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196. 서프라이즈 (2)
헐! 다른 곳도 아니고 아메리칸 갓 탤런트의 심사위원이라니!
우리나라에선 젊은 층들만 겨우 알 뿐, 나이 드신 분들은 그다지 잘 모르는 프로그램이다.
반면 빌보드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고.
어지간한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하지만, 미국에선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빌보드를 알고는 있어도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갖진 않는다.
우리가 늘 음원 사이트를 주시하지 않고 있는 거랑 같은 이치다.
그에 비해 올해로 13시즌을 맞이한 아메리칸 갓 탤런트는 이미 안방극장의 주역으로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 한마디로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프로그램이란 얘기다.
뿐만 아니라 매 시즌, 매 회마다 관심도 대단했고.
인지도 면에선 빌보드하곤 상대가 안 된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지난번 오프라 완다쇼에 나간 것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이몬이 절 안대요? 왜 저를……. 내가 아직 19살밖에 안 됐다는 건 알고는 있는 건가?
- 아마 알걸? 그 정도는 확인하고 연락했겠지.
“그럼 더 이상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심사위원이라니. 출연진이라면 또 몰라도…….”
- 거기까진 나도 잘 몰라. 아직 완전히 얘기가 끝난 게 아니라니까. 기다려봐. 곧 마루한테 연락이 갈 거야
“알겠어요.”
- 그래.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회사에서 연락 주겠냐? 하암. 난 피곤해서 좀 자야겠다.
끊겨버린 전화.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툭.
아우, 깜짝이야!
등을 치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폴짝 뛰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희주가 풉하고 웃는다.
머리엔 모자를 눌러쓰고 스카프인지 머플러인지는 몰라도 옷깃을 여미다 못해 입까지 가리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 상태로 한참을 웃고 있었다.
“그만 좀 웃어.”
“그치만 웃긴 걸.”
“나 참, 뭐가 그렇게…….”
“처음이니까. 네가 그런 모습 보인 건.”
“응?”
편의점에서 캔커피 두 개를 사서 각각 하나씩 들고 공원을 한가로이 거닐며 묻자, 희주가 아련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예전에도 멋있긴 했지만…….”
어우, 어쩐다냐. 저놈의 콩깍지를.
그래도 기분은 좋네.
멋있다고 해주니까.
“그땐 좀……. 뭐랄까, 딱딱했다고나 할까? 솔직히 차갑다는 느낌도 있었어. 덕분에 날벌레……. 아니, 다른 여자애들이 함부로 꼬이지……. 아이 참, 오늘 왜 이러지. 아무튼, 자체 방어가 되었으니까 나로선 좋았지만. 히힛.”
하이고, 웬 망상이 이렇게 심한지.
난 걸음을 멈추곤 그녀를 근처 벤치에 앉혔다.
그러곤 말했다.
“어지간하면 들어주겠는데,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나 학교 다닐 때 진짜 인기 없었거든. 초콜릿도 네가 주는 게 다였고. 어쩌다 받은 것들도 우정 초콜렛? 뭐 그런 것들뿐이었다니까.”
내 말에 희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더니 날 향해 눈을 빛내며 얘기했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나 빼곤 다 우정이야. 알았지?”
“글쎄다. 그건 생각 좀 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벌떡 일어나는 희주.
아, 얜 또 왜 이래?
설마 농담 한 번 한 거 가지고 삐친 거야?
하지만, 착각이었다.
“우리 사진 찍자!”
희주가 눈을 반짝거리며 하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려보니 풍광이 제법 멋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가 불빛으로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공원에 즐비하게 서 있는 나무들로 인해 꽤 멋스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핸드폰 줘봐. 내가 찍을게.”
“응.”
그녀가 내게 자신의 핸드폰을 주고 내 옆으로 가까이 왔다.
하지만, 뭔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일정 거리를 두고 더 이상 오지 않는다.
피식.
난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동시에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쌌다.
“어머!”
그녀가 놀라는 순간 팔에 힘을 주곤 잡아당겼다.
나랑 바짝 붙게 된 희주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얼굴이 불그스레해졌을 때, 셔터를 눌렀다.
찰칵!
촬영음이 들리고, 핸드폰 속에 거의 껴안은 듯 붙어 있는 우리 모습이 찍혔다.
나도 모르게 용기를 낸 거였지만, 잘한 일이다 싶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지, 희주와 날 가로막고 있던 벽이 허물어지자 이젠 스스럼없이 그녀와 난 가깝게 붙어 다녔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보아 손을 잡으려 하는데…….
아우, 씨! 이게 뭐 별거라고.
더럽게 떨리네.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가 거두며 망설이길 몇 번인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희주는 다른 곳을 보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든가,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쉴 새 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귀엔 하나도 들리질 않는다.
아까처럼 눈 딱 감고 잡으면 될 건데…….
엉겁결에 반쯤 장난으로 껴안은 거랑은 달리 자꾸만 의식해서 그런가, 그게 좀처럼 되질 않는다.
하아, 내가 지금 뭐하는 건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덥석.
응?
희주가 내 손을 잡고 있다.
그러곤 날 바라보는데…….
두근.
가슴이 뛰어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다.
게다가 목은 또 얼마나 마르는지, 마른침이 자꾸 넘어가 그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봐 어찌나 걱정…….
꼬옥.
그런 내 맘을 읽기라도 한 건지, 희주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두 볼을 붉힌다.
그러면서도 내 눈을 피하지 않는 그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파…….”
“미안.”
“괘…괜찮아.”
“큼, 우리 좀 걸을까?”
부끄러운지 고개만 끄덕이는 그녀를 이끌고 벤치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목적은 없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놀이동산? 연극?
안 가길 잘했다.
아마 거울에 비춰보면 지금쯤 내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을 터였다.
응?
근데, 웬 반창고가…….
“손은 왜 이래? 다쳤어?”
“……아니, 그 정돈 아니고 조금 데였어.”
“어쩌다가 그랬어?”
“그, 그냥……. 뭐 좀 만들다 보니까.”
“조심 좀 하지.”
난 그녀의 손을 들어 호하고 불어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아까보다 한층 더 빛난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일까?
***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모른 채 공원만 몇 바퀴를 돈 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멈출 리가 없잖아.
어느새 밤 10시.
슬슬 보내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곤 물었다.
“안 늦었어?”
“아직은.”
“집에서 뭐라 안 해?”
“너 만나고 온다고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래도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는 거만 해도 어딘가.
우리 아버지처럼 눈 오는 날 대문 밖에서 무릎 꿇고 있을 생각을 하면…….
아이고, 아버지.
진짜 존경스럽네요.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고.
당시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셨을지.
“데려다 줄까?”
고개를 내젓는 희주.
“전화하면 데리러 오신댔어.”
“응? 누가?”
“최씨 아저……. 운전해주시는 분 계셔.”
“그래.”
기분이 묘해졌다.
공원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보이긴 했지만, 낮처럼 바글거리는 것도 아니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분위기가 기묘해졌다.
아니면 지금 내 마음속에서…….
꿀꺽.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와 날 바라보는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머플러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 입술을 보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아, 안 되겠다!
난 그녀의 손을 놓고는 기지개를 켜며 소리쳤다.
“아, 더워라! 춥다고 해서 너무 껴입었나? 뉴욕보다 여기가 덥구나!”
어색해.
어색해.
그리고 괜히 쪽팔린다.
그때, 뒤쪽에서 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희주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너, 외투도 안 입었잖아.”
“응? 그,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러네.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
그녀를 데리러 온 리무진에 타기 전, 희주가 날 가만히 불렀다.
“도준아.”
“응.”
“고마워.”
“뭐가?”
“그냥 다.”
“참네. 그런 게 어딨어?”
옅게 웃어 보이자, 그녀가 내게 뭔가를 내민다.
받고 보니…….
에코 백 안에는 큼지막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거 혹시?”
“혼자만 먹어. 알았지?”
그 말만 하곤 차 안으로 쏙 들어가는 희주. 그녀가 날 향해 손을 흔들고 나 역시 손을 흔들어 주었을 때 차가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다가 막 돌아섰을 때였다.
어?
그러보니…….
아까 희주의 손에 붙어 있던 반창고가 떠올랐다.
***
책상 위에 올려놓은 케익을 바라보다 보니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뭘 이런 걸 만들어.
그냥 사면 될걸.
함께 동봉되어 있던 카드를 펼쳤다.
- 늘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내년엔 꼭 사탕 줄게.
쯧, 화이트데이가 사탕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 좋네. 이런 기분이구나.
“헤헤헤.”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미안해졌다.
늘 옆에 있어주긴 개뿔.
요 몇 년 동안엔 한 달에 한 번도 보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이러다간 진짜 얼굴 까먹게 생겼구만.
그때였다.
까똑.
- 지금 도착. 너도 잘 들어갔지?
흐뭇한 표정으로 까똑을 보다가 답톡을 띄웠다.
--- 나야 집이 코앞인데, 뭐. 가는 동안 별일 없었지?
- 응.
--- 다행이네.
- 오늘 즐거웠어.
--- 어쩌냐? 밥도 한 끼 못 먹고. 다음엔 우리 꼭 좋은데 가서 밥 먹자.
- 기대해도 돼?
--- 뭐든 말만 해. 서울 타워라도 확 전세 내버릴라니까.
- 핏. 겨우?
--- 에이, 모르겠다. 그럼 파리라도 갈까? 전세기 빌려서 가면 금방 다녀올 거야.
- 됐네요. 나 이제 외박 안 되거든요?
--- 친구하고 간다고 하고 가면 되잖아.
- 우리 할아버지, 만만한 분 아니시거든?
그렇기도 하겠다.
한번이야 어찌저찌 통했다고 하지만, 두 번은 힘들겠지.
약혼이라도 한다면 또 모를까.
- 여행은 됐고, 올 거지?
--- 뭐를?
- 이러기야?
삐친 모습의 이모티콘이 화면에 뜬다.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답톡을 보냈다.
--- 이번에도 메탈로 할까?
잠시 아무런 답이 없다가 우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떴다.
- 난 좋은데, 글쎄 친구들은 어떨지.
--- 흐흐흐. 내가 끝내주는 곡으로 준비해주지.
- 응. 기대하고 있을게.
서로 잘자란 얘기를 하곤 끊었다.
요 얘기만 하는데 한 5분은 걸린 거 같다.
그런데도 전혀 지겹거나 짜증 나지 않는다.
거참 이상하네.
예전 같으면 이러고 있는 거 자체가 짜증 나고 답답해서 당장 전화부터 했…….
까똑!
아, 깜짝이야.
뭔 말을 못해.
다시금 날아든 까똑.
앱을 열어보자, 희주가 날린 톡이 보인다.
- 다음엔 뽀뽀해도 돼.
“……!”
이건 또 무슨…….
벙쩌 있는데, 다시금 날아든다.
- 칫,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헐,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피식.
그래도 좋네.
설레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