치를 채곤 얼른 손사래를 친다.
“아냐, 인마! 절대로 그런 거!”
“뭐가 아닌데요?”
“큼. 자식이! 나 그런 놈 아니다. 그냥 내 말은…….”
“…….”
“후우, 솔직히 그렇잖냐? 내일모레면 나도 마흔이야. 근데 그렇게 상큼 발랄한 애들하고 함께 연습하고 노래하다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뭐랄까 그래! 잊어버리고 있던 감정들이랑 열정이 살아났달까? 아무튼, 네 덕에 요즘은 아주 활기가 넘치다 못 해서 무슨 일이든 재밌게만 느껴진다니까.”
좋은 일은 좋은 일인데, 살짝 걱정도 된다.
“그래도 애들 건드리면 안 돼요. 알죠?”
“자식하곤! 걔들이 너보다 누나야, 누나! 그리고 아무리 어려도 다들 성년이다.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 없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막내도 얼마나 어른스러운데……. 심지어 내가 다 배울 지경이구만, 무슨.”
“그래요?”
“그렇다니까. 지난번엔…….”
수다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생각도 못한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요즘 걔들도 골치 아픈 모양이더라.”
“왜요?”
“너도 알잖냐? 걸그룹하는 애들 스물셋이면, 정년이나 마찬가지란 거.”
하긴,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아이돌들의 수명은 비교적 짧은 편이었다.
특히나 걸그룹은 더했다.
더 큰 문제는 그러고도 몇 년 지나면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거였다.
어지간히 뜨지 않는 이상은.
말하자면 이름 좀 알려지고 슬슬 활동 좀 하려고 하면 퇴물 취급받기 십상이란 얘기다.
정상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인기를 얻고 있던 씨크릿걸즈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문제는 문제네요. 그래서 어떻게 한 대요?”
“히유! 그래도 제법 친해졌다고 가끔 술 한 잔씩 하는데, 저번에는 울기까지 하더라. 소연…네 형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흠, 정말 할 말이 없다.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형이 저지른 일도 있다 보니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뭐라고 한데요?”
“차기 앨범 준비는 한다고 하는데, 그리 적극적인 거 같진 않아. 이건 내 생각인데, 여차하면 그룹 해산하고, 각개전투로 가지 않을까 싶네.”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란 얘긴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보기엔 씨크릿걸즈의 재능은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느낌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서였을 거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러면?”
아이씨, 이런 일은 아저씨랑 먼저 상의하고 결정해야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우리 회사 쪽으로 옮겨오는 것도 생각해보라고 전해주세요. 아니다. 내가 언제 시간 되면 전화해보죠.”
“그럴래?”
눈에 띄게 좋아하는 형의 모습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아이고, 이 양반. 그동안 어지간히도 정들었나 보네.
하긴 젊고 예쁜 여자애들이 볼 때마다 까르르 웃고 애교를 떠는데 어떤 남자가 싫을까.
더욱이 씨크릿걸즈는 다른 걸그룹과 달리 비교적 순수한 편이라 더 그럴 터였다.
“그건 그렇고. 요즘 많이 바쁘지?”
“그렇죠. 농담이 아니라 제대로 잠도 못 자요. 차 안에서 조각 잠자는 게 아주 습관이 됐을 정도라니까요.”
“크크큭. 알만하다. 그래도 조심해. 그러다 진짜 훅 가는 수가 있다. 젊을 때야 모르지. 나처럼 나이 먹어봐라, 그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몸 관리 좀 해둘 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우, 씨! 뭐하는 거냐, 지금! 뭔 훈장질을! 됐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머리를 벅벅 긁는 준영이 형을 보다가 난 씩 웃었다.
이래서 이 형이 좋다.
처음부터 계산이라곤 없이 다가왔던 형이었다.
그저 나에 대한 호기심과 호의로 다가와 밥이나 한 끼 하자던 준영이 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알죠, 형? 제가 형 좋아하는 거? 그러니까, 형도 건강해야 해요.”
“자식이! 너나 잘해, 인마.”
픽하고 웃더니 한마디 덧붙이는 형이었다.
멋쩍은지 딴 곳을 바라보면서 내뱉고 있었다.
“큼. 너 혼자가 아니란 것만 명심하고.”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지고 있었다.
***
원래는 준영이 형에 이어서 이성원 형님과도 식사 한 끼쯤은 하려 했는데, 그게 맘처럼 되질 않았다.
하필이면 이성원 형님이 프로그램 해외로케로 한국을 급히 떠나게 돼서였다.
아쉬웠지만, 이번에는 그냥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너한테 갚아야 할 빚도 많은데, 하필이면 상황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
“아이고. 무슨 빚이요? 저 형님한테 돈 빌려준 적 없는데요?”
- 자식하고는…….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고. 그래도 내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나중에라도 꼭 술 한잔하자. 알았지?
“저 아직 미성년자인데요?”
- 어 그래? 이번에 성년 되는 거 아니었어?
“아직 일 년 더 있어야 해요.”
- 그럼, 뭐 밥 먹으면 되지.
뭐가 재밌는지 한동안 웃던 이성원 형님이 다소 진지해진 음성으로 말해왔다.
- 알지?
“뭐가요?”
- 자주 보진 못하지만, 네가 매번 내는 신곡은 다 듣고 있다. 그때마다 놀라곤 해. 재능도 재능이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 곡을 만들기 위해서 네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생각하면……. 도준아. 지금만큼만 해라.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형이 뭐하나 보태주진 못해도 늘 응원하고 있으니까……. 큼. 스텝들이 불러서 가봐야겠다. 조심해서 가고. 나중에 보자.
“예. 형님.”
전화를 끊고 난 후 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느낌에.
그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형이 들어온다.
아, 진짜! 결혼을 해도 달라지는 게 없네.
“노크 몰라? 노크?”
“뭐가? 너 혹시 혼자 이상한 짓…….”
“참네. 내가 형인 줄 알아?”
“흐흐흐. 남자는 다 그래. 너라고 별수 있을 거 같냐? 혹시 좋은 거 있으면 같이…….”
“미쳤네, 우리 형님. 형수가 형 이러는 거 알아?”
“김도준. 나 네 형이야, 형! 내가 네 형수한테 잡혀 사는 거같…….”
“응. 그런 거 같아.”
“헐! 얘가 완전 눈뜬장님일세! 너 눈 뜨고 똑바로 봐라! 어딜 봐서 내가 네 형수한테…….”
그때였다.
“민준 씨이이이!”
문밖에서 들려오는 형수의 목소리.
흠칫.
움찔거리던 형이 잽싸게 돌아서 방을 빠져나가다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날 보고 말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너 월드 투어도 좋고 다 좋은데, 잊지 마라. 6월 중순에는 꼭 한국 들어와야 한다?”
“응? 왜……. 아! 그때가…….”
“그래 인마! 네 조카 태어나는 데, 얼굴은 봐야 할 거 아냐.”
“알았어. 무슨 수를 쓰든 그땐 돌아올게.”
“자기야아아아아!”
“어! 지금 가아아아아아!”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는 형을 보면서 나는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딜 봐서 저게 잡혀 사는 게 아니란 건지.
나도 결혼하면 저렇게 되는 걸까?
문득 희주 얼굴이 떠올라 웃고 말았다.
***
부모님과 함께 공항에 나와 있었다.
배웅을 나오신 게 아니라 나보다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재단에서 정식으로 개설한 지점은 아니었고, 임시로 만든 캠프로 가려는 것이다.
“아들, 보고 싶어서 어쩌지?”
“자주 전화 드릴게요.”
“꼭 해야 한다?”
“그럴게요.”
눈가가 살짝 붉어진 어머니.
아버지 역시 날 가만히 보시다가 내 어깨를 토닥거려주셨다.
“항상 조심하고.”
“예.”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걱정되는 건 내 쪽이다.
남아공이야 그나마 치안이 나쁘지 않지만, 결국 활동지역은 낙후된 곳일 수밖에 없으니 여러모로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통화할 때 목소리도 좋지 않으셨는데…….
원래대로라면 이번에 한국에 나왔을 때 얘기 좀 들어보고 혹여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려고 했었다.
후우. 뭐 시간이 있어야 대화를 나누든지 말든지 하지.
나도 나지만, 두 분도 어찌나 바쁘시던지.
한국에 있으면서도 하루에 몇 시간 볼까 말까였다.
각국의 대사관이며 관련 부서장들과 미팅을 갖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신 두 분이셨던 것이다.
“아가, 내가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어머니. 이 사람이 잘해줘서 저 진짜 괜찮아요.”
“엄마. 걱정 마! 장모님이……. 끅!”
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는 걸 보면서 어머닌 혀를 차셨다.
그런 어머니 표정을 보곤 형수가 안절부절못했고.
쯧, 우리 형님……. 진짜 언제 철들라나.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였다.
“탑승 시간 늦겠다. 이제 가보마. 여보, 갑시다.”
아버지가 어머닐 이끌고 출국장 쪽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선 끝끝내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셨고.
그렇게 두 분이 사라지고 난 뒤, 나 역시 형 내외와 인사를 하곤 고 팀장과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도준아!”
형이 날 부른다.
돌아보니, 형은이 주먹을 쥐곤 흔들었다.
“파이팅!”
헛웃음이 나왔다.
하아, 진짜!
내가 어디 싸우러 가는 줄 아나?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응. 파이팅!”
미쳤다.
나도 모르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
한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후 거의 24시간 동안 잠만 잔 것 같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시간만 나면 잠만 자자, 마루 누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볼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냐고.
한국에 있는 동안 미친 듯이 일하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는데.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샤워를 하고 리노가 차려준 밥을 먹고 나서야 배를 두드리며 말하자, 마루 누나가 피식 웃는다.
그러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네가 부탁한 거 있잖아.”
“응? 뭐요?”
“팬레터.”
“아!”
그새 잊고 있었네.
한국을 떠나기 전, 팬레터들을 상자에 꽁꽁 싸서 미국으로 보내버린 터였다.
그러곤 마루 누나한테 부탁해서 번역가 좀 붙여달라고 했었다.
영어나 프랑스어 등은 읽겠는데 아랍어 같은 경우엔 한 줄도 읽지 못하니 어쩌겠나.
돈이야 좀 들겠지만, 그깟 돈이 대수인가.
낙후된 환경은 물론이고 포화가 멈추지 않는 상황에서도 내 음악을 듣고, 또 정성스럽게 써서 보내온 편지들이다.
그 편지들의 가치는 돈 따위로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번역 끝났대요?”
“반쯤? 어쩔래 볼래?”
“음. 일단 스케줄부터 확인하고요.”
아무래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 거 같아서 한 말이었다.
“그래. 그럼. 코첼라 페스티벌에 대한 일정만 확인하고 읽도록 해.”
“그러죠. 그럼 어디 한번 볼까요?”
“근데 좀 출출하지 않아?”
“그럼 간만에 라면 어때요?”
“후후. 지금 나 유혹…….”
“세 개 끓여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쯧, 틈만 나면 이상한 장난이나 하려고 하고.
고개를 내젓곤 얼른 라면을 끓여왔다.
파 좀 썰어 넣고, 계란 두 개를 띄운 라면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아유, 우리 도준이 누가 데려갈는지. 진짜 복 받은 거라니까.”
“참네. 겨우 라면 가지고. 그나저나 이번 코첼라 페스티벌엔 누구누구 온대요?”
“이따 보면 알겠지만, 진짜 쟁쟁하더라.”
김치를 앞에 두고 젓가락을 집어들었을 때였다.
“어? 도준! 지금 뭐 먹어?”
“누들? 와! 혼자만 먹는 거야?”
“노노. 혼자는 아닌 거에요. 둘인 거에요.”
“근데, 냄새 끝내준다.”
“이럴 땐 죽여준다!”
“그래. 냄새 죽여준다!”
“근데 우리 껀?”
하아, 이 자식들을 진짜 어쩌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주방으로 가고 있는 나는 또 뭐냐고.
그래. 배터지게 먹어라.
젠장! 한 열 개 끓이면 되나?
어디에 짱박혀 있었던 건지 우르르 몰려나온 레이크헬 멤버들을 살짝 노려보며 냄비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코첼라 페스티벌이라…….
밥 데일런도 온다고 했는데.
또 누가 올까?
갑자기 가슴이 뛰며 설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