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 꼭 그래야 하나? (1)
월드 투어.
말 그대로 전 세계를 돌면서 공연하는 거다.
하아, 중국 5대 도시 투어 때도 거의 죽다 살아났는데,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잠깐 상상만 했는데도 토가 다 쏠린다.
그러면서도 설레는 이 기분은 뭐지?
설마 나 변태인가?
누가 제발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정상이라고, 그렇게 말해줘.
“그거 확정된 거에요?”
“알면서 뭘 물어? 우리 회사에 그런 게 어딨냐? 네 명 중에 한 명만 반대하면 그냥 없던 일이 되는데.”
작은 회사라는 게 이런 면에선 좋네.
그렇긴 해도…….
“그래서야, 대표라는 직함이 울겠는데요?”
“얀마. 나 그렇게 꽉 막힌 사장 아니야.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회사 소속 아티스트라 해봐야 달랑 너 하나인데, 막말로 네가 다른데 가겠다고 뛰쳐나가면 어떻게 되겠냐?”
“흐흐흐. 장사 접어야죠. 그러니까 아저씬 저한테 잘하셔야 돼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뭐? 다른데 가기라도 하게? 아, 그러시던가요. 우리 도준님께서 가시겠다는 게 누가 말리나? 우리야 벌만큼 벌었겠다, 이제 네놈도 없겠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에서 벗어나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탱자탱자 놀면 되지 뭐. 아, 마루는 꿈에 그리던 니스 해변으로 가겠네. 거기서 비키니 차림으로 핸섬한 스페인 남자를 꼬셔보겠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데.”
“아이, 씨! 뭐에요! 이럴 땐 좀 져주면 안돼나? 뭔 사람이 그렇게 박정해요!”
“그러니까, 잘해. 지구를 쳐들고 흔들어봐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있나? 능력은 좀 달릴지 몰라도 진심으로 널 위해주는 이들이 그렇게 흔할 줄 알아?”
뭐, 그거야 알지.
그래도 그렇지, 뭔 말을 해도…….
젠장, 되로 주고 말로 받았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요. 저 월드 투어 해요, 말아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결정해야지.”
“뭔 회사가 이래? 현장 직원들이 이것저것 계산 놔보고, 계획 딱 세워서 대표님께 결재 올리면 멋지게 사인해서 소속 연예인한테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긴말 안 한다. 그런 데 찾아가라.”
“와! 아저씨 지금 악마처럼 웃고 있는 거 알아요?”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저씨가 느닷없이 날 부른다.
“도준아.”
“왜요?”
“월드 투어 해.”
“……그래야겠죠?”
“힘들 거야. 그래도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렇겠죠.”
돈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안다.
CDM이야 비즈니스 차원에서 제안한 걸 테지만.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엔 회사 식구들의 힘도 컸지만, 뭐라 뭐라 해도 팬들 덕분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남녀관계가 아니더라도 주고받는 거니까.
그게 정상적인 관계인 거다.
“에휴. 하는 수 없네요. 대신 3월 말 이후로 잡아주세요.”
“……?”
“……희주 생일이 3월에 있거든요.”
씨익.
아저씨는 내가 귀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우, 진짜 얄밉다.
***
교향곡 문제도 그렇고, 앨범 판매와 음원 등록 문제까지 포함해 월드 투어까지.
미국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대충 마무리된 셈이었기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김도준 앱을 통해 노래는 꾸준히 발표되는 중이었고, 그때마다 인터넷이 달아올랐다.
다만, 일주일에 두 곡씩 발표되다 보니, 빌보드 차트가 못 쫓아오는 느낌이었다.
대신 라디오에선 신곡이 발표될 때마다 발 빠르게 대응해 노래를 틀어대고 있었지만.
그리고 놀랍게도 N10의 판매고는 아직도 오름세였다.
아마 지금쯤 피치사 쪽에선 똥줄이 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난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찰리스 건물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였지만.
팡! 팡! 팡! 팡!
한국에 도착해 입국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
동시에 들려오는 질문들.
“김도준 씨!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가 되셨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합니다.”
얼씨구. 질문 수준 봐라.
싸구려 잡지도 아니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대답해 준다.
대신 성의라곤 1그램도 없이.
“좋습니다.”
기가 막혔던 걸까?
질문한 기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금세 다른 기자들한테 밀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 뒤 다시 밀려드는 질문 공세.
“캘리 양과는 언제부터 그런 관계가 되신 겁니까?”
“그런 관계가 뭔데요?”
“현재 빌보드 차트에서 2주째 줄세우기를 하고 계신데, 그게 언제까지 갈 거 같습니까?”
“저 무속인 아닌데요?”
“김도준 앱에서 발표하는 곡들은 전부 무료로 알려져 있는데, 혹시 아깝지 않으십니까?”
“음원 사이트에서 내려받는 건 공짜 아니에요.”
대충대충 대답해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눈에 띄는 기자가 보였다.
대한신문의 연예부 곽미영 기자였다.
그녀가 내게 물어왔다.
“괜찮으시면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내가 성의라는 걸 좀 가지지.
난 걸음까지 멈추고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아는 척을 한 후, 말했다.
“일단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고 해도 그동안 제 개인사로 외도를 한 셈이니까요. 그래도 저 여러분께 돌아왔어요. 신곡도 한 꾸러미 가지고. 것도 무료인 거 아시죠? 김도준 앱……. 아, 이럼 간접 광고가 되려나? 아무튼, 좀 봐주세요. 팬 여러분께 더 좋은 모습 보여 드리려고 노력 많이 했어요. 진짜라니까요. 그리고 이번에 아무래도 콘서트를 할 거 같은데……. 가장 먼저 서울 찍고 부산 찍고, 흐흐흐. 대구까지 찍고 갈까 봐요. 그럼 그때 뵐게요. 바이바이.”
마치 눈앞에 팬들이 있는 것처럼 손까지 흔들며 말하자, 곽미영 기자가 풉하고 웃는다.
다른 기자들도 대부분 흐뭇하게 아빠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후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어우야! 놀랬잖아!
거짓말 안 하고 진짜 고막 찢어지는 줄 알았다.
구름떼처럼 몰려 있는 여학생들. 개중에 간간이 섞여 있는 여자들과 남자들. 많기도 하네. 얼마나 많은지 공항이 미어터질 지경이다.
그러니까, 쟤들이 다 내 팬들이란 말이지?
팬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함성에 깜짝 놀랐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 고 팀장님이 미리 섭외해놓은 경호팀이 날 호위하며 공항 밖으로 빠져나갈 길을 뚫고 있었다.
11시 43분.
그런데 저렇게들 몰려왔다고?
이 야심한 밤에?
미쳤네, 미쳤어.
이 시간이면 버스가 있긴 하나?
설사 있다고 해도 나랑 여기서 이러고 있다가 돌아갈 때쯤에는 끊기지 않을까?
대부분이 여자들인 거 같은데, 위험할 텐데…….
부모님 속깨나 썩이겠다 싶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끙끙대며 길을 뚫고 있던 경호팀에게 말했다.
“잠시만요.”
응? 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경호팀.
그런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낸 뒤, 나는 고 팀장님과 얘기를 나눴다.
“팀장님,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요.”
“뭐가?”
미국 지부장인지라 남을 수밖에 없었던 마루 누나와 오케스트라 문제와 월드 투어 때문에 바쁘신 아저씨를 대신해 홀로 따라오신 고 팀장님.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어오고 계셨다.
“그렇잖아요. 지금 몇 신데……. 진짜 제정신들이에요?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진심으로 화가 났다.
날 좋아해 주는 것도 좋지만…….
내 뜻을 알아챘는지, 고 팀장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 게 보인다.
“그래서 어쩌자고.”
“어쩌긴요. 오빠가 돼서 가만있을 수 있겠어요?”
“저 중에 절반이 너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아 몰라요. 그냥 오빠 해요.”
난 말도 안 되는 강짜를 부리며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
이번에 광고 계약을 하면서 S 전자로부터 받은 N10이었는데, 전작과 비슷한 사양에 스피커 기능이 좀 더 강화된 제품이었다.
흔히들 노래방 기능이라고 부르는 건데.
그래서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거지.
- 아아….
오올, 손바닥만 한 놈이 스피커 한번 짱짱하네.
- 저기요. 김도준이에요.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이고, 난리네.
비명인지 함성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는 고함에 난 한쪽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 잘 안 들리죠? 그럼 이렇게 하죠. 여기 N9나 N10 가지신 분들 계실 텐데, 다중 통화기능 켜서 스피커모드로 좀 바꿔주실래요?
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의 스피커만으로는 부족해서 그런지 앞쪽에 있는 이들만 알아들었는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들 웅성거리더니 저 멀리 있는 이들까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곤 말했다.
- 잘 들려요?
“꺄아아아아악! 오빠 목소리다아아아!”
“예에에에! 잘 들려요!”
“오빠아아아아!”
- 저 지금 돌아왔어요.
“오빠! 사랑해요!”
“잘왔어요오오오오오!”
“엉엉, 이제 가지 마요오오오!”
- 너무 격하게 반겨주시니까, 진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내가 핸드폰을 들고서 팬들에게 외쳐대는 동안, 경호팀들은 죽을 맛인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럴 테지.
팬들이 날 만지기 위해서, 혹은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고 밀치고 있었으니까.
한두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숫자가 어지간히 많아야지.
그걸 막는다는 게 웬만한 장정이라도 쉬운 일일까.
속으로 경호팀들에게 미안해하면서 말했다.
물론 팬들에게.
그것도 이제까지와 달리 말투를 바꿔서.
쯧, 막상 하려니까 오글거려서 손발이 없어질 거 같지만 어쩌겠냐?
이 한 몸 희생해서 팬들이 안전하다면야.
하는 수 없지.
적어도 다시는 오늘처럼 이런 일이 없어야 하니까.
- 죄송한데요. 대부분 저보다 어린 거 같으니까 이제부턴 반말 좀 할게요.
여전히 많은 수의 팬들이 꺅꺅거렸지만, 개중에는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예전에 결심했다시피,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왜?
내 삶은 내거니까.
핸드폰에 대고 소리쳤다.
-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마찬가지로 저들에게도 저들만의 삶이 있을 거였다.
“어? 뭐, 뭐야?”
“지금 도준 오빠가 말한 거야?”
“아니 왜 저러는 거래?”
놀랐는지,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천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일대가 꼭 시장처럼 변해버렸다.
뭐, 난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 오빠가 얘기하는데 떠드는 사람 누구야? 거기! 빨간 옷 입은 예쁜 여학생. 얼굴만 예쁘면 단가? 그리고 저기! 그래, 너! 몸매 예쁘고 눈만 크면 그래도 돼? 지금 오빠가 얘기 중이잖아!
지적질을 했는데도 얼굴을 붉히며 몸을 베베 꼬는 여학생들이었다.
아이고, 하여간 여자들이란.
예쁘다고 하면 다 용서가 되는 건지.
하긴, 나도 누가 잘생겼다고 하면 기분이 좋긴 마찬가지니까.
- 지금 대체 몇 시인 줄이나 알아? 밤 12시가 다 돼가. 밤 12시! 근데 여기서 뭣들 하는 거야! 응? 여기가 서울이면 내가 말도 안 해요. 인천이잖아, 인천! 버스라도 끊기면, 갈 때는 어쩌려고들 그래? 오빠가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놀랍게도 웅성거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진심이 통한 거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 다음부턴 진짜 이러지들 좀 마! 나야 니들 봐서 좋긴 한데, 그럼 나 가고 난 뒤엔 어쩔 거냐고. 택시비는 둘째치고, 부모님 걱정하시는 건? 만에 하나라도 니들 중 하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 속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이러지들 말자고. 대신 약속할게. 한국 오면 무조건 다음날 팬 미팅한다. 그때 보자고. 해 떠있을 때, 응?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에에에에에!”
헐! 무슨 떼창도 아니고.
대답을 천명도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하니까, 이것도 예술처럼 느껴지네.
히죽 웃고는 다시 말했다.
- 여기까지 할게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께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다시 한 번 사과합니다. 어설픈 훈장질 해서 죄송했습니다.
“아녜요오오오오!”
“오빤 영원히 저희 오빠예요오오오오오!”
“오빠아아아아아아!”
크크큭.
저 와중에 남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가관이다.
“혀어어어어어어엉!”
“도준이 혀어어어어엉. 개 멋져어어어어!”
난 경호팀에 물러나라고 하고는 팬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사인도 해주었다. 물론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 바람에 공항에서 조금 더 머물게 되었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집에 가면 잠이나 퍼질러 잘 텐데.
대신 팬들이 돌아갈 때 막차라도 탈 수 있게 최대한 서둘렀다.
생각 같아선 버스라도 대절해주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그러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때문에 일찍 헤어지게 된 팬들이야 무척 아쉬워했지만, 내일을 약속하며 그들과 헤어졌다.
펑! 펑! 펑!
문제는 언제 왔는지, 사진을 찍어대는 기자들이 문제였을 뿐이다.
***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 알고 있었지만, 왠지 쓸쓸하긴 하네.
형이야 분가했으니 없는 게 당연한 거고, 부모님은 해외출장 중이셨으니까.
요즘 재단 활동으로 바쁘신 두 분이시니 이해한다.
그래도 좀 그러네.
간만에 집에 왔는데,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
그건 그렇고.
내 이럴 줄 알았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인터넷.
벌써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한데, 제목이 가관이다.
[오빠가 말한다. 김도준 패기발언.]
진짜 낚시 잘하네.
아니, 낚시가 아닌가?
그때였다.
부르르르르.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희주?
아니면 형인가?
반가운 마음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
이 실장님이 이 시간에 왜?
혹시……?
머릿속으로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