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 무슨 의미가 있죠? (2)
노트북을 통해 빌보드 사이트를 바라보며 멍 때리는 중이었다.
진짜 1위?
아니, 이게 말이 돼?
저번 주와 저 저번 주에만 엄청난 대형가수들이 줄줄이 컴백했다.
그중 하나가 다름 아닌 레이크헬이었고.
‘SOMETHING OR NOTHING’의 경우, 3위까지 올라간 것도 어찌 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크헬의 곡을 리메이크한데다가 시기적으로 영화 ‘더 시트’의 흥행에 힘입은 바가 크다.
뭐,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의 공연 전에 마가렛 헤라시오네의 격찬이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고.
거기에 더해, 까닭은 모르겠지만, <뉴욕 포스트 저널>의 기자인 조나단이 엄청난 호평을 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이런저런 호재들이 모인 결과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3위까지 올라간 거지, 만일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빌보드 차트에 올라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1위란다.
레이크헬은 말할 것도 없고, 곡만 냈다 하면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대형가수들, 즉 세계적인 스타들을 제치고.
“다들 미쳤네요.”
내가 탄식하듯 중얼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베릴이 말했다.
늘 과묵한 면모를 보이던 평소와 달리.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벌어졌을 뿐이지.”
제롬 또한 한마디 보태는 걸 잊지 않았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제고 팬티를 뚫고 나오는 거에요.”
하아. 왜 하필이면 송곳을 팬티 안에 넣어놓았느냐고 따질 기력도 없다.
좋아서?
아, 물론 좋다.
내가 부른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는데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얘기일 테니.
하지만…….
그 문양.
밥 데일런이 가지고 있던 기타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하프 무늬가 이 순간에도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고 있었다.
혹시 잘못 본 건가?
세상에는 수많은 문명이 존재하고, 그 문명들은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며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유산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유산들 속에는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양들이 있었다.
대부분 토템에 기인한, 자연의 형상을 본뜬 무늬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하프 무늬처럼 인류 자체가 만들어낸 문명을 형상화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착각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지만…….
특히나 악기에 새겨진 하프 무늬란 건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울 정도니까.
그렇긴 한데…….
“저, 누나.”
“응?”
여전히 상기된 얼굴, 그러니까 양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날 바라보는 마루 누나에게 물었다.
“혹시 어제 얘기했던 거 가능하겠어요?”
“어제? 아, 그거.”
“…….”
“일단 오프라 쪽에 얘기해서 물어는 봤는데, 저쪽에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한다네?”
“밥 데일런이 승낙해야 한다는 거네요.”
“그렇지. 솔직히 어제와 같은 일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잖아.”
하긴, 밥 데일런이 아무한테나 연락처를 줄 리 없지.
만나주는 건 더더욱.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소리에 대한 문제.
그릇에 대한 문제.
목숨까지 걸린 문제는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다.
***
승승장구란 말로도 모자랄 판국이다.
누구 말마따나 포텐이 터졌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터.
미국 내 주간지와 일간지에 내 이름이 수도 없이 오르내렸고, 라디오를 틀면 심심치 않게 우리가 연주하고 부른 ‘SOMETHING OR NOTHING’이 흘러나왔다.
레이크헬 버전이 아니라.
덕분에 ‘더 시트’의 OST 앨범으로 발표한 그들의 곡이 2위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금 미안해져서 눈치가 보였는데, 녀석들답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대범한 건지, 무심한 건지.
아무튼, 그런 와중에 ‘더 시트’에서 내가 부른 노래마저 빌보드 차트 10권 안으로 들어오면서 정말이지 난리가 났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서구권도 서구권이었지만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에선 무슨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난듯한 분위기였다.
- 김또깡이 결국 해내는구나!
- 꺄아아악! 주니 오빠! 진짜 대단해요!
- 그렇지. 김도준이 인물은 인물이지.
- 생긴 것도 한 인물 하죠.
- 젠장! 내가 다시 태어나면 김도준으로 태어나 주겠어.
- 미친놈아! 김도준이 다시 태어나면 그땐 김도준이 아닐 텐데, 네가 김도준으로 태어나면 무슨 소용이냐?
- 윗분, 뭔가 문맥이…….
- 다들 봤죠? 한국의 침공……! 캬! 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 역시 우리 민족은 흥과 끼가 넘치는 민족이었다는 거지.
- 헐! 여기서도 국뽕 타령인가?
- 국뽕이고 나발이고, 도준 형님이 대단한 건 사실이잖아요?
- 그거야 그렇지. 와 그러고 보니, 이제 김도준은 월드스타인 거네.
- 한류가 부는 거죠. 지구 전체에!
- 근데요. 이번에 부른 곡은 김도준 혼자서 부른 게 아니지 않나요?
- 모르시는구나. 그거 주니 오빠가 직접 편곡해서 만든 곡이잖아요. 연주는 세션들이 했지만.
- 세션 아니고, 밴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아무튼, 들어보니까 레이크헬이 부른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더라고요. 듣고 있으면 마치 날 인정해주는 느낌이랄까. 잘하고 있다고…….
- 아! 들었어요? 요즘 김도준이 신곡 준비한다고 하던데…….
인터넷은 물론이고 SNS를 중심으로 하루에도 수만 개씩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서 내 이름과 곡명 그리고 빌보드란 단어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기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내 어릴 때 사진부터 시작해서 날 조금이라도 아는 지인들이라면 죄다 찾아가 인터뷰를 따서 기사로 올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시금 우리 형과 형수의 얘기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다행히 예전처럼 악의적인 기사들이 아니긴 했지만, 왠지 미안해져서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 자식이! 소심하긴! 나 네 형이야, 인마. 큼! 늘 네 앞길 막는 거 같아서 미안하구만. 쓸데없는 걱정 말고 네 일이나 잘해. 요즘 신곡 준비한다며?
깜짝 놀랐다.
우리 형이 아닌 줄 알고.
와, 사람이 결혼하면 이렇게 바뀌는구나…싶었는데.
- 자갸,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응? 흐흐흐. 나 잘했지.
그렇구나.
역시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 거구나.
진짜 감사합니다, 형수님.
우리 철딱서니 없는 형을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주셔서.
나는 마음속으로 형수한테 감사를 전하면서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다행히 다들 잘 지낸단다.
하긴, 본 지 얼마 안 됐다고 그새 무슨 일이…….
문득 떠오른 외할아버지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예전에 비해 급격히 왜소해진 몸 하며, 누가 봐도 안 좋아 보이던 안색 그리고 기침을 하시던 게 생각난 것이다.
형과 통화를 끝내고 나서 외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 어쩐 일이냐?
무뚝뚝하게 얘기하시지만…….
제가 할아버지 손자거든요?
내가 전화를 걸어서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에이, 할아버지도 참. 손주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 고얀 놈. 주둥이만 까져설랑은. 그렇게 할애비를 생각한다는 놈이 단 한 번도 이 할애비가 원하는 건 들어주지 않더냐?
“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광고도 찍어 드렸지, 응? 철마다 꼬박꼬박 잊지 않고 찾아뵙지. 게다가 제가 아니었어봐요. 할아버지께서 증손주를 보실 수 있었겠어요? 저 진짜 지난번엔 형 결혼시키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 쯧, 아주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다 대느라 애쓴다. 그래서, 언제 올 거냐?
젠장! 왜 이 대목에서 가슴이 쿡쿡 쑤시는 거냐?
살다 보니, 우리 할아버지 입에서 저런 말을 들을 날도 다 있네.
옛날 분답게 보수적인 면이 없잖아 있으신 할아버진, 툭하면 사내란 모름지기 정보다 일이 먼저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런데 봐라.
새해에 찾아뵌 지 얼마나 됐다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다시 한 번 짓씹으며 되물었다.
“지금 갈까요?”
- 흥! 입에 침이나 바르거라. 됐고, 봄 되기 전에 한번 오너라.
“봄이요?”
- 그래, 줄 것도 있으니. 아무튼, 그렇게 알고 들어가라.
“……예.”
그렇게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평소와 달리 덧붙이셨다.
아니 날 부르셨다.
- 도준아.
“예. 할아버지.”
- 높이 오를수록 외로운 법이다.
“…….”
- 힘들겠지만, 견뎌내야 한다. 알겠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시진 않겠지만.
“……그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 들어가마.
그러곤 끊겨버린 전
나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
희주를 비롯해 샤오린, 그리고 준영이 형과 그 밖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느라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는 사이,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심지어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인터뷰 요청과 함께 방송에 나와줄 수 없느냐는 문의가 쇄도했다.
하지만, 아저씬 딱 한 번 ‘어떡할래?’하고 물으시곤 내가 싫다고 하자, 군말 없이 알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당연한 일이겠지만 난 이제껏 인터뷰 한번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기 좀 올라갔다고 너무 건방 떠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나뿐만 아니라 회사 식구들 중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신경 쓰는 건 따로 있었다.
“잘 돼가?”
연습실로 들어가려던 중 마주친 마루 누나가 걱정스럽게 물어오고 있었다.
“연습 거의 끝나가니까, 조만간 녹음할 수 있을 거에요.”
“다행이네. 근데…….”
“……?”
“도준아. 누난 좀 걱정돼.”
“뭐가요?”
“빌보드 1위도 했고……. 솔직히 그동안 너무 달려왔잖아? S 전자 쪽에서도 급하게 생각하는 거 같지 않은데, 좀 쉬엄쉬엄 하면 안 돼? 학교도 방학 중이잖아.”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후우, 너 그러다가 지난번처럼 또 쓰러지면…….”
“에이, 이제 그런 일 없다니까 그러네요. 그리고 빌보드 1위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냥 성적표 같은 거지. 1위 한다고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말해봤지만, 여전히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마루 누나. 난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내 머리를 누나가 쓰다듬으며 말했고.
“알겠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대신 힘들면 꼭 말하기다?”
“알았어요.”
돌아서 연습실로 들어온 나는 잠시 누나를 비롯해 회사식구들을 떠올리곤 픽하고 웃고 말았다.
솔직히 지금 규모에서 달랑 세 사람이 날 케어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내게는 일당백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도 변함없는 사람들.
그동안 많은 질곡이 있었고 칭찬만큼이나 욕도 많이 먹었다. 그때마다 내 옆에서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었다.
일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그들이면 충분하고도 넘친다.
어차피 필요하면 알아서 인력을 확충할 테니, 회사일까지 내가 신경 쓸 이유도 없고.
“후우! 이제 마무리해볼까?”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막 연습에 돌입하려는 순간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이 활짝 열리더니, 콜린이 들어왔다.
뒤쪽에는 나머지 레이크헬 멤버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깜박이자, 콜린이 물었다.
“도준. 혹시 세션 안 필요해?”
흠, 그러니까 뭐야?
지난번엔 내가 OST에 참여했으니, 이번엔 자신들이 도와주겠다?
기브 앤 테이크라 이 건가?
뭐 나야 나쁠 것도 없겠지.
그럼,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곡 정도는 피처링으로 가볼까?
그나저나 이 자식들 몸값 장난 아닌데, 얼마나 줘야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뒤쪽에 서 있던 유진이 툭 하고 내뱉듯이 물어왔다.
“근데, 이번 앨범 몇 곡이나 실을 건데?”
“몇 곡 안 돼.”
씨익.
“서른여섯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