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199. 서프라이즈 (5)
어이구야. 분위기 참…….
거실에 떠도는 공기는 어색하기만 하다.
소파 양쪽 끝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작은 외삼촌과 큰 외삼촌. 그 벌어진 거리만큼이나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두 사람. 가끔 힐끔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두 사람이 진짜 형제가 맞나 싶을 정도다.
그나마 작은 외삼촌은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기나 하지, 큰 외삼촌은 내게서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아주 그냥 안절부절못한다.
쯧, 대충 눈에 그려진다.
이미 내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삼촌들. 기다리다 못해서, 아니 혹여라도 내가 이대로 한국을 떠나버릴까 봐서 급한 마음에 찾아온 것일 터다.
근데 하필이면 같은 시간대에 올 건 또 뭐람.
주차장에서 마주쳤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마주쳤든 간에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집 앞에 도착한 모양인데…….
나로서야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두 분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가고 있을지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거참, 사람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더니.
예전 같으면 아버지께서 잔뜩 긴장을 한 채 어찌할 줄 모르고 큰 외삼촌은 잔뜩 거들먹거렸을 텐데, 오늘을 어째 정반대다.
큰 외삼촌이 가시방석에라도 앉아 있는 듯 시종일관 불편한 얼굴인데 반해 아버진 편하디편한 안색이셨다.
나로서도 예전을 생각하면 더 이상 이러고 있을 까닭이 없겠지.
뭐, 마음 같아선 작은 외삼촌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직접 만나보고 제대로 판단하라던 외할아버지의 당부를 떠올리곤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번에 큰애 결혼식 때보니까, 녀석도 이제 다 큰 거 같더라. 듣기로는 일도 곧잘 한다며?”
작은 외삼촌의 얘기에 어머닌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에휴. 아직 철들라면 멀었어. 그나마 새아가가 똑 부러져서 다행이긴 한데 언제 사람 될지…….”
혀까지 차고 계셨지만,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도 고슴도치구나 싶었다.
형 얘기를 하면서도 얼굴에는 그저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근데, 진짜 오빠들 웬일이야? 같이 온 거야?”
설마 몰라서 물으셨을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쑤셔대는 어머니 모습에서 어째서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걸까.
피는 못 속인다고 생각하면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두 분이랑 얘기 좀 나눌까 하는데……. 괜찮죠?”
“어? 그럴래?”
어머닌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을 해 보이셨고, 아버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두 분께 양해를 구하곤 일어서는데, 주섬주섬 찻잔을 챙겨 들고 따라 일어나는 어머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가 사라지는 걸 보곤 난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괜찮으시면 제 방에서 얘기하시죠?”
삼촌들에게 말하자, 두 분 다 고개를 끄덕이셨다.
***
둘이 원하는 건 두 가지일 테다.
우선은 광고.
큰 외삼촌은 아파트와 식품 쪽 광고를 찍길 원하는 걸 테고, 작은 외삼촌은 음료 쪽을 찍길 원하는 걸 테지.
하지만, 광고는 사실상 찍어도 그만 안 찍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게 훤히 보인다.
말하는 내내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둘이 진짜로 원하는 거?
별거 있나?
광고고 뭐고 일련의 과정에서 어떻게든 내게 한몫 제대로 챙겨줘서 환심을 사고 싶은 거겠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외할아버지께 내가 지분을 넘겨받은 걸 눈치챘다는 의미다.
더구나 주총이 눈앞에 바짝 다가온 상황.
그때 내가 거길 참석하느냐 마느냐는 중요치 않을 테고, 어디까지나 내가 누굴 지지하는가가 중요한 일일 테지.
그렇다고 해도 두 분 다 아직까지 그룹 회장이 될 엄두는 내지 못할 테고.
그저 나한테서 지지를 받고 싶은 거겠지.
그래야만 앞으로 있을 치열한 승계 싸움에서 그룹 내 영향력을 넓히기가 수월할 테니.
“도준이 너도 알겠지만, 요즘 아파트 분양률이 높지가 않아요. 그러니 어쩌겠니? 식구인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한다.”
식구라…….
난 담담한 표정으로 큰 외삼촌을 바라보았다.
그래. 사업가는 저래야겠지.
다른 건 몰라도 얼굴에 철판 정도는 깔아줘야 기업을 운영할 수 있을 거다.
예전에 우리 가족을 정말이지 거지 취급했던 큰 외삼촌이 떠올랐지만, 그냥 잊기로 한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런 걸 일일이 되새길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그야…….”
본심을 숨기느라 애쓰시는 외삼촌.
살짝 말끝을 흐리며 작은 외삼촌을 힐끔거리던 큰 외삼촌이 에둘러 말씀하셨다.
“일단 광고 몇 개만 찍어라. 그리고 가족 간에 이게 뭐냐? 내가 널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얼굴이라도 자주 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누가 누굴 업어 키웠다고?
야, 진짜 우리 외삼촌 그렇게 안 봤는데…….
얼굴에 깐 철판 두께가 못해도 10밀리는 훌쩍 넘지 싶다.
“알겠어요. 계약문제는 아버지랑 하시면 되시고요. 스케줄은 회사하고 하시면 되겠네요. 뭐, 어차피 외삼촌도 결정만 내리시면 아랫사람들이 다 알아서 하잖아요. 그쵸?”
“그렇…….”
“작은 외삼촌은 아까 음료 쪽 광고 찍자고 하셨죠?”
“글쎄다. 광고도 광고인데, 마케팅에 좀 더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얘기죠?”
작은 외삼촌은 기회다 싶었는지 큰 외삼촌을 한차례 힐끗 바라보곤 내게 말했다.
“너 이번에 월드 투어한다면서?”
얼씨구?
욕심도 크셔라.
그러니까, 월드 투어를 후원하고 싶으시다는 얘기?
참네. 진짜 날 어린애 취급하시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난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작은 외삼촌께 말씀드렸다.
다소 단호한 목소리로.
“그건 이미 정 회장님이랑 얘기 다 끝났는데요?”
죄송합니다. 정 회장님.
이런 식으로 이름을 팔고 싶진 않았는데, 상황이 상황이라서 말이죠.
희주한테까지 살짝 미안해지긴 했지만, 효과는 직빵이었다.
확 일그러진 작은 외삼촌의 얼굴.
그 얼굴에 대고 달래듯 얘기했다.
“그래도 한번 얘기는 해볼게요. 회사에 얘기하면 혹시 알아요? 스폰서 끝자락에 어떻게든 D그룹 로고 한 줄은 욱여넣을 수 있을지.”
“그래? 하하하. 그렇게만 된다면야 나야 더 이상 바랄 게 없지.”
“그럼 커피 광고는 안 찍어도 되는 거죠?”
“응? 에이, 이 녀석이! 우리가 그런 사이냐? 그러지 말고, 내 얼굴 봐서라도 음료……. 적어도 커피는 좀 찍자. 응? 너 알잖냐? 네 할아버지 성정이 어떠신지. 이번에 나한테 직접 전화까지 하셔서 꼭 커피 광고 찍으라고까지 하시더라.”
할아버지를 앞으로 내세우며 슬금슬금 내 표정을 살피시는 작은 외삼촌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커피도 찍어요. 그럼.”
군말 없이 내가 오케이하자, 작은 삼촌의 얼굴이 확 펴진다.
반면 큰 외삼촌의 얼굴은 똥 씹은 얼굴이 되고.
“아, 큰 삼촌! 식품 쪽도 광고 찍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찌, 찍어야지!”
“그럼 그것도 이번 기회에 찍죠.”
“그래 줄래?”
얼마나 기쁜지, 혼자였으면 주먹을 움켜쥐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고도 남았을 표정이었다.
***
두 사람이 가고 난 뒤, 어머니께서 걱정스럽게 물어오셨다.
“괜찮겠니?”
“예? 뭐가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바라보자, 어머니께선 날 가만히 보시다가 한숨을 폭 내쉬셨다.
그러곤 중얼거리셨다.
“……하아. 어쩔 땐 네 할아버지를 보는 거 같다니까.”
흐흐흐. 그래서 그런 말이 있는 거랍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그건 그렇고.
이쯤 해뒀으면 두 분은 충분히 안심하시겠지.
아마도 지금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별의별 망상들을 다할 게 뻔하다.
각자 내가 자신들이 내민 손을 잡은 거라고까지 생각진 않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채셨을 테니.
그럼 내 본심은 어떤가?
간단하지, 뭐.
이런 말도 있잖아?
이긴 놈이 우리 편인 거라는.
그러니까 난…….
씨익 웃으며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저 좀 나가봐야 할 거 같아요.”
“응? 지금 네 형 온다고 했는데?”
“어제 말씀 안 드렸나? 오늘 희주 생일이라서요.”
“어머! 그러니?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예?”
“너 설마 그러고 가려고 했던 건 아니지?”
응? 지금 내 꼴이 어때서?
나름 잘나가는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티셔츠에 핏이 잘 사는 청바지. 여기에 가벼운 점퍼만 걸치면 스타일 팍팍 살겠구만.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해야…….
“어, 엄마!”
날 질질 끌고 들어가는 엄마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호호호. 뉘 집 아들인지 훤하기도 하지.”
예예. 어머니 아들 김도준 여기 있습니다.
근데 진짜 쑥스럽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이건 뭐 턱시도도 아니고.
언제 맞춰 놓은 신 건지, 새하얀 셔츠에 세련된 느낌의 정장 수트를 입은 저 자식은 누구냐?
그리고 화룡점정을 찍듯 목에 매단 목줄……. 아니 나비넥타이는 뭐냐고.
“하아. 엄마. 진짜 저더러 이러고 가라고요?”
“아들, 엄마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오는 거야. 잔말 말고 가. 아! 가다가 꽃다발 사가는 거 잊지 말고. 근데, 너 선물은 준비했니?”
“그야……. 그, 그럼요.”
또 무슨 난리부르스를 추게 될지 몰라서 대답은 하고 봤다만 솔직히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다.
남몰래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좀 늦을지도 몰라요.”
“응. 안 들어와도 돼.”
헐! 아들을 믿으시는 건지, 아니면 작정을 하신 건지 판단이 안 서네.
고개를 내저으며 막 집을 빠져나오는데,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형하고 형수가 들어서고 있었다.
“어? 브라더? 어디 감?”
“몰라도 됨. 신경 끄셈.”
형수가 풉하고 웃는 걸 뒤로 하고 얼른 집을 나섰다.
뒤에서 형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불편해.
그것도 몹시.
이럴 땐 진짜 후회막급이다.
운전면허를 따는 건데…….
아니지.
미국에서라면 몰라도 아직 한국에선 운전면허 딸 수 있던가?
긴가민가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화점을 돌았다.
아, 뭘 사지?
지지난해엔 달랑 시집 한 권 사서 갔었는데…….
그때 희주가 무지 좋아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랬다가는…….
아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이 다 축축해져 온다.
그렇다고 가방이나 옷 같은 걸 선물하기엔 좀 그렇고.
역시 차 같은 것은 좀 과하겠지?
뭐, 그런 건 이미 차고 넘칠 테니 그다지 의미도 없을 테고.
그럼 뭐가 좋을까.
역시 보석류인가?
난 머리를 긁적이며 귀금속 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곤 가장 가까운 매장으로 들어가 스윽 한차례 둘러보았다.
그사이 매장 점원이 와서 묻는다.
“어머! 혹시 김도준 씨 아니세요?”
귀염성 있는 인상의 아가씨가 사인부터 요구해와 얼른 펜을 놀리곤 물었다.
“요즘 잘 나가는 게 뭐 있어요?”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딱 봐도 입이 무거워 보이진 않는다.
손님의 비밀?
그런 건 하룻밤 술안주로서의 가치로도 여기지 않을 타입 같다.
“아, 아뇨. 그냥 친구예요.”
“흠, 그럼 이건 어떠세요?”
날 안내하는 쪽으로 가보니 핑크색이 감도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다.
“체인은 백금처리 돼 있고요. 펜던트 역시 백금에 보석은…….”
들어도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반지보단 낫지 싶었다.
아무래도 반지는 낯 간지러워서 도저히…….
게다가 희주가 하면 잘 어울릴 거 같았다.
“이걸로 주세요.”
그렇게 선물을 사고 백화점을 나오다가 뒤늦게 떠올랐다.
“아! 꽃다발!”
***
P 호텔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쯧, 다시 생각해봐도 과하다.
그때에 비해 두 살을 더 먹었다지만, 그래 봐야 19살인데 뭔 생일 파티를 호텔에서 하냐고.
그것도 하룻밤 묵는 데만 몇백만 원씩 하는 스위트룸에서.
구겼던 인상을 펴며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때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날 바라보던 친구들 얼굴이 떠올라서. 반쯤은 그럭저럭 아는척해 왔지만, 나머지 반은 없는 사람 취급했었는데…….
하기야 다들 대한민국에서 한가락 하는 집안의 자식들인데 내가 눈에 보이기나 했을까.
그나마 석준이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색해서 십 분도 못 있었을 거다.
진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따로 없었지.
흐흐흐. 그나저나 석준이도 오늘 왔을 테지.
잘 됐네.
어차피 한번 보려고 했는데, 여기서 대충 때워야겠다.
흠, 그러고 보니 그때 희주한테 찝쩍대던 놈이 있었지 아마?
H 해운 사장 아들내미라고 했던가?
우리보다 두 살 많으니까, 지금은 대학생이 됐을 텐데 오늘도 왔을까?
갑자기 웃음이 났다.
세이버스 형들이 떠올라서였다.
크크큭. 내가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곤 다들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땐 정신이 반쯤 나가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동영상 보니까 형들 표정이 가관이던데…….
오늘도 형들이 왔을까?
그럴 리가 없지.
요즘 한창 물이 올라서 방송에도 곧잘 나오던데, 설마 여길 왔겠어?
아무튼, 그때 일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희주가 환한 웃음으로 날 맞이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예쁘네.”
그러면서 꽃다발을 내밀자, 희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런 채로 날 올려다보다가 이내 말없이 눈을 깔고는 얼굴을 붉히는 그녀였다.
픽하고 웃고는 그녀와 함께 막 안으로 들어서는 찰나였다.
“도준이?”
“진짜?”
“김도준이라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도준이다아아아아!
뭐, 뭐야 이거?
분위기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