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 상승세 (2)
오프라는 자신의 손에 들린 시트를 바라보았다.
네 명의 게스트.
그중 세 명은 전형적인 미국인들이었다.
나이도 한창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할 이십대 초반.
반면 한명은…….
‘한국인.’
게다가 이제 겨우 19살이란다.
머잖아 스무 살을 넘길 테니 틴에이저라고 하기에도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보기엔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출신이나 나이만 가지고 누군가를 무시할 만큼 어리석은 오프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륜을 아주 무시할 정도도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거쳐 온 길은 한마디로 말해 가시밭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흑인이라는 태생적 장벽, 여성이라는 사회적 장벽.
일찍 결혼해 아이를 가졌음에도 여전히 성공을 꿈꾸던 그녀에게 그 장벽들은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으며 또한 포기하지도 않았다.
동시에 가족에 대한 사랑 역시 놓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그것은 그녀에게 하나의 동력이었고, 또한 희망이었으며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으니까.
그러다가 다소 늦은 나이에 기회가 주어졌고, 오프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기로 번뜩이는 눈동자만큼이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 즉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공감해주는 재능을, 그리고 그걸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능력을 서슴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진심이 가득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에 빠져들었고, 그녀가 웃을 때 함께 웃고, 때론 눈물을 글썽일 때 함께 눈물을 흘렸다.
오프라가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 고해서 그 시간들이 녹록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의 이름을 단 쇼를 진행하면서 개인적으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일들을 겪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짐작조차 못했던 변화들과 맞닥뜨려왔으니까.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김도준’은 딱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터였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넘치는 재능으로 이미 절정의 자리에 올라버린 천재.
그러나 덧붙이자면, 세상에 넘쳐나는 천재들이 그렇듯이 아직 완성 되지 않은 이 천재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을 터였다.
설사 그가 레이크헬과의 친분과 줄리아드라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19살이란 나이는 그런 나이인 것이다.
‘그래도 제법이긴 했지.’
오프라가 어젯밤 자신에게 주어진 김도준의 곡들을 들었던 것과 급하게 한국으로부터 입수한 자료들을 읽었던 걸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며 스텝 한명이 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왔다.
다른 방송과 달리 자극적인 편집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진정성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내세워 그 어떤 경우에도 생방송을 고집하는 오프라 완다쇼가 시작된 것이다.
***
“오늘도 집을 나서기 전 깜짝 놀라고 말았죠. 왜냐고요? 바라본 거울 속에는 제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하아, 전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요. 거울에 비친 전 이제 더 이상 피부가 탱탱하지도 도전적인 눈빛도 아니었어요. 대신......”
자극적이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오프라 특유의 어조로 이어지는 말들.
그 말들이 빠르게 관객석으로, TV화면 밖 시청자들의 가슴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는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나이든 여자가 서 있더군요. 새삼 깨달았죠. 이제 우리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좀 더 활달하고 총명한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줘야한다는 것도. 예. 소개하겠습니다. 현재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공연을 통해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젊은이들입니다! 크리스티나! 조안나! 에단!”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는 순간 눈이 버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와 섹시하면서도 도발적이며 육감적인 느낌의 매력적인 흑인 미녀, 그리고 누가 봐도 귀공자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미남 한명이 스튜디오에 나타나자 관객석에서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반가워요. 크리스틴! 아, 이렇게 불러도 되죠? 조엔도요. 에단은……. 음, 그냥 이름을 부를게요. 너무 잘생겨서 심장이 떨려서 말이죠.”
한바탕 웃음이 터지고,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세 사람이 주어진 자리에 앉았다.
한데,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평소와는 달리 오프라의 옆이 아니었다.
조금은 떨어진 자리.
흡사 길거리 공연을 위해 준비한 단상처럼, 다른 곳보다 조금 높게 만들어진 곳이었는데, 모두의 예상처럼 그곳에는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피아노, 첼로 그리고 바이올린.
“음악을 하는 친구들답게 연주로 소개를 대신 하려는 건가요?”
“저흰 아티스트니까요.”
에단의 시크한 대답에 오프라가 웃으며 박수를 치자, 또다시 관객들이 갈채를 보내왔다.
그 박수소리가 잦아 들 때쯤 연주가 시작되었다.
피아노 소리와 함께 첼로와 바이올린 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웅장한,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연주였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로 해가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지 않았음에도 그 이미지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 오프라를 비롯해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눈빛이 경탄어린 눈초리로 바뀌었을 때였다.
기타 음이 끼어들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무대 위로 난입한 강렬한 연주.
빠르게 치고 들어오며 앞서 세 사람이 깔아놓은 음들 위로 호쾌하게 질주하는 기타 음은 안 그래도 부풀어 올랐던 청중들의 마음 한복판을 꿰뚫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꼭 한 마리 야생마가 거칠면서도 박력 넘치게 대지를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분명 클래식한 연주와 함께하는 일렉트릭 기타였음에도 묘하게 어울렸으며,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그 점이 오프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오랜 세월 쇼를 진행하며 이곳을 거쳐 간 이들 중 이름깨나 알려진 연주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개중에는 이제 거의 전설로까지 추앙받는 이들도 있었고, 한때의 반짝거림으로 인기를 얻었다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처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을 깊숙이 관통하는 이런 연주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오프라는 베테랑답게 평상시의 표정을 유지했다.
물론, 시기적절하게 카메라가 자신을 비출 때에 맞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우 놀랍다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에 맞춰, 한명의 동양인이 기타를 연주하며 스튜디오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준이었다.
***
3분이 채 안 되는 연주가 끝나자, 박수와 함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오프라 역시 마찬가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박수를 치며 도준을 맞아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대하듯 격하게 포옹을 한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도준이 소파로 다가와, 이미 앉아 있던 세 사람과 나란히 앉자 그녀는 깍지를 끼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불쑥 물었다.
“연주 잘하네요.”
갑작스러운 칭찬.
관객들이 호응하며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머쓱해진 건지,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에단이 저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을 때였다.
오프라가 그들을 바라보며, 정확히는 도준을 향해 물었다.
“근데, 음악 왜 해요?”
훅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세 사람은 당황했다.
물론 도준은 달랐다.
도준은 잠시라고 하기에도 짧은 시간동안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되물었다.
“오프라가 쇼를 진행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걸요?”
도준의 대답 아닌 대답에 오프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뒤늦게 어깨를 움찔해 보이며 졌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프라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걸.
그런 가운데, 오프라의 눈빛이 살짝 변하는 것 또한 눈치 채는 이가 없었다.
곧이어 이제는 누가 봐도 도준을 향하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는 질문. 아니 도발.
“뭐 그런 건가? 잘난 척하고 싶은 거? 그런 거예요?”
장난스러운 말투에 또다시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지고.
도준을 바라보는 오프라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 눈빛에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자신의 도발에 저 동양에서 온 젊은이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그때였다.
“잠시 만요.”
도준은 건방지다곤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오프라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에단에게 시선을 던졌다.
“에단, 바이올린 좀 빌려줄래?”
“어? 어……. 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에단이 살짝 당황했다가 엉거주춤 바이올린을 넘겨주었다.
평소 자신의 악기를 신줏단지 모시는 듯하는 그가 덥석 넘겨주는 걸 보면, 그가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에단에게서 바이올린을 받아들어 턱받이에 얼굴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곤 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들어보세요.”
짓궂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갑작스레 연주라니.
오프라가 황당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을 빛내며 도준을 바라볼 때였다.
도준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바이올린에서 묵직하면서도 장엄한 음이 흘러나왔다.
연주가 이어지고, 그 소리가 흡사 단단히 굳은 대지처럼 느껴진다고 여겨질 때 도준이 활을 멈추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오프라가 물었다.
아니, 물으려는 찰나였다.
도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더니,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다.
촐랑촐랑.
쾌활발랄하다는 느낌을 넘어 어딘지 모르게 가볍고, 그러면서도 유쾌하기 짝이 없는 연주였다.
바이올린으로 저런 연주가 가능한가 싶을 정도.
에단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일 만큼이나.
그렇게 또 한 차례 연주를 끝냈을 때, 오프라는 방금 전처럼 먼저 말문을 여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대신 또 있느냐는 눈빛으로 도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준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눈을 감고는 뭔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올라가는 손. 그 손에 들린 활이 바이올린의 현에 닿는다 싶은 순간이었다.
아름답지만, 가녀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밀려드는 선율.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도준의 연주를 듣는 내내 오프라는 물론이고 모두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카메라 감독을 비롯한 스텝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 대상이 한때 불꽃처럼 격하게 사랑했으나 결국 맺어지지 못하고 헤어졌던 연인이든, 이미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볼 수 없는 부모든 간에 다들 머릿속에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을 때, 도준의 연주가 끝났다.
“아……!”
관객석에서 흘러나온 탄성.
그것은 아쉬움이었다.
오프라 역시 비슷한 감정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진행자가 아니었다.
곧바로 감정을 추스르곤 물었다.
“이제 물어봐도 되나요? 아님 더 기다릴까요?”
조금은 과장된 음성과 제스처로 묻는 질문.
그럼에도 관객들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말없이 도준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한차례 훑어보며 도준이 입을 열었다.
“방금 들으신 세 곡은…….”
한 템포 말을 늦추며 도준은 말을 이어갔다.
“다르게 들리셨겠지만, 사실 같은 곡이에요.”
“……!”
오프라의 눈동자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방금 들려준 세 번의 연주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장난하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질문에 도준이 얘기했다.
조금은 민망하다는 얼굴로.
“장난이라뇨. 같은 곡 맞아요. 사실은 이번에 제가 낼 신곡이죠.”
그렇게 얘기한 도준. 그는 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같은 곡이라고 해서 같은 마음으로 연주한 건 아니에요. 첫 번째 곡은 우리 아버지, 그 다음 곡은 우리 형. 그리고 마지막은…….”
도준은 오프라를 빤히 응시하며 천천히 얘기했다.
“어머니를 보고 싶었던 마음을 연주한 거예요.”
순간 오프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도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고,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도준이 다시 말했다.
“아까 물으셨죠? 잘난 척하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거냐고.”
“…….”
“저희에게 있어서 음악은요. 일종의 대화에요.”
“아……!”
“전 오프라, 당신처럼 말로 감정을 전달하는데 능숙하지 못하니까요.”
오프라는 말없이 도준을 바라보았다.
그저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이 아님을 알기에.
그녀로서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쇼를 진행해야했다.
또한 그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베테랑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가 막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흠칫!
그녀의 시선에 카메라 앞에 서서 사인 판을 들고 있는 스텝이 보였다. 아니, 사인 판에 적힌 짧은 문장이 그녀의 눈길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밥에게 연락이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