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190. 꼭 그래야 하나? (3)
검진차 병원을 간다는 형 내외를 배웅하곤 회사에 들려 고 팀장님과 함께 촬영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운전 중이시던 고 팀장님이 물어오셨다.
“어째 피곤해 보인다. 어제 친구들이라도 만난 거냐?”
“아뇨. 좀 생각할 게 있다 보니, 늦게 잠들어서 그래요.”
굳이 이 실장님을 만난 것까진 얘기할 필요가 없겠지.
문제는…….
후우, 고 팀장님 덕분에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는 거다.
어쩐다?
난 어제 이 실장님이 내게 건네준 서류를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지분 7%.
생각지도 못했을 만큼 엄청난 양.
정확히는 몰라도 이 정도면 대주주 정도가 아니라 경영권자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도 남을 테지.
이게 뜻하는 바는 오직 하나.
그룹의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려는 걸 테지.
이 정도의 일을 처리하는데 이 실장님이 독단적으로 움직였을 리는 없다.
한마디로 외할아버지의 뜻이란 얘기다.
어쩔까?
아버지와 상의를 해봐야 하나?
아니면 그전에 할아버지부터 만나볼까?
어차피 지금쯤이면, 아니 어제부터 내가 서울에 왔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조금 망설이긴 했어도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뜻밖에 머리가 차가워지고 살짝 두근거리던 가슴도 주저앉았다.
대신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따스해졌다.
- 웬일이냐?
참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받으시는 거 봐라.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얘기했다.
“에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요? 어젯밤에 서울 왔거든요. 주무실 거 같아서 지금 연락드리는 거에요. 근데, 식사는 하셨어요?”
- 시간이 몇 신데, 밥 타령이냐? 설마 식전인 거냐? 네 애미가 밥 안 차려주더냐?
“아, 어머닌 지금 집에 없어요. 아마 지금쯤 파리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쯧쯧. 집안 꼴 잘 돌아간다. 여편네가 집안에서 살림이나 할 것이지.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말만 저렇게 하시지. 실제론 누구보다 여성의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시는 분이면서. 딸이니까 마음 편히 쏘아붙이시는 것일 테지.
“사업 아닌데요. 재단이에요.”
- 그 나물에 그 밥이지. 그래, 뭣 때문에 전화했느냐?
“광고 찍으라면서요?”
- 그럼 찍으면 되지. 나한테까지 전화할 이유가 있더냐?
“뭘 찍을지 알아야 찍죠.”
- 그거야…….
웃음이 났다.
순간 말문이 막히셨는지 잠시 말씀이 없으신 외할아버지.
고민되실 거다.
왜냐면 지금 내가 물은 게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D그룹 산하 계열사면 몇 개인가?
그중 주력 상품은 커피만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커피를 위시한 음료 쪽이 본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외에도 광고를 찍어야 할 건 많다. 그리고 그 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계열사들을 삼촌들이 사이좋게 나눠 가진 상태고.
이 말은 곧 내가 광고를 찍어줄 곳에 외할아버지의 본의가 닿아있다는 얘기다.
자, 저는 누구 손을 들어주면 되나요?
속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 고얀 놈!
대답 대신 외할아버진 화를 내셨다.
그러곤 신경질적으로 말씀하셨다.
- 이놈이 못된 것만 배워서는! 여러 말 말고 커피 찍어, 이놈아!
“아, 커피요. 그럼 그러죠, 뭐. 근데, 요즘 아파트도 미분양이 많고, 참치 쪽도…….”
- 사내놈이 웬 놈의 말이 그리 많으냐! 그리고 할 말 있으면……. 큼, 직접 와서 할 일이지.
흐흐흐. 그러게요. 제가 지금 이 말을 듣기 위해서 얼마나 머리를 굴린 지 아시나 모르겠네.
“그럼, 이따가 찾아뵐까요? 아니면, 설렁탕 한 그릇 드시러 가실래요?”
- 설렁탕? 일없다!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집에 들어가니, 와서 저녁이나 한끼 먹고 가던가.
“예. 그럼, 저녁때 찾아뵐게요.”
뚝.
알겠단 소리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는 외할아버지셨다.
크큭. 삐치신 게 분명하다.
처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통화를 시작하자 장난기가 동하고 말았다.
그래서 말장난을 좀 친 건데, 그게 외할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 그렇다곤 해도 겨우 이 정도로 삐치시는 걸 보니…….
“후우!”
어째 마음이 아프다.
나이가 드시긴 드셨구나 하는 생각에.
예전 같으면 화를 내셨으면 내셨지, 이런 식으로 삐치시지는 않으셨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방금 통화 중에 몸이 안 좋아서 요새 일찍 퇴근하신다는 말씀이 걸린다.
“회장님이시냐?”
운전 중이던 고 팀장님께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때였다.
“잘해라. 세상에서 널 가장 사랑하시는 분 아니냐?”
“그러게요. 그래야 하는데…….”
노래를 시작하고 나서 몇 번이나 찾아뵀는지…….
어머니랑 의절을 하네 마네 했던 때까지 포함하면 예전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 싶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눈은 무슨……. 지금이 몇 월인데.”
거리엔 눈은커녕 얼음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개나리가 피는 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으니까.
***
촬영장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볼거리가 많은 동네였다.
그중 한 건물 앞에 차가 멈춘 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감독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하자,
“아이고. 이렇게 대스타를 아침부터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네요. 이번 광고를 맡게 된 이광철입니다.”
살갑게, 그러면서도 장난스럽게 말하는 폼이 제법 이 바닥에서 구른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도 마흔 중반 가량.
보나 마나 속에 능구렁이 서너 마리는 키우고 있겠구나 싶었다.
“HS 엔터테인먼트의 고현우입니다.”
고 팀장님과 악수를 나눈 이 감독님은 날 스텝들에게 소개시켜주곤 곧바로 최종본이라며 시놉과 콘티를 안겼다.
음……. 이거 장난 아닌데?
진짜 이대로 찍어도 되는 건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광고의 컨셉이 독특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닥치고 보니 가능할까 싶다. 아니, 찍는 건 찍는다 치고 이걸 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심히 걱정된다.
살짝 불만 섞인 눈빛이 되어 쳐다보자, 이 감독님이 너스레를 떠신다.
“김도준 씨만 믿겠습니다.”
생각 같아선 딱 한 대만 쳤으면 좋겠다.
웃고 있는 저 얼굴을.
***
“안녕하세요.”
수줍게 인사해오는 여자.
예쁘긴 예쁘네.
요즘 대세라고 하더니, 딱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를 가졌다.
한유진.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어떻게 나보다도 더 어려 보이냐?
혹시 방부제 먹나?
“예. 오늘 잘 부탁 드려요.”
“아이참.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눈웃음치는 한유진…누나.
연기도 수준급이라고 하더니만 애교가 장난 아니다.
저러니 애들부터 삼촌에 아빠들까지 홀딱 반해서 그 난리를 치는 거겠지.
“자자, 인사는 그쯤하고 이쪽으로들 와보세요.”
우리 이 감독님, 이 바닥에서 최고라고 정평이 나 계신 만큼 프로페셔널하시네. 아무래도 지금부터 열일 하시려나 보다.
“한유진 씨, 보내드린 대본 확인하셨죠?”
“예. 한 네 번 정도 봤어요.”
“역시! 그럼, 대사는 다 외우셨겠네?”
“대충요.”
“프롬프트 필요 없겠죠?”
“그럴 거 같아요.”
“좋습니다. 그럼 바로 촬영 들어가죠. 아, 김도준 씨는 대사 안 하셔도 되니까 표정만 좀 잘 잡아주시고요. 나머진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인형도 아니고……. 표정만 잘 지어달란다.
슬슬 불안해지는 느낌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백억을 받아먹었는데, 이제 와서 토해낼 수도 없고.
뭐, 돌려주는 건 일도 아닌데 그럼 희주 보기가 껄끄러워질 테니까.
지시대로 잘 따르다 보면 금세 끝나겠지.
그렇긴 한데…….
“저, 근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내가 불안한 마음에 묻자, 이 감독님이 날 향해 씨익 웃어 보인다.
다 안다는 듯이.
그러더니 되묻는다.
“지금 싼티 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잘 아네.
솔직히 대본 읽으면서 몇 번이나 손발이 오글거려서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조금요.”
“뭐, 이해합니다. 근데 절 믿어보세요. 이거 제대로만 나오면 대박 칩니다. 왜냐? 원래 대중적이라는 건 약간의 싼마이가 들어가야 하는 거거든요. 하하하하! 그렇다고 그런 표정 지으실 건 없고요. 삼류적인 요소는 아주 약간, MSG 뿌리듯 맛만 낼 거니까,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아, 예……. MSG 말이죠.”
불안불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가 콘서트장이라면 몰라도 광고 촬영장인 것을.
계약서에 사인한 이상 감독 말에 따르는 수밖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 이 감독님이 소리쳤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인 광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젠장! 이게 내 흑역사 될지 아니면 진짜 이 감독님 말씀대로 세련 90에 약간의 싼티 10이 가미된 명작이 태어날지는 모를 일이지만.
***
진이 다 빠져서 차에 몸을 구겨 넣자, 고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고생 많았다.”
“그러게요. 진짜 고생했어요. 촬영 내내 손발이 오글거려서.”
어? 고 팀장님 입꼬리가 살짝 움직인 거 같은데.
웃으신 건가?
나 참, 누군 돈 벌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월드 투어고 나발이고 확 그냥 잠수 타버릴까보다…하고 객쩍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팬들이 좋아할 거 같긴 하더라.”
“그…런가요?”
“장담은 못하지. 난 전문가가 아니니까.”
흠, 저렇게 말씀은 하시지만, 마케팅에 관해선 거의 신급에 다다른 분이시니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닐 거다.
그래, 뭐……. 이 한 몸 망가져서 팬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야.
게다가 이미 다 찍었잖아?
다행히 촬영이 하루 만에 끝난 게 어디냐고.
그동안 참았던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팀장님, 죄송한데 저 한숨 잘게요. 진짜 지쳐서 그래요.”
“그래라. 근데, 회장님댁으로 가면 되는 거지?”
“예.”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푹 자라.”
눈을 감자 순식간에 잠이 몰려들었다.
***
누군가 날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차는 외갓집 문앞에 서 있었다.
“도착했는데, 어쩔래?”
뭘 어째?
비몽사몽 간에도 머리는 잘만 돌아간다.
“피곤하실 텐데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녀석하곤. 별소리를 다 하네. 내일은 좀 쉬고 모레 미팅 때 보자. 그동안 나도 밀린 일 좀 하게.”
“예. 그럼 그때 뵐게요.”
고 팀장님께 고개를 숙여 보이곤 차에서 내렸다.
그때, 핸드폰이 까똑거린다.
희주다.
- 촬영 끝났어?
-- 미안. 연락한다는 게…….
-- 촬영 끝내고 지금 외갓집 와 있어. 방금 도착.
- 아, 외할아버지?
-- 응. 좀 보자시네.
- 오랜만에 좋아하시겠네.
-- 그렇지 뭐. 이따가 집에 갈 때 연락할게.
- 응. 기다리고 있을게. 늦더라도 연락 줘.
-- 오케이. 꼭 연락할게.
- 응응. 할아버지께 응석 마음껏 부리고 와.
피식.
희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고 있을 때,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중형 세단 한 대가 서 있다.
달칵.
뒷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외삼촌이셨다.
“이게 누구야? 우리 작은 조카님 아니신가?”
응?
뜻밖에도 살갑기 그지없는 말투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 이미 삼촌은 내게 바짝 다가와 날 와락 끌어안으시고 계셨다.
뭐지?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