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 무슨 의미가 있죠? (1)
저건?
익숙한 문양은 그대로 눈동자에 틀어박혔고, 그 순간 머릿속에선 번개가 치는 듯했다.
생각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며 튀어나왔다.
“코인…….”
다행히도 그때 이미 밥 데일런이 기타를 든 채로 눈을 감고서 무슨 곡인지 모를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긴 스튜디오다.
그것도 생방송 중.
더구나 현재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이 방송을 지켜보는 이들만 해도 아마 수백만 명이 훌쩍 넘어갈 거다.
그런데 여기서 노래방에 대해 말한다?
설사 그 얘기를 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리에서 쉽게 나눌만한 얘기가 아니란 것만은 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노인과도 만난 마당에 이제 와서 밥 데일런이 어째서 저 문양이 박힌 기타를 들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종일관 그 문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 때문이었다.
그릇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고, 이제 막 엿보기 시작한 새로운 경지는 사실상 운이 좋아 그렇게 된 것일 뿐 실제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나 마찬가지.
당연히 묻고 싶었다.
당신은 지금 어떠냐고.
아니, 당신도 나와 같은 일을 겪었느냐고.
하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굳이 이 자리가 아니라도 영상통화가 시작된 직후부터 날 대하는 밥 데일런의 태도로 보아 다시금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거 같았으니까.
잠시 혼란 속에서 상념에 휩싸여 있는 동안, 이미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저마다의 악기를 다루기 시작했고, 에단 역시 바이올린을 들고 활을 켜는 중이었다.
나 역시 뒤늦게 일어나 기타를 집어들었다.
***
밥은 사실 지금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그게 본심이었다.
오프라 쇼?
평소에도 그다지 TV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다.
오늘도 그저 우연히 보게 됐을 뿐이었고.
한데…….
그는 세 사람, 금발의 미녀와 흑안의 미녀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귀공자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 잘생긴 청년의 합주를 들을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공연을 해온 그로서는 실력이 출중한 클래식 연주자들 또한 숱하게 만나 왔기에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타 음이 끼어드는 순간, 시큰둥한 표정이었던 밥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절묘하게 치고 들어와 세 사람의 연주와 밀고 밀리며 각축을 벌이는 일렉트릭 기타 음은 지난 세월 밥이 해왔던 시도들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으니까.
마치 거울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과 같은 시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라, 실제로 막상 해보면 그냥 어려운 게 아니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두 영역, 즉 클래식과 현대음악의 조화를 저토록 쉽게……. 아니, 듣는 사람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연주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밥만큼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하고 또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온몸으로 체험한 그였으니까.
한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도준의 등장과 함께 이어진 연주는 마치 인트로처럼, 밥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뿐이었지만 그 후에 오프라의 다소 무례한 도발에 대응해 도준이 들려준 바이올린 연주는…….
밥이 전화를 걸게 만들었다.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다시 한 번 느꼈다.
짜르르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도준이 예상했던 것보다 한 박자 늦게 기타를 치고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류. 그것은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정수리까지 한순간에 관통하며 밥을 흥분으로 몰아갔다.
마치 통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 잡았던 그 순간처럼.
***
쇼는 성공적이었다.
천만 명에 육박하는 시청률이 나온 것이다.
역대급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수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섯 사람, 정확히는 두 사람이 주축이 되고 세 사람이 세션이 되어 즉석에서 펼친 공연에 모두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Yes, '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on the sand?
Yes, 'n'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s, is blowin'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봐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요?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 봐야 백사장에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요. 그건 바람만이 대답할 수 있답니다.
밥 데일런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Blowin'in the Wind’을 시작으로 ‘Like a Rolling Stone’, ‘Knockin' on Heaven's Door’, ‘Don't Think Twice, It's Alright’를 비롯해 그간 밥 데일런이 발표해온 곡들이 연주되고 또 불렸다.
주옥같은 명곡들 사이로 오프라의 매끄러우면서도 감칠맛 나는 토크가 양념처럼 뿌려져 시청자들을 즐겁게 만들었고.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밥 데일런은 도준이 여태껏 발표해온 곡들을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는 알고 있었다.
덕분에 쇼가 진행되는 내내 연주된 도준의 곡만 해도 세곡이었다.
거기에 이번에 네 사람이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연주한 것까지 합치면 거의 콘서트 수준이었다.
무려 9곡에 이르는 연주였으니까.
그리고 무대를 이끌고 진행한 게 토크쇼의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수요일 저녁.
미국뿐만 아니라 전파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에 들썩이다 못해서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쇼가 끝났다.
“킴. 나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방송을 끝내고 돌아 나오는 길에 오프라가 도준을 붙잡고 한 말이다.
갑작스러운 얘기에 도준뿐만 아니라 에단 3인방 역시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예? 그게 무슨…….”
오프라는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한 채 말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처음 당신을 섭외하자고 한 건 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흥행적인 요소 때문이었지, 킴의 실력을 인정해선 아니었어요. 호호호. 웃긴 얘긴데, 제 아들이 당신보다 열 살이나 많다고요. 알죠? 엄마들 눈에는 자식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애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기분 나빠할 만도 한데, 그저 한차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도준이었다.
“다행이네요. 이해해준다니.”
“제가 아직 멀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씨익하고 웃는 도준을 오프라는 새삼스레 놀랍다는 듯 바라보았다.
동양인이라 그런가?
보통 저 나이대에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인기 가도를 달리게 되면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해지기 마련인데…….
그녀는 살짝 의아해졌지만, 금세 거두었다.
그보다는 도준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랄까.
좀 더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때였다.
“저, 오프라.”
“말해요.”
“초면에 실례일 수도 있습니다만…….”
도준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미국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답답할 정도였지만, 오랜 세월 그녀가 만나 온 사람 중에는 동양인들도 꽤 있었기에 ‘예의’라는 걸 몹시 중시하는 그네들의 사고방식을 이해 못 할 그녀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녀의 두 눈은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요.”
“호호호. 뭐가 그렇게 킴의 호기심을 자극한 걸까요?”
“다른 게 아니라요. 생방송 중에 화상 통화를 하는 게 흔한 일인가요?”
“그럴 리가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 역시 당황스러웠던 건 마찬가지에요.”
그녀의 얘기를 들은 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아니 중얼거렸다.
한데, 그 말이 오프라의 귓속으로 빨려드는 순간, 그녀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컨셉으로 나쁘지 않지 않나? 게스트와 화상으로 연결해 또 다른 게스트와 합주하는 방식.”
들으라고 한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는 몰라도 도준이 던진 화두는 오프라의 머릿속에 불꽃을 피워냈다.
‘게스트와 게스트. 화상을 중심으로 연결된 게스트들의 만남.’
한번 피어오른 불꽃은 급격하게 세를 불리며 타올랐다.
어느새 상상의 샘이 흘러넘친 오프라의 생각들은 입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쪽은 예고된 게스트.”
그 뒷말을 도준이 받고 있었다.
“다른 한쪽은 블라인드인 거죠.”
“친분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중요한 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합주가 시도된다는 거죠.”
홱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빠르게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보는 오프라의 눈동자가 반짝이다 못해서 레이저라도 쏘는 듯했다.
급기야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져스! 당신! 천재잖아!”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냥 이러면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
멋쩍은지 손을 내저으며 얼굴을 붉히는 도준.
그런 도준을 오프라는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말했다.
“킴, 나랑 친구 할래요?”
“예?”
“왜요? 이렇게 주름이 자글자글한 여자한텐 관심 없어요?”
농담을 던지고 있는 오프라를 바라보던 도준이 일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오프라.”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조마루는 흥분에 휩싸여 소리쳤다.
“이거 봐봐! 난리가 났어!”
그녀가 내미는 핸드폰에는 오늘 오프라 쇼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기사들이 엄청나게 쏟아져나와 화면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준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불태우고 심지가 다한 촛불처럼 축 늘어진 채.
대신 크리스티나와 조안나는 아직도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마루와 마찬가지로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기사들을 검색하며 눈을 빛내는 중이었다.
그러는 중에 때때로 꺅꺅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에단 역시 마찬가지.
다만, 그는 검색만 하는 게 아니었다.
어디론가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받으며 상기된 얼굴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오후, 해가 질 때쯤이 되어서야 도준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도준의 이름 석 자는 어제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상태였다.
“오올! 도준! 일어났어?”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씰룩이며 다가오는 디알로. 그가 어딘지 모르게 얄미운 표정으로 말했다.
“축하해.”
“……?”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도준에게 디알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던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곤 핸드폰을 켜서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넘겨주며 외쳤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하네, 친구.”
도준은 디알로가 넘겨준 핸드폰을 얼떨결에 받아 화면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도준. 한국에서 온 싱어가 미국을 집어삼켰다.]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네 명의 신성들. 그들이 일으킨 돌풍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김도준은 단순한 싱어가 아니다. 그는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아티스트일지 모른다.’ 밥 데일런이 격찬한 싱어송라이터.]
[비틀즈의 재림인가? 한국 록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황당한 제목들도 도배되다시피한 화면을 보고 있던 도준은 의아해졌다.
근데, 방금 지옥이라고 하지 않…….
하지만, 도준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디알로가 짓궂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으니까.
그 순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환호성과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려 밖을 내다본 도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찰리스 건물 앞을 점령한 건 물론이고 일대를 가득 채운 인파들.
그 모습에 기가 질려서 얼른 뒤로 물러나고 있을 때, 디알로가 다시 말했다.
징그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흐흐흐. 이제부터 알게 될 거야. 스타가 사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