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185. 그게 중요한가요? (3)
고백하자면 난 이날 이때껏 가위 한번 눌려보지 않은 사람이다.
어째서냐고 물으면 달리 대답할 말은 없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
아무튼, 그 때문에 나는 가위에 눌렸을 때의 감각을 전혀 알지 못한다.
엄청 끔찍하다고들 하는데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데, 지금 이 순간에는 알 것도 같았다.
몸이 굳어버린 채 손가락은커녕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그 감각.
숨조차 쉬이 쉬지 못했고, 침조차 마음껏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돌처럼 굳어서 캘리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일순간 깨달았다.
응?
옷을 입고 있어?
그렇다는 건…….
씹다가 만 껌처럼 곤죽이 되어버렸던 머릿속도 차차 정리가 되면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사태가 파악된 나는 얼른 눈알을 굴려 내 상태부터 확인했다.
“휴우…….”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내 입술을 비집고 흘러, 아니 터져 나왔다.
예상대로였다.
나 역시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다!”
내가 중얼거리자, 캘리가 물어왔다.
“뭐가 다행이에요?”
어젯밤같이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진 덕분에 편하게 말하기 시작한 그녀였다.
“아, 아니…….”
그때였다.
턱!
뱀처럼 내 목을 감아오는 물체. 어찌나 두툼한지 난 무슨 몽둥이인 줄 알았다.
털은 또 얼마나 많은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는 사이 온몸의 솜털들이 오소소 일어섰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러 쳐냈다.
탁!
그와 함께 돌아보니, 디알로가 뒤척거리고 있다.
망할!
웃통을 왜 까고 있는 거야?
뿐만 아니다.
꿈틀꿈틀.
어라? 이건 또 뭐야?
발밑에 불룩 솟아있는 이불이 꿈틀거리기에 발끝으로 살짝 들춰보니, 그 안에서 빨강 머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하, 이것들이 미쳤나?
아니 집에 방도 많은데 왜 다들 여기서…….
옹기종기 모여서 뒹굴고 있다 보니, 아무리 큰 킹사이즈 침대라도 좁게만 느껴진다.
“호호호. 도준, 지금 표정 진짜 웃겨!”
캘리가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다.
젠장! 웃기기도 하겠다.
그렇긴 한데, 예쁘니까 저런 모습도 밉상으로 느껴지지 않네.
뭐, 친해진 탓도 있겠지만.
“웃지 마요.”
“크큭. 그치만 웃긴 걸.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난 여기서 안 잤어요. 그러니까 오해하면 안 돼요?”
“흠, 그래요?”
이걸 안타까워해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아까완 사뭇 달라진 분위기.
방금까지만 해도 인생 일대의 위기였는데, 한순간에 시트콤으로 전락한 상황이다.
침대 한쪽에선 상체를 벗어젖힌 디알로가 코를 골아가면 끊임없이 뒤척이고, 발아래에선 우리 빨강 머리 실비아가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이 상황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얼씨구!
실비아가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가며 엉덩이를 치켜들고 무슨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걸 보다가 그만 실소를 짓고 말았다.
그때 이미 침대에서 벗어난 캘리가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려는 눈치.
속으로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난 오히려 침대로 다가섰다.
진짜 캘리와 팔짱이라도 끼게 되면 자칫 어색해질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좋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실비아를 살짝 들어 옮겨놨다.
디알로 바로 옆에.
그러고 난 뒤 돌아서니, 캘리가 입까지 틀어막고 킥킥거리고 있었다.
***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인 우리 구석준 군이 아침마다 홍삼 즙을 쭉쭉 빨아 먹으며 하던 말이 있더랬다.
노는 것도 체력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라고.
그땐 비웃었는데, 맞는 얘기지 싶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석준이처럼 어디 즐거운 일이 없을까 하고 눈을 빛내며 놀고먹기만 하는 건 나로서는 벅찬 일이 아닐지.
어깨고 허리고 안 쑤시는 데가 없다.
게다가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뭐 술이라고 해봐야 맥주 한잔이랑 샴페인 몇 잔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골이 다 띵한 게 몸이 무겁기만 하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은 채 캘리와 함께 방을 빠져나오자, 리노가 쪼르르 달려와 날 맞는다.
“도준, 식사할래요?”
솔직히 땡기진 않는다.
속이 뒤집어질 거 같아서.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콩나물 국 끓여놨어요.”
음, 이 녀석 진짜…….
겨우 열 살짜리인데도 쓸만하다 못해 유능하기 짝이 없다.
한순간, 어딜 가더라도 이 녀석만은 데리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잠시 리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애도 똑똑하고, 착실한데……. 한번 키워봐?
자꾸 욕심이 나는 건 왜일까?
흠……. 근데,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나 아직 성인도 아니고, 누굴 가르치고 말고 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 쪽도 문제다.
아직은 사회경험도 많지 않고, 이렇다 할 주관이 뚜렷이 세워져 있지 않은 나인데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그래도 자꾸만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날 바라볼 때마다 저렇게 눈을 반짝이는 걸 보자면.
어제 일이 있고 나서 더더욱 그러는 거 같은데…….
“조금만 먹을게.”
“금방 준비할게요.”
체구에 비해 크기만 한 앞치마를 펄럭이며 돌아서 주방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리노. 녀석을 뒤쫓아 막 주방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내가 그랬잖아. 우리 이제 여기서 못 나간다니까.”
“그러게. 이제 어쩌냐? 오늘은 그렇다 치고 모레쯤엔 잡지 광고도 잡혀 있는데.”
“근데, 우리 때보다 더한 거 같지 않아?”
“와, 난 아까 깜짝 놀랐다니까. 봤지? 일대가 완전 사람들로 꽉 찼어.”
레이크헬이 소파에 앉아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느낌이 왔다.
아무래도 지금 밖이 난리인 모양인데…….
하긴 그러기도 하겠지.
어제 벌인 일도 있지만, 것보다는 빌보드 차트에 줄 세우기를 한 덕분일 테다.
아닌게아니라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창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와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 그리고 간혹 내 노래를 다 함께 부르는, 일명 떼창이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모인 걸까?
천명? 2천 명? 설마 더 많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계속 저러진 않겠지.
그러면 문제긴 문제인데.
계속 저 상태면 학교도 학교지만, 찰리스 일은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겠는걸.
에이, 설마 그러려고.
픽하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지나치듯이.
“그런 걸 겁내서 어떻게 살아가냐?”
혀까지 차주며 녀석들을 한차례 바라보자, 제롬을 비롯한 레이크헬 멤버들이 눈을 껌뻑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리노가 차려놓은 식탁에 앉았다.
그러곤 막 콩나물국에 숟가락을 담갔을 때였다.
핸드폰이 걸려온다.
니콜 교수다.
- 도준, 축하해요.
일단 축하인사부터 건네온 교수님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셨다.
- 교향곡 문제 때문에 그러니까, 이따 학교로 오지 않을래요?
“교향곡이요?”
- 만나서 얘기해줄게요. 오후 1시 어때요?
시간을 확인하곤 대답했다.
“괜찮을 거 같아요. 예, 예. 그럼 그때 봬요.”
전화를 끊고 났을 땐 이미 내 주위엔 레이크헬이 잔뜩 모여 있었다.
와, 이 자식들 귀도 밝지.
그래도 소파가 있는 거실에서 주방까지 거리가 있는데, 어떻게 듣고서 이렇게 모여드는 건지.
“교향곡?”
“도준! 너 설마 교향곡 작곡한 거야?”
“쯧, 진짜 괴물 같은 놈이네!”
“그럼 너, 막 지휘봉 잡고 오케스트라 지휘하고 그러는 거야?”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옆에서 빛나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는 캘리와 리노의 눈길도 부담스럽고.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꺄아아아아아악!”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실비아가 튀어나왔다.
움찔!
그녀는 우릴 보더니 얼굴이 빨개져서는 얼른 3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몇 초인가 지났을 때, 다시 문이 열리며 뒤이어 디알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쿡!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아마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상황인가 싶겠지.
그 사이 옷은 챙겨 입었는지 아까처럼 웃통을 까고 있지는 않았지만, 얼떨떨한 표정에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디알로의 뺨에 시뻘건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 모습에 빵 터져서 킥킥거리고 있자, 모두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가 웃으면서 사정을 말해주자, 다시 한 번 주방이 들썩거렸다.
레이크헬을 비롯해 모두의 웃음소리로.
“미안 미안.”
그 후로 몇 번이나 두 사람에게 사과를 했지만, 어지간히 삐쳤는지 나하곤 말도 안 섞는 디알로와 실비아.
흠, 근데 은근히 어울리는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
와, 씨! 진짜 욕 나오려 하네.
집 앞에 모여 있는 인파를 뚫고 벗어나는데 무려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2천 명?
내가 보기엔 못해도 3천 명은 넘을 거 같았다.
건물을 나서기 무섭게 날아드는 환호성과 비명에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도로 건물 안으로 들어갈 뻔했다니까.
그나마 경찰들이 통제를 해주어서 그랬지, 안 그랬으면 진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을 터다.
아무튼, 그 덕분에 약속 시각에 늦고 말았다.
삼십 분이나 일찍 나왔는데도.
그렇게 간신히 줄리아드로 왔는데…….
“저거 킴 아냐?”
“꺄아아아악! 킴이다, 킴!”
“김도준! 김도준! 김도준!”
뭐, 뭐야!
줄리아드의 학생들이 날 알아보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다.
아니, 얘들은 또 왜 이래?
허구한 날 무대에 서고, 날이면 날마다 공연하는 게 일인 녀석들이.
더구나 어릴 때부터 천재로 떠받들어지며 커온 녀석들 아냐? 근데 뭐냐고, 이 반응은?
결국, 여기저기서 몰려든 학생들한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어야 했다.
그 덕분에 또다시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미안해요. 약속이 잡혀 있어서요.”
그렇게 말했지만, 물러날 기미들을 보이질 않는다.
결국, 난 교수님의 이름을 팔아야 했다.
“니콜 교수님께서 부르셔서 가는 중이거든요.”
히익!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학생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역시 ‘마녀’의 위상은 장난이 아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는 건데.
속으로 혀를 차면서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저만치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도미니크?
응? 근데 뭐야?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뒤를 돌아 복도 쪽으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헐! 날 보자마자 달려와 또다시 시비를 걸 줄 알았더니만.
저런 모습……. 녀석답지 않잖아!
한숨을 폭 내쉬며 니콜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 도준. 늦기에 못 오나 했어요.”
당연히 늦었다고 화를 낼 줄 알았더니, 니콜 교수님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여전히 섹시한 자태로 다리를 꼬면서.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폭탄부터 던지시고 본다.
“초연 잡혔어요.”
“예?”
“김도준 교향곡 1번 말이에요. 뉴욕 오케스트라에서 초연을 하겠답니다.”
헐! 진짜?
“어, 언제요?”
“3월 13일. 센트럴 파크에서.”
언젠가는 이런 날도 오겠지 싶었지만, 그게 설마 지금일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내가 만든 곡은 어지간한 오케스트라라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니까.
근데, 그걸 무대에 올리겠다고?
가만, 근데 지금…….
“센트럴 파크요?”
당연히 물을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는 교수님.
“그럼, 야외공연인가요?”
씨익.
“직접 작곡했으니 알 거 아녜요? 연주자만 몇 명인데, 그 규모면 차라리 연주홀보단 밖이 낫지 않겠어요?”
납득은 된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초연인데 야외공연이라…….
하아, 나도 모르겠다.
다른 건 다 떠나서 진짜 내가 만든 교향곡이 연주된다고?
난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 되어 니콜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반면 니콜 교수님은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빙긋이 웃고 계실 뿐이었다.
얼떨떨해하는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더니, 일순 표정을 바꾸며 진지한 얼굴을 해 보이셨다.
그러곤 얘기했다.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자라도 되는 듯이.
“그날, 클래식의 역사가 바뀌게 될 거에요.”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