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00화 (200/260)

# 200

#200. 서프라이즈 (6)

재작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위기에 짐짓 놀란척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참, 아무리 세상인심이 원래 이런 거라지만…….

“도준아∼ 나 소영이야. 기억나지? 왜 우리 어릴 때 무지 친했었잖아.”

“어머! 기집애! 말하는 것 좀 봐! 너보단 내가 더 친했지. 도준아 기억 안 나? 내가 너한테 만날 사탕 주던 거? 그때 우리 유치원 뒤에서 몰래 숨어서 사탕 까먹고 했었잖아.”

헐, 유치원 때 일까지 나왔다.

너 같으면 기억 나겠냐고 하려다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 떠들어라. 난 그냥 들으마.

뭐, 좋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데, 니들 덕분에 싹 다 잊고 있던 기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자식! 나랑 같이 PC방 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응? 호철이 너 도준이랑 친했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쟤랑 나랑 한때는 죽고 못 사는 사이였잖냐?”

얼씨구.

난 이름도 가물가물 하구만, 죽고 못 사는 사이?

하아, 이러다간 진짜 피의 맹세라도 했다는 얘기까지 나올 판이다.

아무튼,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날 둘러싸고 난리 법석이다.

그 와중에도 그놈의 사인 타령들은.

스윽 슥 슥슥슥.

뭐가 됐든 내미는 대로 다 해줬다.

그게 사진이든, 종이든, 옷이……. 야이씨! 그렇다고 옷을 벗고 지랄들이야!

얜 또 왜 소매를 걷어붙이는 건데?

“설마 팔뚝에 해달라는 건 아니지?”

“호호호. 왜 아니겠어? 도준아, 이렇게 써줄래? 소영아, 우리 사이 영원히 변치 말자.”

우리 사이? 대체 그건 어떤 사이냐?

어이없어서 바라보는데, 소영인지 뭔지 하는 여자애가 까르르 웃으며 말을 잇는다.

“내가 타투 잘하는 데 알거든. 내일 가서 바로 문신 새겨야지.”

“어머! 그거 좋은 생각이다! 도준아! 난 그럼 하트까지 새겨줘!”

까르르 웃는 소리.

농담이라고 한다는 게…….

막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미친년들!”

나대신 시원하게 날려주는 목소리.

크크큭.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 나타났는지 석준이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곤 희주한테 윙크를 했다.

“미안∼ 내가 좀 빌려 갈게요, 아가씨.”

저번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느끼해진 녀석이 날 한쪽으로 끌고 간다.

뒤쪽에서 아쉬운 소리가 터져 나오는데, 감히 석준에게 뭐라고 하진 못한다.

왜?

이 녀석이 L그룹 회장님 막내 손자라서가 아니다.

성격이 하도 지랄 맞아서 그런 거지.

지 마음에 안 들면, 선배고 나발이고 없이 머리통부터 들이밀고 보는 녀석이니 말 다했지.

“새끼. 좋냐? 인기 많아서?”

“너 같으면 좋겠냐?”

“큭. 하긴. 내가 너라면 하루도 못 견디고 깽판 놨겠지. 근데 누구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나 보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날 한쪽으로 데려가던 석준이 시선을 돌려 눈짓을 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익숙하다고 하기엔 가물가물한 얼굴 하나가 보인다.

흠, 누구더라…….

“기억 안 나? 예전부터 희주한테 찐 붙던 놈.”

“……아! H 해운?”

“고렇지. 우리 도준이 머리가 슈퍼컴인데 이 정도는 가뿐히 기억해줘야지.”

“근데, 대학생 아냐?”

“그러니까. 명진이 형도 그렇고 대학 간 형들은 아무도 안 왔는데 혼자 와서 저 지랄이다.”

“얀마. 다 좋은데……. 너 요즘 입이 너무 거친 거 아니냐?”

“하아! 몰라 몰라. 대학가라고 하도 성화라. 스트레스받아 그런가 봐.”

웃기고 있네.

원래부터도 그런 기미가 보이던 녀석이었다.

위로 줄줄이 있는 형들에게 치여서 집안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탓에 늘 밖으로만 돌던 구석준. 그러다 보니 언제 터져도 터질 폭탄 같은 놈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나이를 먹으며 이젠 더 이상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을 뿐이다.

뭐, 그래 봐야 어디까지나 재벌들 수준에서의 문제일 뿐. 사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이 정도는 양반이긴 하지.

여자들을 건드리고 쌈박질하고 돌아다니진 않으니까.

천성이 착한 놈이라 언젠가는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는다.

“그래도 되도록 입조심하고 살아 인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입속의 칼이라는 말도 있잖아.”

“오! 김도준이! 멋진데?”

픽하고 웃고는 녀석과 함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았다.

여전하다.

다들 끼리끼리 모여서 웃고 떠들면서도 안 그런 척하면서 희주 눈치를 본다.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냐, 이놈의 동네는.

당연하게도 날 바라보는 눈빛들은 여전히 둘로 나뉘어 있었다.

뭐, 예전보단 좀 낫긴 한데 그래도 모두가 친근한 태도로 날 대하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특히 남자들은 눈동자에 적개심까지 담고 있었다.

H 해운 사장 아들내미가 대표적이었을 뿐, K그룹이라든가 J그룹이라든가, 재벌 3세들의 눈빛엔 노골적인 질투와 멸시가 맺혀 있다.

참네. 내가 지들한테 뭘 잘 못했다고 저러는 건지.

고개를 내젓다가 시선이 한곳에 이르렀을 때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스무 살 전후한 남자들로 구성된 밴드가 보인 까닭이다.

세이버스 형들과의 일들이 떠올랐다.

진짜 재밌었는데…….

잘들 지내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때였다.

“왜? 노래 한 곡 할래?”

석준의 물음에 픽하고 웃고 말았다.

“내 몸값이 얼만 줄이나 알아?”

물론 농담이다.

친구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희주가 원하면, 그리고 이 녀석이 등 떠밀면 못 이기는 척 나서서 한 곡뿐 아니라 열 곡도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라? 희주?

쟤가 왜?

밴드들 사이로 걸어간 희주가 마이크를 들더니 내 쪽을 바라보며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물러나지 않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설마 노래하려고?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사람들을 따라서 박수를 쳤다.

- 안녕하세요. 정희주입니다. 제 생일에 축하하러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축객들을 한차례 둘러보며 얘기하던 그녀는 이제 내게 신선을 못 박은 채 말하고 있었다.

-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자리에서 누군가 절 위해서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언젠가는 그 사람을 위해서 노래하고 싶다고.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서툴고 모자라지만 너무 욕하진 말아주세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가운데 꿋꿋하게 얘기하는 희주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것 참…….

진짜 놀랐네.

설마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을 거라곤 예상도 못 했네.

“야, 너 아까보니까 꽃다발 주던데, 너무 일찍 건넨 거 아니냐?”

“그러게.”

“설마 선물이 그게 다는 아니지?”

“…….”

“재작년엔 그냥 시집으로 때웠었잖아. 음, 이건 내 생각인데 오늘도 대충 넘어갔다간…….”

“조용.”

내 말에 눈치 빠른 석준이 입을 다무는 순간이었다.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없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 까마득한 옛날 일이지만, 난 아직도 기억해.

응?

이 노랜 내가 이번에 발표한 노래인데…….

남이 부르는 걸 들으니 느낌이 전혀 다르다.

아니, 희주가 불러서 그런 걸까?

그나저나 잘도 눈치챘네.

이 노래는 사실 희주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었는데…….

- 처음 보았던 그 시절의 너.

작고 하얀 얼굴, 겁먹은 듯한 눈.

크고 맑은 눈동자가 날 보고 있었지.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노래를 부르는 희주. 그녀는 어느샌가 눈을 감고 있었다.

길고 곧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용기를 모두 쥐어짜서 저 자리에 서 있는 걸 테다.

마이크를 움켜쥔 두 손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틀림없었다.

- 철없던 그때완 달라.

이제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어.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이제 후렴구로 들어갈 차례였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손까지 떨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간주가 흐르고 있었다.

피식.

난 나직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입술을 달싹였다.

비록 생목이지만, 탁 트인 광장에서도 노래했던 나였다.

아무리 스위트룸이라지만, 그래 봐야 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공간에서라면 굳이 마이크 따윈 필요치 않았다.

- 널 만나고…….

“널 만나고 많은 게 바뀌었어.”

희주의 노랫소리와 내 목소리가 겹쳐지자, 흠칫 놀라며 눈을 뜨는 그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노래했다.

- 우린 늘 가까이 있었지만,

언제나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지.

그래도 난 알아.

내 옆자리엔 네가 있어야 한다는 걸.

이 노랜 내 노래임과 동시에 희주의 노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고백하지 못한 채 마음 앓이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노래였다.

또한…….

그동안 오로지 나만 바라봐준 한 사람을 위한 노래였다.

“이제 우리 함께 해.”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섰다.

그리고 가만히 희주를 내려다보며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도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내보이며 노래했다.

-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천 년을 하루처럼, 하루를 천 년처럼.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시간만큼.

“이젠 네 곁에 내가 있을 게.”

희주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마치 볼을 타고 또르르 굴렀다.

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가를 훔쳐주곤 말했다.

속삭이듯이.

“생일 축하해.”

그러곤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달칵.

가볍게 울리며 열리는 케이스.

케이스 안을 본 희주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 한줄기가 어린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는 동안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왜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거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그게 정말 미안했다.

그래서였을 거다.

난 목걸이를 걸어준 후, 그녀를 안아주었다.

여전히 반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입만 떡 벌리고 쳐다보고만 있을 뿐.

그러다가 정신을 차렸는지,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졌다.

특히 석준이 녀석이 난리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쳐대며 끊임없이 휘파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물론 녀석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축하만 해주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날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객실을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H 해운 사장 아들 역시 마찬가지.

그는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인상으로 날 쏘아보더니 말아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자리를 떠나갔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오늘 일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듯이.

나?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잘난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앞으로 내 옆에 그녀가 있을 거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깜짝 이벤트가 끝났다.

누가 누구를 놀라게 해 주기 위해 준비된 이벤트였는지는 몰라도.

***

다음날, 곧바로 광고 촬영에 들어갔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네 개나 되는 촬영을 모두 끝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우려에 불과했다.

내가 매정하게 거절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들 하셨는지, 외삼촌들이 이미 촬영 준비를 모두 마쳐놓았던 것이다.

덕분에 사흘 동안 엄청 달렸다.

시청 한복판에서, 양수리 한강변에서, 평택 신축 공사현장에서,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며 밤낮없이 찍고 또 찍었다.

그리고 지금 난 모든 광고 촬영을 마치고 청담동 한 카페에 와 있었다.

더없이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내가 무슨 월남전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격하게 끌어안는 준영이 형에게 말했다.

“춤 진짜 잘 추던데요?”

흑역사부터 꺼내 드는 나였다.

속으로는 킥킥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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