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192. 한 걸음 더(1)
시각이 늦은 터라 택시를 탔다.
“어서 옵…….”
밝은 톤으로 활달하게 날 맞이하던 택시 운전사가 화들짝 놀란다.
중년의 아저씨인데도 날 알아본 모양이다.
“어…어……. 김도준!”
급기야 놀라서 외치는 아저씨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아저씬 계면쩍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인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고, 잘생긴데다가 노래도 잘하시는 분이 성격도 좋으시지. 좋습니다! 제가 가시는 곳까지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성북동 가주세요.”
다리를 건너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부르시는 걸까?
의아하긴 했지만, 딱히 긴장되진 않는다.
뭐, 해봐야 또 사업 얘기일 게 뻔하니까.
그렇게 한참을 달려 성북동에 도착했다.
“아이고! 돈은 됐습니다! 월드스타를 태우는 일이 보통 일인가요? 아마 제 딸내미한테 얘기하면 부러워 죽을 겁니다.”
“그래도 그럴 순 없죠. 여기 돈 받으시고….”
“아뇨, 아뇨. 진짜 괜찮습니다. 대신…….”
“……?”
“사진……. 그냥 사인이나 한 장 해주십시오. 그러면 딸이 몹시 좋아할 거 같네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진부터 찍죠.”
“저, 정말입니까?”
“에이, 사진 찍는 게 뭐 대수라고요.”
택시 운전사 아저씨와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주었다.
“따님 이름이…….”
“호순이요.”
“이름 참 귀엽네요.”
“그렇죠? 얼굴도 얼마나 예쁜데요.”
사진을 보여주는데……. 흠, 우리나라 아빠들은 다 딸 바보인가 보다.
“자, 여기 있습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갔다는 호순이를 위해 사인까지 해주곤, 억지로 아저씨의 손에 돈을 쥐여준 후 차에서 내렸다.
하아, 이젠 진짜 함부로 못 돌아다니겠는데?
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네.
좋긴 좋은데, 좀 불편하긴 하네.
택시가 배기음을 울리며 사라지는 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희주네 집 대문이 오늘도 큼지막한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 회장님이 손수 나와 나를 맞아주신다.
어째 지난번보다 더 살갑게 대하시는 느낌이었다.
희주는 여전히 환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가족들 틈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고.
하지만, 정 회장님은 따로 나랑 할 얘기가 있는지 희주네 가족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서재로 날 이끌었다.
“앉게.”
“예.”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자, 정 회장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들었네. 광고 잘 찍었다고.”
“제가 찍나요? 전 그냥 피사체일 뿐이죠, 피사체.”
뭐가 그리 재밌는 걸까. 정 회장님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날 바라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농담까지 던지셨다.
“그런 피사체라면 나라도 찍고 싶을 걸세. 감독도 그리 말하더군. 이번 광고도 파장이 클 거라고. 그게 아니라도 자네 덕에 N10의 판매량이 수직상승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하네만.”
“에이, 그게 제 덕인가요? 핸드폰이 좋아서 그런 거죠. 써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래서 S 전자, S 전자 하는구나…하고요.”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군.”
나 입에 침 바르고 들어왔던가?
어째 아부성 발언이 술술 잘만 나온다.
원래도 넉살이 좋은 편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더 잘 나오는 거 같다.
그 후로도 따지고 보면 시답지 않은 얘기들이 오갔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다고 생각진 않는다.
이런 얘기들이 모여서 관계가 형성되고 깊어가는 법이니까.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정 회장님이 나에 대해서 묻고 또 내가 대답하는 식으로 얘기를 나눈 끝에 본론이 튀어나왔다.
좀 전보다 사뭇 진지해진 음성으로 정 회장님이 물어오셨다.
“최 회장, 건강이 많이 안 좋은가?”
어?
어떻게 안 거지?
S 그룹 정보력이 거의 국정원 수준이라고 하더니만…….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대답했다.
“예전 같진 않으신 거 같더라고요.”
“그렇겠지. 우리 나이쯤 되면 누구나 아픈 곳 한두 군데는 있는 법이니까.”
나도 모르게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을 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
“언제 한번 밥이나 먹음세. 가족들끼리 다 함께.”
“예?”
무슨 뜻인지 몰라 쳐다보자, 정 회장님이 씨익 웃으신다.
“희주, 내년이면 고등학교 졸업하네. 언제는 유학 보내달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어느 날인가부터는 싫다고 하더군. 왜겠나?”
“그야 저도…….”
“잔말 말고, 날 잡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놀라서 되물었다.
“날이요?”
“양가 가족들끼리 밥 한 끼 먹으며, 간단히 식 올리잔 말일세.”
“어, 어……. 그건…….”
말문이 콱 막혔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지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머릿속이 멍해진다.
그런 내게 정 회장님이 다시 얘기했다.
“혹시 알고 있나?”
“뭐를 말씀이신가요?”
“희주 몫으로 주어진 S그룹 지분.”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여기서 그런 얘기가 왜 나와?
돈자랑 하고 싶으신 건가?
쯧, 그럼 번지수 잘못 짚으셨네요.
“저도 돈 많은데요?”
“그래, 많겠지. 그래도 들어보게. 희주가 가진 지분을 시가로 환산하면 아마 한 1조쯤 될 걸세? 조금 많지?”
헉!
1조란다.
1억도 적은 돈이 아닌데, 조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셈이었네.
그렇긴 한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래서 그 얘긴 왜 하시는 거죠? 솔직히 좀 그러네요. 설마 제가 그 돈 보고 희주 만난다고 생각하시는…….”
“바로 그거네.”
“……?”
“자네처럼 오로지 희주 하나만 봐줄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나? 아니, 있기는 할까?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너무 손녀딸만 싸고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돈이란 게 그러네. 착하고 성실하던 사람을 한순간에 타락시키는 데 그만한 것도 없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나?”
알긴 알겠다만…….
그렇다고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이런 일을 나 혼자 결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내가 과연 희주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으니까.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네.”
그렇지.
그렇게 나오셔야 내가 좀 생각할 여유를…….
“내일까지 답을 주게.”
아씨! 진짜 길게도 주시네.
“내가 너무한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이해하게. 손녀딸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그런 거라고. 그리고 그동안 살아보니 말이야…….”
“…….”
“자네처럼 잘난 놈들은 침만 흘리고 있다가는 뺏기기 십상이지. 잠깐이라도 한눈판다 싶으면 사이 언 놈이 낚아채가도 채가더란 말이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고.
내일까지 답을 주겠다고 얘기했다.
***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오는 내내 정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손녀딸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그런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고.
백번 이해한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그러시니까.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렇긴 한데…….
부담 90%에 두려움 120%다.
거기에 설렘도 살짝 얹혀져 있었지만…….
아직 나 스무 살도 안 됐는데.
희주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고도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아직 우리가 그렇게 깊은 관계도 아닐뿐더러, 앞으로 살아갈 날이 새털같이 많은데, 과연 두 사람 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지?
솔직히 다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다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그나마 정 회장님쯤 되니까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였다.
왜냐하면…….
약혼이든 결혼이든, 한다면 내가 직접 희주한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은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노인이 내준 숙제, 즉 그릇과 소리에 대한 문제도 해결 못 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하룻밤을 고만한 뒤 정 회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 기다리고 있었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였기에 곧바로 결심한 바를 말씀 드렸다.
“생각해봤습니다만, 역시 지금은 아니란 생각이 드네요.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만큼 절 아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겠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최대한 빨리해치우고 찾아뵙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갑자기 핸드폰을 통해 들려왔다.
시원하다 못해서 호쾌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가.
잠시 후, 얼마간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그치고,
- 그럴 거라고 생각했네. 아, 그렇다고 그냥 해본 말은 아닐세. 자네가 받아들였다면 더없이 기분이 좋았을 거네. 그렇긴 하지만……. 설마하니 내 제안을 그렇게 거절하다니.
그렇겠지.
천하의 S 그룹이 아닌가.
그 그룹의 오너가 직접 제안한 일이다.
그것도 혈연지연으로 얽히고설킨 이놈의 대한민국에서.
만약 내가 오케이 했더라면 더없이 막강한 뒷배가 돼 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뭐, 나로서야 아쉬울 게 없으니 그런 것도 있지만.
돈은 나도 벌만큼 벌고 있고, 어차피 희주랑은 지금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때, 수화기 너머에선…….
- 그런데 참 희한해, 그런 모습을 보니 더 마음에 드니 말일세. 허허 참! 내 생전 누굴 이렇게까지 부러워해 보긴 처음인 거 같군.
“예?”
- 아닐세. 자네 뜻은 알겠네. 하지만…….
“…….”
- 만일, 희주를 울리기라도 하면,
하면?
왠지 무시무시한 말이 나올 것 같…….
- 내 손에 죽을 줄 알게.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거 같아서였다.
“예쁘게 만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부르르르.
진동하는 핸드폰을 보곤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이 타이밍에 걸려온 전
공교롭다면 공교로운데…….
“예. 할아버지.”
- ……대체 무슨 짓을 한 게냐?
“예?”
- 아, 어제 뭔 일이 있었기에, 정 회장이 전화를 걸어와서 나한테 배가 아프다고 그러냐 말이다.
참네, 그 정도 나이쯤 되면 원래 그러신 건가?
나랑 끊고서 바로 외할아버지께 전화를 하셨다는 건데.
이런 면에선 생각보다 입이 가벼우신…….
그때, 외할아버지께서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셨다.
- 이놈아.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뭔지 아느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 능청스러운 놈 같으니라고. 쯧, 대체 누굴 닮았는지.
“그야 할아버질 닮았죠.”
- 흐흐흐. 맞다. 넌 날 쏙 빼닮았지. 아암, 넌 내 손자지. 천금을 줘도 바꾸고 싶지 않은 보물이지.
컥! 잘나가시다가 마지막에…….
아우, 손발 오그라들어라.
아무튼, 좋아하시니 됐네.
그동안 영 웃질 않으시더니, 이렇게라도 웃으시는 걸 보니 내가 다 흐뭇해진다.
- 아무튼, 요즘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끊으마.
여지없이 단칼에 전화를 끊으시는 외할아버지셨다.
끊겨버린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간만에 석준이를 만나서 그동안 못 나눴던 얘기도 실컷 나누고, 준영이 형과도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소주를 들이붓다시피한 형이 만취해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그 외의 시간은 희주와 함께 보냈다.
그러는 사이 며칠이 지나고, 출국 날이 다가왔다.
아직 광고 찍을 것도 좀 남았고 희주 생일 때문에라도 3월이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나오긴 해야 할 테지만, 우선은 뉴욕으로 돌아갔다 올 필요가 있어서였다.
4월에 있을 코첼라 페스티벌도 준비해 놔야 하고, 한편으로는 뉴욕 오케스트라 공연에도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뭐 빠진 거 없지?”
고 팀장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곤 시선을 돌려 희주를 바라보았다.
뒤쪽에는 형 내외가 날 보고 있었지만, 그쪽이야 그저 손 한번 흔들어주면 그만이었고.
여기까지 배웅을 나와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러곤 말했다.
“금방 다시 올게.”
“응.”
“도착하면 톡! 오케이?”
“으…응.”
“그럼 나 간다?”
“으……응.”
나처럼 웃고 있지만, 어느새 눈가가 살짝 발갛게 변한 그녀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공항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TV들 중 한 대에서 광고 한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헉!
하필이면…….
잔뜩 분위기 잡고 돌아섰건만.
- 오늘부터 김도준이 남친이 된다면?
컥, 싼티 작렬하는 카피가 전면에 떠오르며 광고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