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 조짐 (2)
끊임없이 고민하되 번민하지 말라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그렇다.
번민은커녕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저쪽에서 그런 제안을 해왔다면 한 가지만 결정하면 되니까.
받아들일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여기서 요점은 그게 과연 내게, 회사에 도움이 되는가일 뿐.
물론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데 간섭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아저씨 생각엔 어떠신대요?”
-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은 거 같다. 다만, 네가 여태껏 추구해온 음악적 정체성이 문제지.
아, 문제가 있긴 있네.
대중음악을 한다고 해서 상업적, 즉 돈만 보고 음악을 한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뭐, 결과적으로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에 눈이 어두워서 음악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여태껏 내가 추구해온 음악은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나,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들이었고, 또 들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과연 내가 S 전자와 콜라보레이션을 한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봐줄까?
- 이미지에 타격이 갈 거다. 어쩌면 구설수에 오를지도 모르고.
음, 기자들과 안티들이 신 나라 하겠구나.
피식.
웃고 말았다.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음악은 내가 하는 거다.
두려움이 앞선다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 따윈 없다는 거지.
나한테도 그 정도의 팬덤은 있거든.
내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아봐 줄 팬들이 말이다.
“재밌을 거 같은데, 하죠.”
- 알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 시키마.
전화를 끊고 나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으니, 캘리와 희주뿐만 아니라 레이크헬이 날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한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캘리와 레이크헬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희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앞뒤 사정은 듣지 못했었어도 머리가 좋은 희주가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었다.
희주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왔다.
“도준아, 괜찮겠어?”
“신경 쓰지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웃으면서 대답했다.
속으로는 생각하면서.
진짜 할아버지 말씀 중에 틀린 게 없네.
적어도 돈에 관해서 만큼은.
***
집으로 돌아오면서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재화는 물이랑은 다르다는 것.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들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외할아버진 늘 말씀하셨다.
돈이라는 건, 오히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모이는 거라고.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내릴 때쯤 되어서 중얼거렸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전화를 한 통 걸었다.
“아, 샤오린.”
- 어머, 도준 씨! 얘기 들었어요. 이번 앨범 대박 났다고요. 축하해요.
“덕분이죠. 아시죠? 언제나 제가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
진심이다.
그녀가 날 얼마나 아끼는지 모를 내가 아니다.
- 호호호. 그 말 들으니까, 막 힘이 나네요. 아! 코첼라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았다면서요?
“그렇게 됐어요.”
- 꼭 보러 갈게요.
“아직 멀었어요. 4월이나 돼야 열리는데요, 뭐.”
안부 인사는 여기까지.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 들었다.
“저, 샤오린. 지난번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 드렸던 거 있잖아요.”
- 예?
“왜 지난번 저희 형 결혼식 때…….”
- 아, 그거요? 안 그래도 얘기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녀로부터 얘기를 들으며 살짝 놀랐다.
우선 첫 번째로 세상에 그렇게 많은 기부단체가 있었다는데 놀랐고.
그다음으론…….
“믿을만한 데는 몇 군데 없다는 얘기네요.”
- 그렇죠. 내역과 실제가 달라도 기부자들이 파악하긴 어려우니까요.
“환상과 현실이군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가보다.
돈이 흐르는 곳엔 언제나 그렇듯 썩은 곳이 많다는 것.
결국, 선택지는 유니세프를 비롯한 몇 군데밖엔 없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 그러지 말고, 아예 도준 씨가 하나 만드는 건 어때요?
응?
내가?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던 카드를 내미는 샤오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쪽으론 완전 젬볌인데…….
오히려 사업하는 거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 어렵게 생각할 거 없지 않을까요? 전문 경영인들 중에도 믿을 만한 사람은 많아요. 도준 씨는 중심만 잘 잡고 있으면 되는 거죠.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좀 더 고민해볼게요.”
***
심각한 얘기는 여기까지.
확정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
좀 더 알아보고, 결정하면 될 일이니까.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할 때다.
뭐, 놀만큼 놀았잖아?
희주하고 여행도 다녀왔고.
레이크헬하고도 지긋지긋할 만큼 놀았으니.
“뉴욕으로 돌아가려고요.”
거실에 모여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가족들과 레이크헬, 그리고 캘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본다.
갑작스러운 내 얘기에 의아한 눈빛들이다.
희주만이 살짝 걱정된다는 눈초리였다.
그녀에게 옅게 웃어 보인 뒤, 다시 말했다.
“급하게 할 작업이 생겨서요.”
레이크헬이 묻는다.
“우리 며칠만 있으면 돌아갈 건데, 그때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아?”
“그러게. 코첼라 얘기도 좀 하고…….”
“‘더 시트’의 흥행성적이 궁금하지도 않아?”
그저 웃어주었을 뿐이다.
궁금하지.
근데, 그건 굳이 내가 여기 없어도 알 수 있는 거잖아.
어차피 인터넷만 켜면 알 수 있는 거고, 그게 아니라도 마루 누나가 다 말해줄 텐데, 뭐.
그때였다.
“그렇다면 가야지.”
아버지께서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 옆에선 어머니께서도 미소를 지어 보이셨고.
“다녀오렴.”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예. 어머니.”
***
S 전자와의 계약문제는 언제나처럼 회사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기로 했으니 걱정될 게 없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아니, 심상치 않다고나 할까.
“음, 좋은 일이긴 한데…….”
1월 2일.
회사에 들려 아저씨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눈 뒤, 대략적인 플랜을 짠 뒤,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국장으로 들어왔을 때가 오후 5시.
난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인터넷에 뜬 기사들을 보면서 턱을 매만졌다.
그러다 흠칫했다.
나도 모르게 아저씨처럼…….
생각이 깊어지면 턱을 만지는 거.
이러다가 버릇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또 어때서?”
픽하고 웃다가 인상을 살짝 구겼다.
자극적인 기사 제목들 때문에.
[내한한 출연진들의 힘인가? 흥행몰이 중인 ‘더 시트’!]
[영화에 삽입된 곡들 대부분이 김도준이 작곡한 걸로 알려져.]
[이것도 김도준 효과? 신년 극장가를 강타한 영화, ‘더 시트’. 벌써 300만 명 돌파.]
[전 세계적으로 흥행 돌풍. 뮤지컬 식의 영화가 한물갔다는 건 옛말?]
[캘리와 김도준……. 두 사람은 연인?]
참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마지막에 뜬 기사는 뭐람?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다행인 건, 희주가 별다른 의심은 안 하는 거 같긴……. 아니, 아예 캘리랑 친해져 버렸다는 게 외려 무서운 점이지만.
아무튼, 난 잡생각을 떨치곤 비행기에 올랐다.
조짐이 심상치 않긴 했지만, 그래 봐야 조금 인기를 얻다가 말 거라고 생각하면서.
***
와! 놀랍다.
혼자서 먼저 한국을 떠나 뉴욕까지 오는 동안 걸린 시간이라고 해봐야 겨우 열두 시간 남짓이었다.
근데, 그동안 상황이 이렇게 급변해도 되는 건가?
- 도준, 얘기 들었지?
워낙 바빠서 한국에 오지 못했던 브라이언. 그의 전화였다.
- 미국 내 앨범 판매량이 급증하기 시작했어.
“예?”
- 하루 사이에 오십만 장은 나간 거 같아.
헐. 황당하기도 하지.
카네기 공연 앨범이 미국인들한테 먹히는 이유는 대충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선주문 받을 때도 그러더니, 이놈의 미국은 정말 사람 놀래키는 데 뭐 있다.
사람이 많이 살아서 그런가?
“갑자기 왜요?”
- 크흐흐흐. 왜긴 왜겠어? 내가 말했지? 영화가 히트하면 네 진가가 드러나게 될 거라고!
브라이언은 호기롭게 외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전 한국에서 온 동양인이죠.”
- 흐음, 과연 그럴까? 좋아. 그럼 나랑 내기할래?
무슨 내기인지는 모르지만…….
“안 해요.”
절대 안 한다.
외할아버지, 아저씨 그리고 브라이언과는 내기 따위 하지 않을 거다.
적어도 사업적인 일로는 절대로.
“고생하시고요. 그럼 나중에 봐요.”
살짝 매몰차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
“왜 이렇게 불안하냐?”
까닭을 모르겠다.
뭐랄까.
뭔가 큰일이, 그것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폭풍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달까.
아무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기분이 묘하다.
숨을 크게 들이 내쉬곤 마음을 안정시키려 애썼다.
이럴 때일수록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니까.
그러려면 일단 내가 지금 하려고 마음먹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갈 필요가 있겠지?
그래, 집으로 가서 곡부터 만들자.
하지만, 그전에…….
우선은 전화부터 한 통 더 하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전 10시.
딱 좋은 시간이다.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는 번호. 콜린 교수님의 연락처를 눌렀다.
***
“축하해요.”
이젠 섹시하게 다리를 꼬는 니콜 교수님의 모습이 트레이드 마크처럼 다가온다.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얘기겠지.
“다, 교수님 덕분이죠.”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날 가만히 쳐다보던 니콜 교수님이 빙그레 웃는다.
“그거……. 동양식 처세술?”
“그렇다고……. 볼 수 있으려나요.”
니콜 교수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있다.
“당사자가 이룬 성과를 탐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그런 감사 인사……. 앞으로도 계속해줘요.”
속으로 웃음이 났다.
솔직하시기도 하지.
턱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바로 하는 교수님의 모습이 꼭 햇볕 아래 기지개를 켜는 나른한 고양이를 닮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에선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다.
참 여유로운 분이란 생각을 하면서 얘기했다.
“보여 드릴까, 말까 고민했는데요. 그래도 역시 보여 드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
뭔데 그러냐는 눈빛이 역력하다.
스윽.
그런 그녀에게 종이…. 정확히는 악보를 내밀었다.
두툼하다고 까진 말 못하지만, 한두 장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음, 이건 뭔데……!”
내게서 악보를 받아든 니콜 교수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눈빛이 달라지셨다.
여태껏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서둘러 악보를 넘기며 살펴보시는 교수님이셨다.
그러면서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길 오 분…십 분…이십 분이 다 되어갈 때였다.
“후우!”
니콜 교수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악보에서 눈을 뗐다.
그러곤 내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살짝 진이 빠진 목소리로.
“교향곡이라니…….”
“…….”
“킴. 말해봐요.”
“……?”
“당신 어느 별에서 온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