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 그게 중요한가요? (5)
영화라…….
뭘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다.
살짝 구미가 당기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좀 그렇네요.”
에둘러 거절했다.
왜?
다른 건 둘째치고 시간이 없다.
잘난척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잡힌 스케줄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다른 데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만일 내가 인기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면,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라 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노래고,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래도 영화는 아니다.
“아! 그, 그래요?”
설마 내가 거절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인지 캘리가 말까지 더듬는다.
앞뒤 사정은 모르지만, 그녀는 날 위해서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거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가 ‘거절’이니 살짝 당황스러웠던 거겠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말했다.
“당장은 무리고요. 나중에라도 시간이 되면 그땐 좀 더 생각해볼게요.”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여지를 남겼다.
거기에 투정 반 앓는 소리 반.
변명 대신 투덜거렸다.
“아쉽네요. 딱 듣자마자 확 느낌이 왔는데. 아우, 근데 요즘 같아선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거 같다니까요.”
“그, 그렇긴 하죠.”
“그래도 저 많이 출세했네요. 할리우드에서 관심을 다 받고. 아닌가? 캘리가 나서 준 덕분일까? 아무튼, 고마워요. 저한테 그런 기회까지 줘서.”
“그, 그…그런 건 아니에요.”
고개까지 푹 숙이고 빨개진 얼굴. 캘리가 오늘따라 귀엽게 느껴진다. 특히 저 큰 눈과 긴 속눈썹이 유난히 눈길을 끌……. 헛! 정신 차려야지. 하아, 정말이지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이래서 예쁘다 못해서 여자여자한 데다가 매력이 철철 넘치는 캘리와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 밥이나 먹을까요?”
“아! 시간이 벌써.”
“어디 간만에 한번 솜씨 좀 부려볼까? 볶음밥 어때요? 좋아해요?”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
저런 점도 캘리의 장점이지.
세계적인 스타답지 않은 소탈함.
누가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전생에 세상을 세 번쯤은 구하지 않았…….
음, 안 되겠다.
이러고 있다간 진짜 뭔 일 나겠다.
속으로 혀를 차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따라서 그녀 역시 다소곳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태풍의 한가운데는 오히려 조용하다고 하던가?
지금 우리 집이 그랬다.
밀린 숙제하듯 그동안 미뤄뒀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레이크헬이 집을 떠난 뒤, 집안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해졌다.
그나마 리노가 남아 있었으면 좀 활력이 돌았겠지만, 녀석도 레이크헬을 따라 떠나버려서 진짜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회사 식구들은 곧이어 닥칠 여러 가지 일들을 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일을 밖에서 처리하는 마루 누나를 제외하곤 고 팀장님만 집에 남아 있어서 집안은 이상할 만치 고요했다.
캘리 역시 레이크헬와 함께 떠난 상황이었고, 샤오린 역시 투자 문제 때문에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게으름을 부렸냐 하면 그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틈조차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광고 촬영이 잡혔고,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들 특히 재단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은근히 내가 돌아오길 바라시는 외할아버질 뵙기 위해서라도 한국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 그러니 그전에 몇 가지 문제만은 반드시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인기(?) 때문에 쉽사리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날 위해서 니콜 교수님이 직접 방문해주셨던 것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손님을 대동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회사 대표를 맡고 있는 강혁숩니다.”
“음, 난…….”
“아, 알고 있습니다. CDM의 수석 프로듀서시죠? 잡지로는 몇 번 뵙습니다만. 전 캘러웨이입니다.”
브라이언이 날 향해 ‘봤냐?’ 하는 눈빛을 해 보인다.
아니, 누가 뭐랬나?
평소에 편하게 지내서 그렇지, 브라이언이 이 바닥에서 나름 거물이란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나저나…….
거참. 레이크헬이라 따라다닐 것이지, 여긴 왜 왔대?
음, 오긴 와야겠구나.
미국 내 활동은 우리 회사 단독으로 하는 게 아니라 CDM과 함께 하는 걸로 계약되어 있으니까.
어느새 브라이언은 그 특유의 말빨로 매끄럽게 대화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TV에서 종종 뵀던 기억이 나네요. 매번 공연은 잘 듣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게 봐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 사람의 인사가 끝나고 내가 인사했다.
“김도준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여기서 나이도 제일 어리고, 장난기도 살짝 동해서 그렇게 말했더니 캘러웨이가 빵 터져서 웃었다.
참네. 이게 웃긴가?
왜 여기서 웃냐고.
“니콜 교수님 말씀대로네요. 생긴 거랑 다르게……. 큼, 초면에 실례일지 모르지만……. 유쾌할 뿐만 아니라 귀엽다고 하더니만.”
“예? 제가 생긴 게 어때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서 좋긴 한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니콜 교수는 짐짓 진지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캘러웨이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날 살피며 만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처음엔 별생각 하지 않았는데, 갈수록 영 부담스럽다.
그래서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을 때였다.
“알다시피 뉴욕 필하모닉에서 초연을 맡게 됐어요. 캘러웨이 마에스트로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죠.”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가 니콜 교수님은 정중한 태도로 일관하셨다.
“세상에 내놓기엔 모자란 곡임에도 공연을 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노노! 그렇지 않아요. 킴이 만든 교향곡은 더없이 훌륭해요. 굳이 말하자면 모자란 게 아니라 넘쳐서 문제일 뿐이지. 물론 저야 그런 점이 더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진심인 듯 말하는 내내 시종일관 웃고 있는 캐러웨이였다.
“그러시다면 다행이네요.”
“자, 칭찬은 그쯤 해두시고요. 킴, 저번에 말해주었죠? 공연은 3월 13일 당일에 한해서 센트럴 파크 동쪽에 무대를 마련할 예정이에요. 뉴욕시와는 이미 얘기가 끝났고요. 국내 방송국은 물론이고 해외 쪽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접촉해오고 있으니, 어쩌면 그날 BBC에서 올지도 몰라요.”
“BBC이요?”
좀 놀랐다.
설마하니 영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놀란 건 나뿐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저씨야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셨지만, 브라이언은 한순간이지만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평상시 얼굴을 되찾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요. 초연에 대한 부담이야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주변의 시각은 또 다르거든요. 과연 도준이 만든 곡이 실제로 공연되었을 때 어떤 느낌일지, 또 대중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게 될지 다들 궁금해하니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도준은 클래식 쪽에서도 태풍의 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맞습니다. 김도준 교향곡 1번…이라고 해도 되겠죠? 아무튼, 이번 공연은 단순히 참신한 시도가 아니라, 앞으로 클래식 음악계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결정하게 만들 초석이 될 겁니다. 그만큼 반향도 클 거고요.”
두 사람이 연거푸 쏟아내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진짜 부담 만빵이다.
이러다 정작 공연하게 되면 욕 바가지로 먹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긴장한 탓인지 자꾸만 목이 마르다.
차라리 이게 내 노래들을 가지고 하는 콘서트라면 이렇게까지 긴장되진 않을 텐데, 난생처음 만든 교향곡이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다고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 프로그램 구성표고요. 아, 당연히 확정은 아닙니다. 그쪽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서 바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건 수익에 대한 제안서고……. 이걸 보시면 알겠지만, 실외 공연인지라 연주홀보다는 관객들이 좀 더 들지 않을까 싶어서 좌석수를 정했습니다.”
캘러웨이가 나눠주는 서류들을 받아 살펴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2만 명?
이렇게나 많이?
가능할까?
콘서트라면 모르겠는데, 클래식 공연에 이렇게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조용히 웃고만 있는 캘러웨이를 대신해 니콜 교수가 말했다.
“이번에 공연하게 될 곡이 킴의 작곡임은 이미 알려진 상황이죠. 이쪽 관계자들이나 음악계 인사들, 거기에 클래식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은 물론이고 방송사들을 비롯해 정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어요. 이건 제 예상입니다만……. 어쩌면 좌석이 모자랄지도 몰라요.”
아이고. 한술 더 뜨시는 우리 교수님.
날 예뻐하시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하아, 이게 고슴도치 사랑이라는 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브라이언이 나섰다.
“음, 우려가 좀 되네요. 제가 클래식 전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듣는 귀는 좀 있습니다.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일각에선 팝이나 하던 대중가수가 만든 교향곡이 무대에 올려진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모욕감까지 느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너무 크게 일을 벌이시는 게 아닐지…….”
구구절절 맞는 얘기다.
모든 일에는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부끄럽게도 날 좋아해 주고 찬양하다시피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겨우 기타나 치고 노래나 부르면서 인기에 연연하는 딴따라 주제에 감히 교향곡을 만들고 또 그걸 무모하게 무대 위에까지 올린다고 폄하하는 이들도 넘쳐난다.
“저희도 그 점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할 순 없죠.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올 거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맞받아치는 캘러웨이의 말에도 브라이언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뭐, 본인 앞에서 이런 얘긴 좀 그럽니다만, 저 역시 도준을 믿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의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고, 천재성이며 매력은 가히 최고죠. 그렇긴 해도, 저흰 지금 비즈니스를 하자고 모인 거 아니겠습니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함이 옳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좌석수도 좀 줄이고, 방송사와의 계약도 최소화하자는 얘기다.
이처럼 브라이언이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고 있을 때, 니콜 교수가 말했다.
“천재라고 하셨나요? 틀렸어요. 도준은 천재가 아니에요. 그는…….”
말끝을 늘이며 모두를 한차례 둘러본 뒤, 그녀가 단호하게 얘기했다.
확신이 가득한 음성으로.
“선도자예요.”
브라이언은 물론이고 캘러웨이까지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실패가 두려우세요? 그럼, 당장 여기서 계약서 찢고 나가면 돼요. 하지만, 평생 후회하실 거에요. 왜? 도준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 같아요? 실패 따윈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까짓 이번에 실패하면 어때요? 도준이 있는 이상, 우린 다시 도전할 거 아닌가요?”
한순간 거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시죠.”
브라이언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저씨께서 말씀하신 것도 그때였다.
방금 거론된 문제에 대해 한 말씀 하실 줄 알았더니, 그 얘긴 당연하다는 듯 넘어가시고 대신 다른 걸 묻고 계셨다.
“그럼, 악단 구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그건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니면 혹시 추천해주실 분들이라도 있으신가요?”
캘러웨이의 물음에 아저씬 고개를 내저으셨다.
“아뇨. 그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어서 물었을 뿐입니다.”
“그럼, 불만이 없는 걸로 알고,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내가 끼어들 만한 얘기는 여기까지였다.
나머진 계약사항을 두고 오가는 대화였고, 더 이상은 내가 개입한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0여 분쯤 더 얘기를 나누곤 니콜 교수님이 준비해온 계약서에 서로 사인을 한 뒤 양측은 헤어졌다.
***
니콜 교수와 캘러웨이 마에스트로가 떠난 뒤, 레이크헬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한다며 브라이언까지 돌아가고 나자 거실엔 아저씨와 나만 남게 되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건넛방에서 고 팀장님이 자판을 두드리며 핸드폰으로 뭔가를 하는 게 보였지만, 이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는 모습이다.
마루 누나는 앨범 문제로 외근 중이었고.
한동안 날 가만히 바라보시던 아저씨께서 불쑥 물어오셨다.
“겁나냐?”
“참네. 저 아직도 모르세요? 아저씨가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김도준이에요, 김도준!”
픽하고 웃으신다.
“그럼 됐고.”
손님이 있을 땐 입 한 번 대지 않고 있던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아저씨.
“다 식은 걸 뭐하러 마셔요. 제가 다시 타올게요.”
“나, 식은 커피 좋아해. 몰랐냐?”
“아, 진짜! 취향 참……. 그래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뭔데요?”
“눈치 챘냐?”
“아, 그럼 몰라요? 그렇게 무게를 잔뜩 잡고서 날 노려보시는데.”
빙그레 웃으시던 아저씬 사과부터 하셨다.
“미안해서 그러지.”
“뭐가요?”
“뭐, 네가 잘나서 그런 탓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그러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놈을 이렇게까지 굴려도 되나 싶기도 하고.”
답답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시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딱히 짐작되는 건 없었다.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뭔데 그래요?”
커피잔을 입에서 떼어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도준아.”
“예.”
“CDM 쪽하고 얘기해봤는데…….”
“그런데요.”
“아무래도 투어 해야겠다, 너.”
“예? 투어요?”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아저씬 확실히 못 박으셨다.
“그래, 월드 투어.”
헉!
그런 건 그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옥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영광의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