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 꼭 그래야 하나? (4)
덜컥덜컥한다.
삼촌이 날 안고 격하게 흔들 때마다.
“예. 오랜만에 봬요, 삼촌.”
말과는 달리 몸이 잔뜩 굳어 있어서.
그러다가 내 어깨를 잡고 떼어낸 삼촌이 내가 미처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한쪽 팔을 어깨에 둘렀다.
그러곤 목이라도 조를 듯 정답게 끌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심히 어색하다.
삼촌, 우리 사이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못 잡아먹어 안달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놔! 이러니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잖아.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외할아버지께서 움직이셨다는 걸 눈치채진 모양이다.
물론 지분에 대한 건 모르겠지만.
이 실장님이 일 하나는 철두철미하게 하시는 분이거든.
아마 낌새는 채셨어도 정확한 내용은 모를 거다.
그저 떠보는 게 아닐까 싶다.
아니면,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한 사전 포섭? 그 정도쯤 되겠지.
어느 쪽이 되었든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아이고, 우리 삼촌 진짜 얄팍하시네.
내가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하니 저러시는 걸 테지.
이 정도쯤 하면 그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던 우리 관계가 봄날 살얼음 녹듯 싸악 사라질 거라 여기시는 건가?
근데, 어쩌나?
우리 사이에 놓인 강은 통째로 꽝꽝 얼어붙어 있는 상탠데.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주 좀 놀러 오지, 이게 뭐냐? 조카 얼굴 한번 보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내가 너 온다는 소식에 중요한 미팅도 취소하고 달려왔다는 거 아니냐!”
예, 예. 생색 팍팍 내시고요.
그렇게 조카를 애지중지하시는 분이 왜 우리 형님한테는 전화 한 번 안 하실까 모르겠네요.
곧 있으면 집안의 첫 아이가 태어날 마당에.
난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코 뚫린 소마냥 삼촌의 팔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고 거실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이 모조리 내게 쏠리는 순간, 작은 외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지시는 작은 외삼촌.
큰 외삼촌이랑 함께 들어온 게 뜻밖이셨던 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작은 외삼촌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오르는 게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작은 변화였지만, 명백했다.
비웃음.
조소를 베어 물고 날 바라보다가 작은 외삼촌이 손을 치켜든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대하듯.
“영어! 도준이 왔구나!”
“예. 삼촌.”
“크크큭. 삼촌이 뭐냐? 삼촌이. 그냥 예전처럼 작은 아빠라고 불러라. 아, 근데 이번에 발표한 노래들 다 좋더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흥얼흥얼거리시는데, 내가 이번에 발표한 노래 중 지난주부터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 있는 곡이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들으셨나 보네?
1:0 !
큰 외삼촌한텐 죄송하지만, 이번 대결은 작은 외삼촌이 가져가셨네요.
속으로 웃고 있을 때였다.
2층의 방문이 열리며 외할아버지께서 모습을 드러내셨다.
“웬 소란이냐? 쯧쯧, 잘들 하는 짓이다. 꼬맹이 하나 왔다고 난리법석들을 떨고.”
에이, 저도 이제 나이가 몇인데 꼬맹이라뇨.
마음 같아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외갓집 식구들이 다 모여서 쳐다보는 중이다.
당연하겠지만, 말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건강하셨죠, 할아버지?”
“허이고, 일찍도 묻는다. 에미야, 밥 차리거라, 시장하다.”
그 말씀에 다들 눈빛이 달라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려온다.
그동안 대체 얼마나 못 드신 거냐고.
설마 돈이 없어서 그러신 건 아니실 테고, 그렇다고 큰 어머님이 허투루 집안일을 하셨을 리도 없으니…….
진짜 입맛이 없으셨다는 거겠지.
젠장! 난 할아버지한테 어리광부릴 자격도 없는 손자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끈 씹고 있을 때, 계단을 내려오신 외할아버지가 스쳐 가며 한 말씀 툭 던지신다.
“식전부터 인상 찡그리면 오던 복도 도로 나간다, 이놈아.”
단둘이 있을 때처럼 지지 않고 장난스럽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른 식구들 눈치가 보여 그런 탓도 있었지만, 것보다는 그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안 좋았던 탓이 더 컸다.
“냄새 좋구나. 어서들 와서 들자꾸나.”
진짜였다.
큰어머니가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닭 칼국수를 끓이신 건지,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
***
아무리 큰삼촌이 날 대하는 태도가 변하셨다곤 해도 식사 후, 거실에 가족들이 한데 모여 오순도순 TV를 보면서 그동안 밀린 수다를 떠는 일 따윈 벌어지지 않았다.
난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외할아버지께 이끌려 방으로 들어와 있는 중이었다.
“대추차가 맛있네요.”
“왜? 좀 싸주랴?”
“에이, 저도 돈 있어요. 모르시나 본데, 어제 어떤 분께서 엄청난 돈을 덥석 안기시는 바람에 저 완전 부자 됐거든요. 뭣하면 기념으로다가 옷이라도 한 벌 해 드릴까요?”
코웃음을 치시는 외할아버지.
“나 죽기 전엔 방심하지 마라, 이놈아.”
크큭. 주긴 줬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도로 가져가실 수도 있다는 어필이시겠지.
근데 어쩌나.
그러든지 말든지, 전 진짜 상관없거든요.
“그럼 그전에 명동에 가서 전부 현금으로 바꿔버려야겠네요. 그리고 그 돈으로 목 좋은 곳에 빌딩이나 한 채 사야겠다.”
“이놈이!”
확실히 변하셨다.
예전에 비해서 감정표현이 풍부해지셨달까.
좋은 말로 해서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예민해지시고 또 감성적이 되셨다는 얘기기도 하니 마음이 마냥 좋을 순 없었다.
“당연히 농담이죠. 그걸 어떻게 팔아요. 할아버지 피땀이 밴 건데.”
“알면 장난으로라도 그딴 소리 하지 말아라. 이 할애비 쓰러지는 꼴 보기 싫으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이제까지와 달리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뭐하러 주셨어요? 내 마음대로 하지도 못할 걸.”
“매년 배당만 받아도 한평생 놀고먹는 데 지장이 없을 거다.”
“음, 그건 또 생각을 못했네요.”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겠지. 내가 왜 그걸 너한테 줬는지 생각하면서 머리 굴리느라 바빠서. 아니더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을 뿐.
그때, 외할아버지께서 날 부르셨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도준아.”
난 이제 막 입에 닿은 찻잔을 그대로 내려놓고는 대답했다.
“예.”
그 순간 외할아버지께서 나직한 한숨을 내쉬셨다.
그 한숨이 어찌나 무거운지, 내 마음이 다 무거워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혹시 서운하냐?”
“뭐가요?”
“그것밖에 주질 않아서 서운하냐고 묻는 게다.”
“…….”
서운한 게 아니라 부담스럽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하나, 아니 입에 올려도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는 걸 달리 오해하신 건지 외할아버진 툴툴거리셨다.
“그러게 준다고 할 때 받는다고 할 것이지. 쯧,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어떠냐? 노래 그만하고 회사 일 한번 해볼 테냐?”
주긴 뭘 주신다고.
저, 이런 큰 회사 움직일 만큼 배포가 크지도 않고 또 능력도 없다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 노래가 좋아요. 할아버지.”
“……알겠다.”
꼭 저러신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아시면서, 한 번씩 떠보시기는…….
하아, 그렇게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힘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시면 제가 또 마음이 약해지잖아요.
그럼에도,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됐다, 이놈아. 바라지도 않았다.”
“…….”
“그래서, 어쩔 테냐? 마음의 결정은 내렸더냐?”
“아 진짜! 주신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말씀이세요. 저한테도 생각이란 걸 할 시간은 주셔야 하잖아요.”
“흥! 내 모를 줄 아느냐? 이미 알건 다 아는 놈이 생각은 무슨…….”
“그래도요. 이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그룹의 운명이 걸린…….”
“운명은 개뿔. 언 놈이 맡던 회사가 어디 가더냐?”
“그러니까 더 문제죠. 어느 쪽으로 기울던 주주들이 가만있을 거 같지도 않고.”
“긴말 할 것 없다. 한 달 뒤에 주총 있으니까, 그때까지 결정하거라.”
응?
주총?
난 놀라서 외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을 거다.
말씀대로라면, 진짜 자리에서 내려오실 생각을 하시는 거 같은데…….
그렇다는 건,
“대, 대체……. 얼마나 편찮으신 거에요?”
“이상한 생각 할 건 없고.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라.”
난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근데, 할아버지.”
“말해라.”
“꼭 이래야 할까요?”
“뭐가 말이냐?”
“그냥 두 분이 사이좋게…….”
“사이좋게 뭐? 이놈아, 회사가 여럿으로 나뉘어 있으니까 진짜 여러 개인 거 같지? 한데, 이걸 알아야 한다. 그룹이란 건 몸체 하나에 팔다리가 여러 개 달린 거나 마찬가지다.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갈 때마다 덩치가 주는 건 물론이고, 그 몸체마저 위태롭게 되는 건 말할 필요가 없지. 그렇다고 주력인 음료를 나눠 가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슨 말인지 아느냐?”
알죠. 아니까, 고민되는 거고.
아우 씨. 그러니까, 왜 저한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시는 거냐고요.
“그래도 꼭 그래야 하나요? 남도 아니고 형제인데…….”
“그러니까, 더 빡세게 싸워야지.”
“그러다가 엄한 놈한테 다 빼앗길 수도 있어요.”
“그럼 하는 수 없는 거지. 그놈들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건데. 하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회사가 반 토막 나는 건 절대 못 본다.”
“어련하시려고요.”
“흐흐흐. 네놈도 이제 발 뻗고 자긴 글렀다, 이놈아. 어디 삼촌들 등쌀에 달달 볶여봐라. 그때쯤엔 후회막급일 거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 테지.”
“와, 지금 손자 협박하는 거에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튼, 난 할 말 다 했다. 그만 가봐라.”
표정도 싹 바뀌시며 축객령을 내리시는 외할아버지.
저 얼굴은 진짜로 하실 말씀 다 하셨다는 건데…….
아이고, 이젠 나도 모르겠다.
이놈의 집구석, 아니 회사가 엎어지든 공중분해가 되든 신경 끄자. 아, 신경 끄는 건 안 되겠고 얼른 한쪽에 몰아주고 빨리 손 털어야지. 이래서야 삼촌들보다 내가 먼저 죽을 판이다. 신경쇠약으로.
“할아버지, 다 좋은데 제발 건강 좀 챙기세요. 그래야 나중에 제 아이도 맡길 거 아녜요?”
“응?”
눈을 치뜨고 날 올려다보던 외할아버진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소리치셨다.
“이놈이! 다 늙은 할애비한테 애를 맡길 참이더냐?”
“아, 그럼 누구한테 맡겨요! 저 365일 안 바쁜 날이 없는데. 당장만 봐도 내일모레부턴 월드 투어 떠나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벌여놓은 일들이 많아서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없고……. 믿을 사람은 할아버지밖에 없는데.”
날 가만히 쳐다보시던 외할아버지께서 픽하고 웃으신다.
그러고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으시는 게 내 말이 퍽이나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낳아오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해라. 내 고 녀석 시집 갈 때까진 안 죽을라니까.”
자꾸 죽네 마네 하시기는.
그건 그렇고…….
“시집이라뇨. 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딸이다. 첫 애는.”
“그래요. 딸. 한 5년만 기다리세요. 예쁜 공주님으로 떡하니 안겨 드릴 테니까.”
“오, 오…년? 이 망할 놈이!”
“저 갈게요.”
얼른 일어섰다.
그러곤 돌아서며 웃었다.
그러니까, 제발 약해지시지 말고 그때까지만 건강하시라고요.
마지막 말은 가슴속에만 남겨놓았다.
***
여전히 바뀌지 않고, 날 살갑게 대하시는 큰 외삼촌의 태도가 부담스러웠기에 얼른 외갓집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나왔어.”
- 할아버진 어떠셔? 저번에도 너 걱정했었잖아.
“후우. 좀 쇠약해지신 건 같은데……. 버티실 만은 하신가 봐. 나한테 버럭버럭 소리 지르시는 거 보면.”
수화기 저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쩔래? 지금 시각이 좀 늦긴 했는데……. 우리 볼까? 나올래?”
- 아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 부담 갖지 말고. 안되면 내일 보면 되지, 뭐.”
- 그게 아니라…….
뭐지?
뭔가 쎄한데?
눈을 치켜떴을 때였다.
희주가 제대로 한 방 날려준다.
- 할아버지께서 너보고 오래.
“누구? 정 회장님?”
- 으…응. 와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시는데?
난 기가 막혀서 혀를 차다가 대답했다.
뭔 얘기를 하시려고 이 시간에 부르시는지는 몰라도…….
“나 아직 민증 안 나왔다고 말씀드려줄래? 아, 가긴 가겠다고 전해 드리고.”
- ……미안. 오늘 힘들었을 텐데.
“에이, 네가 왜 미안해? 이것도 일이라면 일인데……. 그게 아니라도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겠지.”
농담이 아니다.
세계 굴지의 대재벌인 정 회장님이 아무 까닭 없이 부르셨을 리는 없고.
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해서라도 가봐야겠지.
난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은 어두웠다.
먹구름인지 스모그인지, 서울 하늘 어디에도 달은 보이지 않았다.
아, 아직 뜰 시간이 아닌가?
아무튼, 오늘따라 날 찾는 사람이 많기도 하지.
그래, 간만에 서울 왔는데 처리할 거 있으면 몽땅 처리하고 가자.
그래야 가뿐한 마음으로 월드 투어를 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