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79화 (179/260)

# 179

#179. 증명(2)

해가 진 도심은 화려하기만 했다.

거리 곳곳이 휘황찬란한 불빛에 휩싸인 채, 낮과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활달하고 쾌활한 여자가 달이 뜨자 무도회에 가기 위해 드레스를 입고 공들여 화장을 한 것처럼.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다름 아닌 광고판 하나.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걸린 광고판에는 묘한 광고가 떡하니 떠 있었다.

검은 바탕에 빛나는 선으로 그어진 실루엣.

지난번보다 한결 더 선명해진 모습은 누가 봐도 핸드폰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터다.

그리고 그 아래에 쓰인 문구가 모두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직접 운전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니콜 교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광고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은 행복해진다……라.”

그런 그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미 도준으로부터 대강의 얘기를 들은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제자가 자랑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도준과 했던 약속이 도무지 이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그녀의 입에서 불만 섞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고지식하기는!”

핸들을 꺾으며 그녀는 투덜거렸다.

“그깟 전통이 뭐라고. 다들 눈들이 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당연한 얘기다.

물론 그들도 알고는 있을 거다.

도준이 만든 곡이 어떤지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곡이란 것쯤은 굳이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을 터.

그 증거로 그들은 악보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들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곧이어 고개를 내젓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총대를 메기 싫다는 거겠지.

물론 이해는 간다.

파격도 어느 정도여야지.

“악기구성만이라도 기존의 체계로 바꾸면 안 되겠소?”

이번에 만나고 온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 슈봐브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면서 그런다.

악기를 바꾼다는 건 달리 말하면 작곡가를 조롱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차라리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못한 얘기였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상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을 때였다.

부르르르르.

보조석 위에 대충 던져놓았던 백 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때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고, 그녀는 그 틈을 이용해 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름을 확인한 순간, 니콜 교수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기대와 두려움이 한데 섞인 눈빛이었다.

- 오랜만입니다. 니콜 교수. 혹시 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한 건 아닌지.

“아닙니다, 캘러웨이 교수님,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그러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다는 속내를 들키지 않도록 노력하며 얘기하는 그녀였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기대감은 그런다고 쉽게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 보내주신 곡은 확인했습니다. 그 때문에 연락을 드린 건데, 일단 관심이 갑니다. 아니, 솔직히 놀랬습니다. 만일 우리 쪽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면 초연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괜찮다면 우리 필하모닉에서 한번 해보고 싶군요. 아, 흥분하는 바람에 제 얘기만 하고 있었네요. 어떻습니까? 구체적인 얘기는 만나서 했으면 합니다만.

과감하고 호쾌한 성격답게 빠르게 쏟아내는 캘러웨이의 얘기에 니콜 교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게 저도 좋겠네요. 언제쯤 찾아뵈면 좋을까요?”

- 괜찮으시면 내일 어떻습니까? 하하하. 이럴 땐 거리가 가깝다는 게 무척 편하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 식사나 함께하시죠.”

- 오케이.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니콜 교수가 몰고 있는 차 안에서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공항에서 만난 어머니는 살짝 상기된 얼굴이었다.

전화로 대충 사정 설명을 했기 때문에 이미 내용을 알고 계셨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아하시는 눈치다.

“아드으으으을!”

이국땅에서 만나서 그런가.

어머닌 날 보자마자 덥석 끌어안고는 격하게 반가워하신다.

그러곤 이어진 한마디는…….

“밥은 먹었니?”

하아, 진짜 한국사람 아니랄까 봐.

왜 한국 사람은 첫인사가 항상 둘 중 하나일까?

몸은 어떠냐? 혹은 밥 먹었냐?

어떻게 보면 한심한 얘기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고, 서로 간에 궁금한 건 또 얼마나 많은데…….

한데 희한하게도 그 말을 들으면 가슴 한편이 따스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뭐,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이란 거겠지.

당연히 그게 싫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밥 얘기부터 하는 한국인들 특유의 인사가 나는 좋았다.

그만큼 상대방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다는 방증일 테니까.

“지금이 몇 신데요. 지난번에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김치랑 볶음 고추장, 장조림으로 두 그릇이나 싹싹 비웠는걸요.”

“어머! 그랬니?”

입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진 채 어머닌 흐뭇하게 눈웃음을 짓고 계셨다.

“그럼 엄마랑 멋진 카페에 가서 차 한잔할까?”

내 팔짱을 끼며 어머닌 평소보다 한층 더 올라간 텐션으로 얘기하셨다.

“좋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사님.”

“호호호. 그러세요. 미스터 킴.”

“저만 믿으십시오.”

깔깔거리는 어머닐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소호 거리 끝자락에 있는 노상 카페에서 찻잔을 나누며 얘기했다.

“부담되시면 안 하셔서도 되요.”

“그런 건 아니고…….”

분명 좋아하실 거라고 믿었는데, 어머닌 망설이고 계셨다.

그 이유를 모를 내가 아니다.

아마도 혹여라도 자신 때문에 내가 피해라도 입게 될까 봐 고심하시는 거겠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재단 설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회사 측에서 처리해놓은 상태에요. 알고 계시겠지만, 법적인 문제도 아버지께서 죄다 정리해놓으셨고. 문제는 재단 이사장 자리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인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앞으로 적잖은 돈이 움직일 것 같아서 좀처럼 결정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 말 그대로였다.

유능한 사람은 널렸다.

적어도 돈을 다루는 일에 한해선.

창의적인 사고보다는 청렴함과 철저한 자금 관리에 특출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 어지간해선 못해내는 게 더 어려운 자리였으니까.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맡길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다루는 금액 자체가 어지간한 기업 뺨따귀 때릴 정도니까.

초기 투자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선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때, 내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샤오린이었다.

같은 동양인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중국인 특유의 감성을 가져서인지 그녀는 스스럼이 얘기했던 것이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어머니께 맡겨보는 게 어떻겠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워낙에 활동적인 분이신데다가 외할아버질 닮아서 과감하면서도 철저한 일 처리가 가능하신 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셨으니까.

거기에 더해서 한때 피아노를 전공하셨던 만큼 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으시니, 이 이상 적합한 사람도 없을 터였다.

“어머니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일은 아닐 거에요.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전 어머니께서 맡아주셨으면 해요.”

담담하게 내 생각을 얘기하자, 어머닌 날 가만히 바라만 보셨다.

그러다가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더니 손을 뻗어오셨다.

스윽 스윽.

내 머릴 쓰다듬으시며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 진짜 다 컸네.”

“그럼, 승낙하신 거죠?”

어머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널 위해서라면 이 엄마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니. 하물며 그렇게나 이 엄마를 믿어준다는데, 하지 않을 까닭이 없겠지.”

한층 깊어진 미소 앞에서 나는 마주 웃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는 기쁨에.

그리고 어머니께서 행복해하시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여서.

***

두 번째 광고가 나가고 난 뒤 사람들은 줄곧 예상해왔었다.

머지않아서 세 번째 광고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그때쯤에는 새로 출시되는 걸로 확정된 N10의 실체도 확인할 수 있을 테고, 그간 광고에서 주구장창 떠들어대던 ‘세상은 행복해진다.’라는 캐치 플레이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리라고.

하지만, 2월에 들어서고 추위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할 때에도 그럴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관심은 하루가 다르게 식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2월 13일.

광고가 떴다.

제품 자체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구체적인 이름까지 명시된 광고였다.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하긴 이제 와서 그런 건 별 의미가 없기는 했지만.

다들 이미 짐작이 아니리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아스트로 시리즈 플래그십 모델, N10.

다만, 희한한 것은 광고 어디에서도 기기에 대한 스펙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김도준?”

유려한 곡선과 정교한 커팅으로 마무리되어 전작에 비해 한결 세련된 디자인을 갖춘 N10. 그 아래 쓰인 문구에선 행복이라는 단어 대신 김도준이란 이름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N10으로 김도준의 신곡을 들으세요.

무언지 모를 배신감이 모두의 가슴을 스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설마하니 그 행복이라는 게……. 결국 마케팅에 불과했던 건가 싶어서.

말할 것도 없이 인터넷이 끓어올랐다.

- 진짜 너무한 거 아님? 그러니까 뭐야? N10을 사면 김도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런 얘기 아니냐고!

- 아무래도 이번엔 S 전자가 무리수를 둔 게 아닌가 싶네요. 지난번에 허먼 사를 인수하고부터 줄곧 이상한 쪽으로 가는 듯.

- 글쎄요. 아직은 섣부른 판단 아닐까요?

- 맞아요. 주니 오빠가 겨우 돈 몇 푼에 그랬을 리는 없어요!

- 과연 그럴까? 그 돈 몇 푼이 김도준한테는 어떨지 몰라도 절대 적은 돈이 아닐 텐데? 적어도 10억은 받았지 싶다.

- 헐! 대박! 광고 한번 찍고 10억이면……. 장난 아니네요.

- 윗분 세상 물정 모르시네. 요즘 탑급 치고 그 정도도 못 받으면 둘 중 하나죠. 바보거나 애당초 탑급이 아니었거나.

- 지린다. 10억이라니. 난 평생 몸부림쳐도 못 모을 금액이네. 아 쓰벌, 박탈감 느낀다.

- 사는 세상이 다른 겁니다. 그냥 구경하듯 즐기는 게 최선이죠.

- 그나저나 정말 김도준 신곡을 들으려면 무조건 N10을 사야만 한다는 건가?

- 그거야말로 무리수 아닐까 싶은데요? 아무리 팬층이 두터워도, 이번엔 꽤 많은 이탈이 있을 듯. 김도준 노래 한두 곡 듣자고 핸드폰을 바꾸라는 건 좀…….

- 한두 곡은 아니죠. 들리는 소문에는 김도준이 처음으로 내는 정규앨범이라고 하던데.

- 와, 씨! 장난 아니네! 이거 완전 팬들을 농락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뭐야? 킴또춘의 신곡을 들으려면 핸드폰을 사라? 물경 100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물건을? 쯧, 내가 진즉 알아봤더랬다. 재벌가 출신들이 다 그렇지.

대체로 이런 반응들이었다.

반쯤은 요즘 많은 나라에서 대세라고 할 수 있는 김도준의 신곡을 앞세워 자사의 주력 모델 판매에 박차를 가하는 S 전자의 지나친 장삿속을 성토하거나, 그런 S 전자의 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술혼을 팔아넘긴 채 장사수단으로 전락한 김도준을 욕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나마 언론에서는 S그룹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S그룹에서 사전에 기사 자체를 틀어막았는지, 대체로 호의적인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두 가지에 집중되었다.

새로 출시되는 N10의 스펙을 공개하면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김도준의 신곡을 실은 게 분명해 보이는 N10의 마케팅이 얼마나 주효할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는 사이, 2월 14일이 되었다.

예약판매조차 하지 않고 단행된 판매였다.

그리고 시판 당일.

N10이 판매를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인터넷이 달아올랐다.

그것도 전 세계적인 반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원을 넣자 드러난 N10의 메인 화면에 떡하니 떠있는 앱 하나.

하프 모양의 아이콘 아래 김도준이라는 세 글자가 찍힌 애플리케이션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호기심에 또 누군가는 기대감에 이 앱을 터치한 순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S 전자가 이번 광고 내내 행복이란 단어를 언급했는지.

겨우 하루.

모두의 시선이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얘기했다.

역시 김도준이라고.

그리고 누가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사방팔방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전날까지 생각하고 있던 게 오해였음을 물론이고, 이제부터 시작될 김도준의 시도가 얼마나 큰 각오로 시작한 것인지.

그로 인해 어쩌면 전 세계 음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세계는 서서히 달아올랐다.

고작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애플리케이션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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