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 무슨 의미가 있죠? (3)
레이크헬 멤버들이 멈칫하는 게 보인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서, 서른여섯 곡?”
예상했던 질문이고.
“일단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해주자, 유진이 기막히다는 듯 되물어왔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글쎄. 말 그대로인데.”
내가 웃어 보일 뿐 더 이상 말해줄 것 같지 않자, 다들 벙찐 표정으로 날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콜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연습실을 울렸다.
“……괴물 같은 놈.”
***
녹음해야 할 노래가 서른여섯 곡이나 되다 보니 연습을 마무리하는 데만 사흘이 소요되었다.
사실 이것도 빠른 것이었다.
나 혼자라면 조금 더 빨리 끝낼 수 있었겠지만, 레이크헬이 합류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고나 할까.
그리고 녹음 당일. 아니, 녹음 첫째 날이라고 해야 하겠지.
아무튼, 녹음은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샤오린이 전문가들을 동원해 최상의 기기들로 세팅해놓은 게 효과를 발휘했다.
이미 여기서 ‘더 시트’의 OST를 녹음한 적이 있었던 레이크헬이었지만,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죽이는 거 같아.”
“내 말이. 어지간한 스튜디오보다 나은 거 같지 않아?”
“난 이젠 다른 데선 녹음 못 해.”
“뭘 그런 걱정을 해? 다음에도 여기서 하면 되지.”
당연하다는 듯 얘기하는 디알로의 말에 다들 킬킬거리며 녹음을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기막히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놈들이다.
그래, 해라 해.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아니, 설사 닳으면 또 어때?
어차피 쓰려고 만든 건데. 다른 이들도 아니고 레이크헬이 사용하겠다면 언제든 오케이지.
“자, 그럼 시작해볼까?”
녹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났을 때, 레이크헬은 녹초가 되어 늘어져 버렸다.
“와, 진짜!”
제롬이 혀를 차며 말을 잇지 못했고, 다른 이들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베릴 만이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머리카락까지 젖어 있을 정도로 지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미안해서 말했다.
“다음에는 내가 너희 앨범에…….”
“도준.”
물병째로 들이키며 숨을 헐떡이던 콜린이 날 부르고 있다.
“……?”
“우리가 참여하는 곡이 몇 곡이지?”
“……여섯 곡.”
그는 날 빤히 쳐다보다가 재차 물었다.
“거기서 한 곡만 더하면 정규앨범이야. 인트로까지 집어넣으면 앨범 한 장 구성하는 데 문제없을 정도지. 후후, 이 정도면 거의 앨범 한 장을 통으로 녹음한 거 아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뭐긴 뭐겠어?”
콜린은 씩 하고 웃더니 말했다.
“이거 그냥 우리 이름으로 내자.”
헐!
이 날강도 같은 놈들이.
지금 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는 알고…….
“크큭. 조크! 조크!”
인상을 팍 구기고 있을 때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터뜨린 콜린이 다시 말했다. 손가락 세 개를 세워 보이며.
“세 번.”
“응?”
“한 앨범에 두 곡 이상 피처링. 계산상으로 따지면 적어도 세 번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콜린의 얘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쯧. 틀린 말도 아닌지라 알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부르르르.
전화가 울린다.
진동소리에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한데 내 것이 아니다.
그럼……?
저만치서 축 늘어져 있던 제롬이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뒤이어 내 쪽을 한차례 바라보곤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통화를 시작했다.
스피커폰으로.
“어, 리노.”
리노?
설마……. 그 리노?
뜻밖의 이름에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때였다.
- 제롬!
핸드폰 스피커에서 어딘지 모르게 죽다 살아난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 어디…….”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저 무서웠다고요. 형들만 믿고 왔는데, 여기서 미아가 되는지 알고.
“아, 미안 미안. 녹음하느라 전화가 온 줄 몰랐어. 근데, 지금 도착한 거야?”
- 도착이야 세 시간 전에 했죠.
“그럼 공항?”
- 아뇨. 여기 타임스퀘어인데요?
순간 말이 없어진 제롬. 뿐만 아니라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잃고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 리노가 미아 어쩌고 한 건 뭐였지?
- 전화가 안되길래 공항에서 도너스 하나 사 먹고, 택시 탔어요. 그리고 여기서 제일 유명한 데로 가달라고 했더니 여기에 내려주던데요?
잠시 침묵에 휩싸여 있던 녹음실에 이내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큭. 진짜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 자식 아들 맞다니까.”
“진짜 간이 부은 건지. 얀마! 다 좋은데, 절대로 뒷골목으론 들어가지 마! 그러다 강도라도 만나면 답 없으니까.”
- 어? 디알로 형?
“내 말 알아들었어?”
- 에이, 형도 참. 제가 어린앤가요?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열 살짜리 애가 어린애가 아니면 뭔지.
듣고만 있던 내가 다 황당해진다.
- 근데 이제 어떡해요? 거기 주소 찍어주면 택시 타고 가면 될 거 같기도 한데…….
“시끄럽고. 거기 있어. 우리가 갈 테니까. 지금 어디 있는데?”
그때였다.
“손님,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헐, 지금 이 소린?
수화기 너머가 조금 소란스럽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였다.
- 식당이요.
***
제롬과 디알로가 리노를 데리러 출발한 후, 콜린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그러니까, 리노 더러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단 말이지?”
“응.”
“그랬더니 덜컥 온 거고?”
“글쎄. 아직 결정한 건 아니고,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봐? 뭘?”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고 하더라고.”
참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보긴 또 뭘 봐?
그래도 하와이에서 리노하고 며칠 지내서 그런가, 반갑긴 하네.
“오케이. 무슨 얘긴지 알았어. 그럼 며칠은 여기서 머물겠네?”
“너만 좋다면…….”
“빨리도 말해준다.”
“미안. 말한다는 게 깜박했어. 요즘 정신이 좀 없었잖아.”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콜린에게 못 당하겠다는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이 자식들이! 이제 와서 내가 안 된다고 하면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거잖아! 이 망할 자식들아!”
소리는 버럭버럭 질러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호구 잡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날 믿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아닌게아니라 제 놈들 마음이랑 나랑 같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서 일을 벌인 거겠지.
그렇다곤 해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미국인들 치곤 너무 감상적인 거 아냐?
아무리 하와이에서 거의 가족처럼 지냈다곤 하지만, 그래 봐야 사흘 남짓인데.
그것도 인연이라고 애를 덜컥 부른다는 게.
그러고 보니 부르는 놈들이나 부른다고 오는 놈이나 대책 없기는 마찬가지. 것도 열 살짜리 애가 혼자서 온다는 게 말이 되나?
아니, 리노는 그렇다 치고 리노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보내신 거래?
후우, 어째 내 주위에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없는 건지.
더 깊이 생각했다가는 머리만 아플 거 같아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마루 누나가 날 찾았다.
“도준아.”
“예. 누나.”
“연락 왔어.”
“……설마?”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서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가 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어서 되묻자, 누나가 웃어 보이며 대답해주었다.
“그래.”
대답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머리였다.
동시에 가슴이 묵직해지는가 싶더니, 살짝 떨려왔다.
“언제 볼 수 있데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자, 마루 누나가 묘한 시선으로 날 보다가 말해주었다.
“일주일 뒤. 다음 스케줄 때문에 반나절밖에는 시간을 못 낸다고 하더라.”
“그 정도면 충분해요.”
머릿속으로 밥 데일런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하자, 누나가 머뭇거리다 물어왔다.
“근데, 그렇게 밥 데일런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쩐다?
노래방 얘기를 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한들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가볍게 말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오히려 그편이 나을 듯해서.
“그냥요. 요즘 곡 때문에 좀 고민하던 게 있어서요.”
“그래?”
살짝 의심스럽다는 반응이었지만, 넘어가 주는 누나였다.
미안해요. 누나.
이 문제만큼은 저도 좀처럼 쉽사리 털어놓기 힘들어서…….
속으로 누나에게 사과를 하며 돌아섰다.
그러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밥 데일런이 들고 있던 기타. 그 위에 새겨져 있던 하프 무늬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
다시 만난 리노는 그때 봤던 그대로였다.
여전히 쾌활하고 유쾌했으며 무엇보다도 아이답지 않게 말귀를 잘 알아들었다.
그러면서도 영악하다기보단 영리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대신 뭐 하날 가르쳐주면 절대로 잊는 법이 없었다.
더구나 집안일에도 능숙했다.
뿐만 아니라 게으르지도 않았다.
거기에 살갑기까지 하니, 마루 누나는 물론이고 고 팀장님까지 리노를 예뻐할 정도였다.
이해한다. 그 마음.
리노는 누가 봐도 괜찮은 녀석이었으니까.
아무튼, 리노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 집안에 웃을 일이 더 많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리노가 살짝 지쳐 있던 회사식구들과 레이크헬에게 활력소가 되어주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우리가 낸 곡은 빌보드 차트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고, 영화 ‘더 시트’는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전 세계를 휩쓰는 중이었다. 거기에 편승해 OST가 인기몰이를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캘리가 한번 찾아왔었다는데, 마침 내가 학교에 가있는 바람에 만나진 못했다.
저녁에 돌아오니, 제롬이 놀리듯이 그녀가 무척이나 날 만나고 싶어했다고 하며 안타깝게도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갔다고 얘기해주었다.
작은 외삼촌한테서 전화가 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할아버지와 약속했던 광고 때문이었다.
물론 사업적인 얘기는 아저씨가 알아서 하시겠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나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름 소통하려고 애쓰는 외삼촌이셨다.
흠, 외할아버지 뒤를 잇는 게 작은 외삼촌이 더 낫지 않을까.
큰 외삼촌에 비해서 카리스마가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오히려 작은 외삼촌처럼 좀 더 유연하고 적극적인 쪽이 낫지 싶은데.
쯧, 관두자. 다 쓸데없는 생각이지.
어차피 외할아버지 마음에 달린 건데.
픽하고 웃고는 날짜를 헤아렸다.
이제 이틀 남았나?
밥 데일런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아저씨셨다.
“알고 있겠지만, 내일부터 티저 광고가 나간다.”
알고 있다.
녹음이 끝나자마자 S 전자에 알렸고, 곧바로 출시 작업에 돌입한 상황.
이미 아스트로 폰의 주력 폰인 N10의 발표일도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사실상 준비가 끝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제안했던 대로 핸드폰을 통해 곡을 풀 방도도 마련해놓은 터였고.
그러니 시간은 더 이상 문제 될 게 없었다.
이번에는 오프라인 쪽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딱히 앨범 재킷이라든가 패키지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겠냐?”
“아저씨는요?”
“자식하곤. 우리야 네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지. 어차피 네가 혼자서 다 만들고, 부르고, 프로듀싱까지 하는데.”
“에이, 그래도 그건 좀 아니죠. 회사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저 아무것도 아닌 거 알잖아요?”
“말이라도 고맙다. 근데, 진짜 괜찮겠냐? 금액으로 따지면 상당할 텐데?”
아저씨의 눈빛으로 보건대, 저건 절대로 날 추궁하는 눈빛이 아니다.
오히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다.
그리고 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 기대를 배반할 일은 없을 터였다.
“아저씨.”
“…….”
“저 돈 많아요. 벌만큼 벌었다고요.”
내 말에 아저씬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러곤 말없이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다음날.
타임스퀘어를 비롯해 세계 각지의 주요 도시 한복판에 있는 광고판에 티저 영상이 떴다.
물론 같은 시간에 인터넷에서도 영상들이 올라왔다.
검은 실루엣에 은빛으로 빛나는 사각형.
단순하지만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실루엣 아래에 적힌 문구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다 함께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새로 출시되는 핸드폰의 이름이나 내 이름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두려워진다.
새로 출시되는 음원들.
그리고 그 음원들을 들을 수 있는 핸드폰.
이 두 가지의 케미는 단순히 상업적인 계약에 따라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화학작용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여태껏 날 성원해준 팬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돌려주는 내 마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라는 사람, 아니 내 음악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증명해 보일 시험무대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