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 그게 중요한가요? (4)
빛나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시는 니콜 교수님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피하진 않았다.
나 역시도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교수님은 저토록 날 믿으시는 걸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니콜 교수를 만난 건 채 일 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에 대한 믿음이 확고부동하다는 게 팍팍 느껴진다.
자신의 제자라서?
아니면 내가 만드는 곡들이, 혹은 연주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혁수 아저씨도, 마루 누나도, 심지어 고 팀장님도.
거기에 샤오린과 실비아를 비롯한 팬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날 응원해주고 믿어준다.
왜지?
노래를 잘해서인가?
단지 그것뿐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오버인가?
너무 느닷없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갑작스럽게 든 생각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2년이다.
내가 음악을 시작한 지, 만으로 딱 2년이 되었다.
재작년 이맘때쯤 노래방에 갇혀 있었었고, 그 후로 희주 생일에 초대받으면서 시작된 음악 인생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파란만장했다.
노래방에서 지낸 세월은 빼더라도,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만으로도 정말이지 엄청난 파고를 넘어왔다.
아마도 주위에서 날 믿어주는 이들이 없었더라면 금세 좌초되어 밀려나고 말았겠지.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가수를 꿈꾸고, 또 데뷔하고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이제 알 것 같다.
음악은 내가 하는 거지만, 나 혼자 만드는 것도, 혼자서 부르는 것도 아니란 것을.
그건 줄리아드에 입학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니콜 교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였다.
특히 힘들 때마다 옆에서 잡아준 가족들과 희주. 누구보다도 날 사랑해주시는 외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진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 미소가 얼굴 전체로 퍼지고, 눈매가 휘는 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을 때 내가 말했다.
“역사를 바꾼다라……. 재밌겠네요. 한번 해보죠! 뭐.”
니콜 교수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야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
고개를 살짝 쳐들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변한 그녀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준. 겁먹지 마. 물러서지도 마. 무엇보다도 의심하지 마.”
“…….”
“누가 뭐래도 넌 내 제자야. 사자는 절대로 강아지 따윌 새끼로 낳지 않아. 내 말 알아듣겠어?”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알겠어요. 말씀대로 할게요. 교수님을 개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답하는 날 바라보는 니콜 교수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지고 있었다.
***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을 땐 아까보단 건물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봐야 천명은 훌쩍 넘었지만.
그래도 나올 때보단 수월하게 들어갔다.
물론 몰려든 팬들이 내민 손을 일일이 잡아주어야 했고,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을 애써 무시해야 했지만.
“죄송합니다. 노코멘트입니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기자회견이라도 열겠습니다.”
최대한 정중히 대답하며 경호원들과 경찰들의 도움으로 길을 뚫었고, 집안으로 발을 들였을 땐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후-아!”
이건 뭐, 어지간한 콘서트 한번 뛰는 것보다 더 진이 빠진다.
“도준. 아직 멀은 거에요. 밥이 괜히 방구석 폐인이 된 게 아닌 거에요.”
제롬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방구석 폐인’을 언급하는 게 우스꽝스럽다.
하아, 저 자식은 나날이 어휘력이…….
언젠가는 나보다 더 한국어를 잘하게 되는 거 아닐까?
아무튼, 제롬 덕분에 한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밥 데일런이 왜 그렇게 대중들을 멀리하는지 알 것도 같달까.
팬들의 사랑으로 그리고 세상의 관심 덕분에 음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건 맞지만, 여러모로 난감하단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갈수록 강해지는 이놈의 자의식 과잉.
흔히 스타 병이라고 불리는 불치병이 슬금슬금 날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짝!
가볍게 두 뺨을 때리곤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에.
그러자, 집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라 날 바라본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저 지옥 같은 곳을 뚫고 왔더니만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런 거에요.”
서둘러 둘러대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제이미 핸드릭스의 수첩을 펴들었다.
음악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 묘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직은 명확하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새벽녘에 찰리를 만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얘기하자 찰리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가게 매출에 대한 걱정 따윈 보이지 않았다.
순수하게 나와 함께 일하지 못하게 된 걸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위층에 사는데요, 뭐.”
만나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듣고야 찰리의 표정이 펴졌지만, 나로서도 아쉬웠다.
거기서 일했던 시간들은 내게 있어서도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해가 뜨고 다시 해가 질 때까지 수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찰리스에서 일할 순 어려울 테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긴 하겠지만, 내가 계속해서 음악을 하는 이상은……. 역시 무리겠지.
그렇게 찰리스의 일을 마무리 짓고, 그때부터 난 집안에 틀어박혔다.
학교는 일단 며칠 쉬기로 했다.
어차피 방학이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에단과 함께 하는 소모임은 일주일에 세 번, 그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물론 니콜 교수님도 마찬가지.
세 사람과 함께, 혹은 따로 찾아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빌보드 차트에 일명 줄세우기를 하고 난 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 일주일쯤 되었을 때 마침내 앨범이 출시됐다.
그 덕분인지, 빌보드 차트에서 순위가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타오르던 불길에 대고 기름을 부은 격이랄까.
마침내 내가 이번에 낸 열 곡이 전부 빌보드 차트 10위까지 도배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앨범 차트에서도 곧바로 1위로 등극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거기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권까지 차트를 점령하며 불길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보고 있어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질주였다.
그때쯤 좋은 소식이랄지, 골치 아픈 일이랄지. 어머니께 전화가 걸려왔다.
직접 오시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전화부터 한다는 어머니셨다.
- 아들, 네 아버지랑도 상의해봤는데 엄마로선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려워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요?”
- 혹시 서일 재단이라고 알아?
“글쎄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 있어. L 그룹 휘하의 재단인데, 아무튼 거기서 우리 재단이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네?
음, 대충 알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일이다.
잘나가는 배에 한 발 걸치는 거야 흔한 일이니까.
“돈 모자라요?”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우린 아직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지 않잖니. 그 때문에 자금이 넘쳐나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있달까. 좀 힘드네.
“그런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그건 인력이 보충되면 차차 나아질 테니까. 저도 제가 아저씨랑 샤오린에게 얘기해서 쓸만한 인력들 구해볼게요.”
- 그건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 의아해졌지만, 일단 기다렸다. 뭔가 더 하실 말씀이 있는 거 같아서.
아니나다를까.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 영국 왕실에서도 연락이 와서 말이야.
응?
영국 왕실?
뜻밖의 얘기에 눈을 치떴을 때, 어머니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 두바이 쪽에서도 연락이 왔고. 아, 중국 쪽에서도…….
이런! 내가 생각이 짧았네.
지금 어머니께서 하시는 일을 그저 한국에 국한한 일로 치부하고 있었다니.
재단 ONEZ는 한국 기업, 아니 재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한국을 벗어나 세계로 뻗어 나가는 국제적인 재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간과했네.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문제는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물론 어머니께서 하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셔도 좋구요.”
- 아니. 내 생각에도 아들 판단이 맞는 거 같아. 알겠어. 일단 지켜보기로 하자.
나랑 대화하는 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어머니의 음성은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누구 외할아버지 딸 아니랄까 봐.
진짜 아들로 태어났다면, 외할아버진 서슴없이 어머닐 후계자로 지목하셨지 싶다.
“조만간 한국 들어갈 거에요. 그러니까 그때 봬요.”
- 정말? 하아, 우리 아들 보고 싶네.
“저도요. 엄마, 사랑해요.”
닭살이 돋긴 하지만, 그래도 진심이었다.
그걸 느끼신 걸까?
어머닌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으셨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다시피 한국에 가긴 가야 하는데…….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외할아버지랑 한 약속. 광고 한두 개는 찍어줘야 할 텐데 말이다.
아, S 전자 광고도 찍어야 할 테고.
문제는…….
비행기를 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부터가 진짜 문제다.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밀어닥칠까?
그 외에도 사람들은 또 얼마나 몰려들 거고.
차라리 그들이 전부 팬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겠지만, 개중에 절반 이상은 아마 일시적인 호기심과 어떻게 해서든 인터뷰를 따내려는 자들일 테다.
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골이 다 지끈거린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지금도 충분히 뜨거운 한국인데, 내가 직접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고 팀장님이 방송국 피디들과 전화하며 끙끙거리는 모습이 그려져서.
아니, 고 팀장님은 오히려 일없다는 듯 배짱을 부리시려나?
아, 그러고 보니 형수님 산달이 머지않았네.
쯧, 이러거나 저러거나 한번 가긴 가야겠구나.
대충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막 돌아섰을 때였다.
“도준.”
어마, 깜짝이야!
등 뒤에 바로 서 있던 캘리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그러곤 눈을 껌뻑이고 있자, 그녀가 풉하고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금 진지한 표정이 되어 내게 물어왔다.
“지금 시간 돼요?”
“그, 그야……. 얘기하세요.”
“여기선 좀…….”
단둘이 있는 게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까닭을 찾지 못했다.
“…제방으로 가죠.”
주위를 둘러보니 딱히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안심하곤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
대신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문을 빼꼼히 열어놓았다.
그러자, 캘리가 날 흘겨보곤 말했다.
“진짜 확 잡아먹어 버릴까 보다.”
“하! 하……. 하하하! 절대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좀 더워서…….”
멋쩍게 웃어 보이자, 그녀는 픽하고 웃고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의자까지 양보해줬는데 왜 하필 내 옆에 앉는 건지.
두 사람이 끝자락에 앉다 보니 침대가 푹 가라앉은 게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도준은 참 대단한 거 같아요.”
“뭘요.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요. 그리고 나 혼자 한 것도 아니고. 다들 도와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거에요.”
“겸손하기도 하지. 전 도준의 그런 점이 좋아요.”
깜박이도 켜지 않고 훅치고 들어오는구나.
사람 심장 떨리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지구 상에서 가장 핫한 사람은 도준일 거에요. 그런데도…….”
난 얼른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들었다가는 손발이 없어질 거 같아서.
“에이, 그게 중요한가요? 인기? 그런 건 어차피 내 실력이 진짜가 아니라면 언제든 사라지고 말 신기루 같은 거잖아요.”
말을 내뱉고 나니, 오글오글. 이건 뭐 중2 병도 아니고.
이런 식의 대화는 좀…….
그건 그렇고.
보지도 않아도 느껴진다.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내 뺨이 그대로 뚫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게 부담스러워서 엉덩이를 꼼지락거려 거리를 벌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
“영화 한 번 안 해볼래요?”
에?
영화?
“그게 무슨 말이죠?”
눈이 동그래져서 그녀를 바라보자, 캘리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가 얘기했다.
“제가 아는 감독님이 한 분 계시는데, 도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네요. 듣는 내내 어찌나 떨리던지……. 제 개인적인 바람으론 도준이 꼭 승낙했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주연도 맡고…….”
듣고 있는 내내 머릿속이 윙윙거린다.
대체 뭔 일이래?
파도가 한 번도 아니고 연속해서 쳐대고 있는 느낌이다.
빌보드에 뉴욕 오케스트라. 거기에 재단 문제까지.
헐! 한데 이젠 할리우드에서까지 손을 내민다고?
그것도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