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 꼭 그래야 하나? (2)
지난번에 뵈었을 때 많이 여위어 보이셨던 외할아버지. 수척해 보이시던 얼굴과 기침하던 모습이 머리를 스쳐 가는 동안 통화버튼을 눌렀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삼촌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은 거라고나 할까.
“여, 여보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도준아.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예. 실장님.”
- 집이냐?
“예.”
- 그래.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거 같아서 전화했다.
“…….”
- 괜찮으면 나 좀 볼까?
이 실장님의 물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런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딱히 이유를 대라고 하면 대답하기 어렵지만, 일단 안심이 됐다.
그래도 확인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할아버진 괜찮으신 거죠?”
- 주무시고 계실 거다.
하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디로 갈까요?”
- 차 보내마.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택시 타면 되는 데요, 뭘.”
- ……그래라 그럼.
난 샤워도 하지 않고, 대충 옷만 바꿔 입은 뒤 집을 나와 이 실장님이 말해준 장소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뉴욕과는 달리 서울 집 앞엔 기자들이나 팬들이 진을 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수월하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택시에 올랐다.
그러면서 조금 전까지 가슴을 내리누르던 불안감을 다시금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
음, 어쩌자고 이런 데서 날 보자고 하시는 걸까?
난감했다.
택시에서 내려 이 실장님이 말해준 가게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어서였다.
한남동의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작은 건물. 주택도 간간이 섞여 있는 조용한 골목길 중간쯤에 있었는데 대체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아무런 꾸밈도 없이 그저 검정 바탕에 흰 글씨만 달랑 쓰여있는 간판만 눈에 띈다.
그것만 봐서는 술집인지 찻집인지, 아니면 음식점인지 알 길이 없었다.
빛날 휘(輝)자 만 달랑 쓰여 있었던 것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이 실장님이라면 이유 없이 날 이런 곳으로 부르시진 않았을 거라 믿으면서.
딸랑.
응? 여기도 종이 달려 있네?
강화유리문을 열자 들려오는 종소리가 왠지 반가워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김도준 님?”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다가와 날 맞이해준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옅게 미소 지은 얼굴이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날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둘 중 하나겠네.
조심스러운 성격이거나, 예의가 몸에 배어 있거나.
아마도 둘 다 일 거 같은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여자는 날 가게 안쪽으로 이끌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뭔 놈의 가게가 문이 그렇게 많이 달렸는지.
이게 혹시 그 말로만 듣던 룸인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어가 빠졌지만, 누군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리를 살짝 숙이며 물러나는 여자를 잠시 보다가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돌려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홀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이 실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어, 왔냐?”
분위기로 봐선 술이라도 한잔하고 계실 줄 알았더니만, 그건 또 아니었다.
그저 재떨이 하나 앞에 놓고서 담배만 피우고 계셨다.
그조차도 내가 들어오니 얼른 끄는 모습이었고.
“여기 어디에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며 묻자, 이 실장님이 피식 웃는다.
“그냥 좀 아는 동생이 하는 카페.”
카페라…….
이렇게 밀폐된 공간들이 즐비한 곳이 카페란 말이지.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근데, 카페 맞아. 커피도 팔고 음료랑 음식도 파는. 꼭 마시겠다고 하면 간단한 칵테일이나 맥주도 마실 수는 있겠지만, 그게 주는 아니지.”
“전 룸인 줄 알았어요.”
이 실장님은 피식하고 웃더니 말했다.
“룸에서 볼 걸 그랬나?”
“아뇨. 저 아직 미성년자잖아요. 아, 혹시 저 때문에 이런 데서 보자고 하신 거에요?”
유명해진다는 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여러모로 불편하기도 하다.
자칫해서 기자들에게 꼬리가 잡혀 사진이라도 한 장 잘못 찍히게 되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인터넷이 발칵 뒤집어지는 세상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난 상관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에게 당당하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인가.
무슨 위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머리가 복잡할 때면 가끔 오는 곳이야. 말했다시피 여기 주인이 내가 아끼는 동생이기도 하고.”
“아, 아까 그분…….”
고개를 끄덕이시는 이 실장님이셨다.
그때, 문이 열리며 여자……. 이 실장님이 동생이라고 말했던 분이 들어왔다.
양손에 커피 두 잔이 놓인 쟁반을 받쳐 들고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여 보인 뒤 나가는 여자.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을 바라보다가 입가로 가져가곤 깜짝 놀랐다.
“와아, 진짜 맛있는데요?”
“그렇지? 녀석이 다른 건 몰라도 커피 하나는 제대로 뽑거든.”
“농담 아니에요. 제가 여태껏 마셔본 커피 중에 제일 맛있는 거 같아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이 실장님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뒤, 또다시 담배를 꺼내 들다가 주춤하더니 그대로 집어넣으려고 하신다.
“에이, 왜 그러세요. 그렇게 자꾸 내외하시면 저 그냥 갈 거에요. 편하게 피세요.”
날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신 이 실장님이 알겠다는 듯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진 않으신다.
그 상태로 내게 물으셨다.
“도준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응? 이건 또 무슨…….
앞뒤 없는 질문에 눈을 치켜뜨자, 그제야 이 실장님이 덧붙이셨다.
“네 삼촌들 중에 누가 회장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말이다.”
어이고야. 갑자기 난감한 질문을 던지시네.
들어오시려면 좀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오시던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회피했다.
“제가 뭐 아나요?”
날 빤히 바라보시던 이 실장님은 여전히 담배엔 불을 붙이지 않고선 말씀하셨다.
“회장님 주무시는 거 보고, 곧바로 전화한 거다. 낮엔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을 테니까.”
“…….”
“솔직히 난 네가 회장님 뒤를 잇기를 바랐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음성.
나 역시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다 보니 방안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걸 다시 깬 것도 이 실장님이셨다.
“한데, 네가 음악 하는 걸 보니 내가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더구나. 그래, 넌 사업가보단 가수를 하는 게 더 즐겁겠다 싶었어. 그래서 포기했지. 그렇긴 한데…….”
이 실장님은 소파 위에 올려둔 서류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걸 내 쪽으로 밀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이다. 이대로라면 회사가 반 토막이 나지 싶어서.”
“그렇진 않을 거에요. 두 분 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능력이 없으시진 않으시니까요.”
픽하고 웃으신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데도 난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재계 서열 1위였던 현우그룹이 흔히들 왕자의 난이라고 부르는 사태를 겪으며 토막 나고 쪼그라든 걸 난들 왜 모르겠나.
그러는 사이 S그룹에 1위 자리를 내어주었고.
그처럼 큰 기업도 한순간에 그렇게 되는데, D그룹이라고 마냥 안심할 순 없는 거겠지.
“회장님 지시셨다. 직접 보고 판단해라.”
난 이 실장님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서류봉투를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마치 그 안에 폭탄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잠시 후…….
“이, 이건……!”
지분 7%?
헐! 언제 이런 걸…….
근데 이거 무슨 의미지?
설마…….
나더러 삼촌들처럼 경영권 승계 경쟁에 뛰어들라는 의미는 아닐 테고.
……삼촌 중 한 명을 선택하라는 건가?
그래서 밀어주라고?
하아, 이거 폭탄 맞네.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서 난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그러곤 뭔가 말하려고 하자, 이 실장님이 말없이 고개를 내저으셨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얘기.
그대로 입을 닫고는 그새 말라버린 입술에 침을 축였다.
그만큼 놀라웠고, 또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가봐라.”
“이 실장님…….”
“왜? 태워다 주랴?”
“그런 건 아니고……. 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이곤 그곳을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나오는 내 손에는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다.
***
심란한 마음으로 서류들을 몇 번이나 살펴보다가 한숨을 짓곤 침대에 몸을 뉘인 것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콧속으로 흘러드는 음식 냄새에 멍해지고 말았다.
응? 어머닌 내일 오신다고 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을 나섰다.
“아이 참. 내가 한다니까.”
“자긴 그냥 앉아 있어. 설마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도련님 보시면 욕하니까 그러지.”
“에이, 그 자식 그런 놈 아니야. 알면서 그래? 걔가 얼마나 쿨……. 어? 도준아.”
“도련님!”
주방에서 알콩달콩 투닥거리던 두 사람을 빤히 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 국자를 들고 있는 형을 보니, 앞서의 대화가 모조리 이해가 됐다.
아이고, 저 팔푼이.
진짜 명진이 형 말대로네.
저 정도면 애처가 수준을 훌쩍 넘어선 거 같은데…….
“북엇국이야?”
식탁에 털썩 주저앉으며 묻자, 형이 대답했다.
“흐흐흐. 한번 먹어봐라. 아마 눈물이 앞을 가릴 거다. 얼마나 맛있는지…….”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릴 거 같거든요?
눈꼴 시려서.
아놔. 확 그냥 지금 희주 부를까 보다.
“잔말 말고 먹어봐. 나도 몰랐는데 이 형한테 요리에 재능이 있었단 거지.”
“그래?”
왠지 아까부터 조심스러워하시는 형수님을 보다가 말했다.
“앉으세요. 그렇게 서 계시면 힘드시잖아요.”
산달이 두 달쯤 남은 걸로 아는데, 그래서 그런가 배가 정말 산만하다.
저 안에 내 조카가 들었다고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예.”
참네, 형수님은 이상하게 날 어려워한단 말이야.
“언제야?”
내가 형한테 묻자, 내 앞에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형이 얘기했다.
“5월 8일.”
개떡같이 물었는데,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하는 형이었다.
“형은 올해 어버이날 선물은 안 해도 되겠네.”
“크크큭. 우리 연수 효녀지?”
“응? 딸이래?”
“아니, 아직 몰라.”
“보통 이맘때면 가르쳐주지 않나?”
“그게…….”
“제가 묻지 말자고 했어요. 미리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아들이든 딸이든 저희 아이인데 괜히 딴 생각하기 싫어서…….”
우와 역시 우리 형수님.
현명하기도 하시지.
“형은 아마 전생에 우주를 구한 게 틀림없어.”
“그치? 나도 그렇게…. 끄윽!”
말하다 말고 인상을 찡그리는 게 꼬집힌 모양이다.
속으로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곤 국을 한술 떠먹는 순간이었다.
어?
“맛있네?”
뭐지, 이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
형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다니.
“굼벵이도 구르는 재…….”
말을 하다말고 꾹 다물었다.
형수님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한집안의 가장인데, 동생이 돼서 그런 말을 할 수야 없으니까.
“진짜 맛있네. 가게 내도 되겠다.”
“그치? 우하하하!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한다면 또 한다니까!”
에그, 뭔 말을 못해요.
칠푼이랑 팔푼이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형을 보면서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있어서 그런지 소심하게 행동하긴 하지만, 형이랑 투닥거리며 소곤대는 형수님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형도 이제껏 내가 보아온 그 어떤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을 보면서 뜻밖의 힐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문자가 왔다.
확인해보니, 고 팀장님이 보내온 스케줄 표였다.
아, 그렇지.
오늘부터 촬영이었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N10의 광고를 오늘 찍기로 했다는 것을.
근데, 컨셉이 무척 독특하던데…….
나중에 욕이나 안 먹을까 모르겠네.
살짝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