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 서프라이즈 (3)
다음날, 고 팀장님의 말씀처럼 마루 누나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러니까, 티아라 뱅크슨이 그랬단 말이죠?”
- 그래. 저쪽에서도 굉장히 난감한 모양이야.
솔직히 놀랍다.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니,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티아라를 비롯해 아메리칸 갓 탤런트 측에선 반신반의하는 모양인데, 사이몬 혼자서만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모양.
- 사이몬이 네 광팬이라네?
팬이라는 말이 이처럼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긴 또 처음이다.
“그래서 어쩌기로 했는데요?”
- 한번 만나보긴 해야 할 거 같아. 대표님께선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하게 낫겠다는 생각이시고, 브라이언은 좋은 기회라고 주장하고 있거든.
기회라…….
굳이 내가 미국인이 아니라도 기회인 건 틀림없지만.
“일정이 맞아요? 곧 월드 투어도 해야 하는데, 힘들지 않나?”
- 대표님도 그걸 가장 우려하시는 거지. 아무튼, 이번에 미국 들어오면 저쪽하고 한번은 만나봐야 할 거 같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후우. 알겠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메리칸 갓 탤런트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건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사실 인지도를 비롯해 여러 가지를 따져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이제 막 적극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려는 찰나에 방송에 출연한다는 게 과연 좋은 건지 나로선 쉽게 판단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모르겠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들부터 처리하자.
“뭐, 정 아니다 싶으면 안 한다고 하면 돼지.”
생각을 정리하곤 방을 나왔다.
그리고 놀랐다.
와, 진짜 놀랄 일 투성이네.
거실 한복판에 주욱 늘어서 있는 상자들를 보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이게 다 팬레터라고요?”
내가 묻자, 어머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와아. 무슨…….”
라면 상자만한 박스가 무려 여덟 개다.
지역별로 구분돼 있는 상자들을 보고 있자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한숨과 함께.
“아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읽어봤으면 좋겠어.”
“……?”
어머니께서 가리키시는 상자를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다.
이거 아랍 쪽 같은데?
주춤거리다가 어머니가 말씀하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한가득 들어 있는 편지들.
정말 엄청난 양이다.
못해도 천 통은 넘을 거 같다.
나 참, 요즘처럼 이메일이네 SNS네 할 것 없이 인터넷이 발달하다 못해서 산간 오지에서도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는 시대에 웬 손 편지람.
물론 경우에 따라선 편지를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도 내 팬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달까.
이게 다 리비아에서 온 거란 말이지?
그것도 무슨 까닭인지 한국으로 직접 보내온 것도 아니고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온 거란다.
흠, 거기에 아직 우리나라 대사관이 남아 있다는 게 더 놀랍다.
“진짜 놀랍네요.”
“엄마도 그래. 파리의 자선 파티에서 주 리비아대사에게서 얘길 듣고 뭔가 가슴이 먹먹하더라.”
“그러셨겠네요.”
이해 할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총성이 울리고, 한 달에만 리비아 내 중요거점들을 점거하는 무력단체들이 수시로 바뀌는 나라인데, 그런 곳에서도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걱정도 되고 무언가 불안하기도 하다.
“꼭 읽어봐야 한다, 알았지?”
“걱정 마세요.”
그동안 팬레터를 안 받아본 것도 아니고, 그때마다 없는 시간도 쪼개가며 읽어온 나였다.
물론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권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도 아니면 이메일이었지만 말이다.
하물며 지금 같은 경우야 당연한 일 아닌가.
어떤 과정을 겪어 지금 내 손에 쥐어졌는지는 몰라도 이 편지들을 읽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들도 보면 알겠지만, 여기 있는 편지들은 다 인터넷이 안되는 낙후된 곳에서 보내온 것들이야. 현지에서 대사관을 통해 전해진 건데, 나한테 부탁하더라. 꼭 좀 전해달라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개를 끄덕인 후, 편지들을 챙겼다.
그러면서, 언어가 달라서 쉽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번역가를 구해서라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재단 활동은 이제 좀 할만 하세요?”
상자를 한쪽에 밀어놓고 묻자 어머니께서 밝게 웃으셨다.
“처음엔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할만해. 너도 알다시피 네 아버지가 많이 도와주고 있고. 현지 대사관이나 기업들, 그리고 주민들의 도움이 크지.”
“다행이네요.”
“호호호. 아이들 웃는 거 보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왜 여태 안 했을까 싶을 정도야. 이 엄마가 아들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지, 뭐.”
웃고 계시는 게 좋아 보이신다.
옆에 앉아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시는 아버지도 그렇고.
“어려움은 없으세요?”
곧 나가봐야 해서 막판에 덧붙이듯 물은 건데, 어째 표정이…….
“……무슨 일이든 좋기만 하겠니? 다 그런 거지.”
“뭔 일 있어요?”
“호호호. 아들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재단 일은 나랑 네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지금 하는 일에만 집중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더 이상 묻기도 그렇다.
“알겠어요.”
대답을 하곤 방으로 돌아왔다.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
약속했던 대로 팬 미팅을 해야 하니까.
그렇긴 한데, 마음에 걸린다.
어머니 얼굴에 스쳐 간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
오후 다섯 시. 팬 미팅을 하기 위해서 강남 K 센터로 향하는 길. 어째 어머니와 마지막에 나눈 얘기가 머리를 떠나질 않고 있었다.
결국, 고 팀장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팀장님.”
“……?”
“기부 내역이랑, 재단 활동 내역은 제대로 올라가고 있죠?”
“당연하지. 그런 일은 투명성이 생명인데, 그걸 소홀히 할 리가 있겠어?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반영돼서 바로바로 올라가니까 걱정 마.”
머릿속으로 김도준 앱을 떠올린 나는 다시 물었다.
“혹시 어려운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왜? 어머니께서 힘들다고 하시던?”
“그런 건 아닌데……. 표정이 좀 좋지 않으시더라고요.”
잠시 말씀이 없으시던 고 팀장님께서 얕은 한숨과 함께 얘기하셨다.
“글쎄다. 이건 내 짐작인데, 꽤 큰돈이 오가다 보니 여러 곳에서 연락해오는 거 아닐까?”
“여러 곳이요?”
“복권 당첨되면 별의별 전화가 다 온다고 하잖아? 비슷한 거지. 물론 이 경우엔 연락을 해오는 곳의 규모가 좀 크겠지만.”
“그 말씀은?”
“잘은 몰라도 정치권에서 압력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
응?
정치권?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난 눈을 치떴다.
그러자 고 팀장님이 차가 신호에 걸린 틈을 타 날 바라보신다.
“걱정되면, 내가 좀 알아볼까?”
“…….”
“재단 문제까지 우리가 간섭한다는 인상을 줄까 봐 지켜만 보긴 하는데, 대표님께서도 우려하시긴 하더라. 혹여라도 외부에서 압박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워낙 큰돈이 들고나고 하니까.”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어지간하면 나 역시 어머니께서 하시는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찜찜한 상태로 있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부탁드렸다.
단, 어디까지나…….
“일단 알아만 봐주세요.”
“알겠다. 그렇게 하마.”
“고마워요.”
“자식하곤.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준비해라. 팬들이 한 8천 명 정도 모였다고 하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씩 웃어 보였다.
몇이 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날 보겠다고 와준 팬들인데.
몇천이 아니라 몇만이 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서울 한복판의 거리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강남 K 센터 A홀에 들어서는 순간, 난 마른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8천 명이라며?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제 눈엔 8만 명도 넘는 거 같은데요?”
고 팀장님이 한차례 날 보곤 픽 웃으신다.
“홀 자체가 8천 명 이상은 수용할 수 없다. 그러니까, 틀림없겠지?”
“하아. 진짜 많네요.”
“몇백만 명을 앞에 두고서 콘서트도 한 놈이 무슨. 시답잖은 소리 말고 얼른 들어가자.”
경호팀과 함께 대기실로 향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가 여기에 도착했다는 걸 알게 된 팬들이 고함을 지르고 난리법석이다.
한국 올 때마다 팬미팅을 하겠다고 했는데, 괜한 소리를 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보면, 저 많은 사람들이 나 한 명 보겠다고 여기 왔다는 거잖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스텝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고 팀장님이 문을 열어주었다.
“아, 샤오린!”
따지고 보면 얼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엄청 반가웠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활짝 웃어 보이던 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 아니 소녀 때문이었다.
브레드야 샤오린을 부록처럼 따라다니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누구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이제 갓 중학생이나 됐을까 말까 한 소녀. 아직 앳돼 보이기만 하는 소녀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샤오린이 웃어 보였다.
“도준, 잘 잤어요?”
“집에서 잤는데, 못 잤을 리가 있나요? 샤오린이야말로 피곤하겠어요. 근데 중국팬들도 왔나 봐요?”
“후후. 도준이 한 공약 때문에 중국에서도 난리에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팬 미팅하겠다는 얘기에 다들 비행기 표 끊는다고…….”
“많이 왔어요?”
“한 2천 명 정도?”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눈이 동그래지는데, 샤오린이 다시 한 번 웃고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뒤쪽에 서 있던 소녀를 앞으로 내세우면서.
“이해하세요. 원래는 미스 조가 할 일이지만, 지금 뉴욕에 있으니 제가 나설 수밖에 없네요. 소개할게요. 여긴…….”
“…….”
“도준 씨 한국 팬클럽 회장인 강나리 양.”
이제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처럼 유창하게 말하는 샤오린의 음성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왜?
너무 놀라서.
그러니까……. 저 소녀가 팬클럽 회장?
“아, 아, 안녕하세…요. 가…가…강나리예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몸은 손만 대도 넘어갈 것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고.
낯빛이 하얗게 질려서 날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강나리의 모습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 그동안 팬클럽 회장이 직접 나서질 않는 걸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이제껏 익명으로 활동을 해서, 저희도 몰랐어요. 도준 씨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팬클럽 결성해서 이제껏 운영해온 게 설마 14살짜리 소녀라고는.”
샤오린의 설명에 난 다시 한 번 황당하단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러곤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뎌 강나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진심을 담아서.
“고마워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날 올려다보는 작은 소녀. 강나리의 두 눈이 더없이 커졌다가 이내 물기가 차오른다.
이러다간 애꿎은 소녀 한 명 울리겠다 싶어서 얼른 농담을 던졌다.
“아, 일찍 좀 보여주지. 궁금해서 혼났잖아요.”
“그, 그…….”
“근데, 가만. 2년 전에 팬클럽 만드셨으면……. 그때 초등학생이었단 건데. 와! 진짜 고마워요!”
분위기상 농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진심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땐 그랬다.
지금처럼 팬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주목을 받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내 노래를 듣고 좋아해 주고, 또 팬클럽……. 정확히는 팬카페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거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팬 카페 운영도 잘해왔다.
그 탓에 난 당연히 난 팬클럽 회장의 나이가 샤오린정도는 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앞으론 자주 만나요. 공식 행사엔 빠지지 말고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저 생각보다 쫄보거든요. 콘서트든 뭐든 사람들 앞에 서면 얼마나 쪼는데요. 그러니까 강나리 회장님이 와서 응원해줘요. 부탁할게요.”
그제야 긴장이 풀어졌는지, 해맑게 웃더니 어딘지 모르게 결연한 눈빛을 해 보이는 강나리였다.
그 작은 손이 단단히 움켜진 채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었다.
“우리 이제 나갈까요?”
“……예.”
아닌게아니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지금 나가지 않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거 같아서였다.
“가죠. 팬들한테도 인사해야죠.”
난 강나리의 어깨를 살짝 감싸 쥐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