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 제가 뭐 아나요? (3)
띠띠딕, 띡, 띡!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딱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거실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한 상 차려져 있었고, 넓게 포진해 앉아 있는 레이크헬 멤버들은 가족들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낮술을 하고 계신다.
얼굴들이 하나같이 울긋불긋한데, 대낮임에도 벌써부터 거나하게 취해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하아, 이것들이 진짜!
새해부터 들이닥쳐서는!
아니, 니들은 가족도 없냐?
몰라? 뉴 이어 위드 패밀리! 응? 신년은 가족과 함께! 모르냐고!
“어! 왔어?”
왔어…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나는 선 채로 인상을 팍 쓰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들이야?”
“오오! 브라덜……. 왔구나! 반갑다, 진짜! 쎄울에서 보니까, 더 반가운 거 있찌?”
뭐래? 이 흑곰 같은 자식이!
날 안겠다는 건지, 아니면 압사라도 시키겠다는 건지 두툼하다 못해 내 허벅지만 한 팔뚝을 벌린 채 달려드는 디알로를 간발의 차로 피하며 말했다.
“나도 반가워. 그렇긴 한데…….”
새해부터 남의 집에 들이닥치는 건 좀 아니지 않냐…라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어머, 아들. 왔으면 앉지 뭐 하고 있어?”
어머니께서 더없이 화사한 웃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셨다.
양손에는 김치전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서.
“와우! 핫 스파이시 핏자!”
“킴치쩐! 완전 딜리셔스인 거에요!”
“위스키와 궁…궁……. 제롬 아까 뭐라고 했지?”
“궁합!”
“그렇지! 궁합이 끝내줘!”
어느새 벌떡 일어난 제롬이 그 곱상한 얼굴로 미남계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머니께 쟁반을 받아들고 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무지무지 아름다운 마미는 이렇게 무거운 거 드시면 안 돼요. 힘든 건 우리 같은 놈들이 하는 거라니까요.”
“호호호. 말도 어찌나 재밌게 하는지…….”
무겁긴 개뿔이.
김치전이 담긴 쟁반이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다고.
“아니에요. 그러다 주름 생겨요. 마미처럼 시간을 벗어난 미인은요, 자나깨나 미모를 가꾸는 게 권리이자 책무인 거에요.”
헐! 아부가 아주 절정에 달했구나.
근데 우리 어머니……. 아주 녹는구나, 녹아.
그렇게나 좋으실까.
활짝 핀 꽃처럼 웃으시며 주방 쪽으로 돌아서시는 어머닐 보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형수마저…….
주방에는 베릴이라든가, 유진 등이 양파를 까고 프라이팬을 뒤집고 있었고, 그 뒤에선 배가 불룩 나온 형수가 식탁 의자에 앉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물론 우리 형은 주방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콜린 옆에 붙어 앉아 수다 삼매경이었고.
우리 아버지?
상 한가운데 앉으셔서 흐뭇한 표정으로 레이크헬 멤버들을 보고 계셨다.
멀리 중동에서 모래바람 마시며 돈 벌다가 3년 만에 돌아온 아들들 보듯이.
와! 이 자식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우리 가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놈들을 대하고 있네.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가족들 같잖아?
교자상 두 개를 붙여놓은 덕분에 앉을 곳은 많았고,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도 비좁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제롬 옆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말해봐. 이번엔 또 뭔 사고를 치려고 온 거야? 응? 브라이언은? 설마 니들 또 가출…….”
“에이, 도준도 참. 우리 그런 사람들 아닌 거 알면서.”
모르거든!
아니, 니들 그런 놈들 맞아.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꼭 한 번씩 사고를 쳐주시는 그런 분들이거든!
“양심에 털 났냐?”
“응? 그건 무슨 뜻이야?”
눈을 반짝거리는 제롬을 보다가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말을 말자, 이놈들하곤 진짜 말이 안 통하니까.
특히나 지금처럼 마음먹고 들이닥쳤을 땐.
“진짜로 말해봐. 서울엔 왜 온 거야? 오늘 온 거 보니까, 어제 비행기 탔을 텐데…….”
원래 미국인들은 연말이 되면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해피뉴이어를 외치는 거 아니었나?
그런 뜻으로 물은 건데, 눈치 빠른 제롬은 내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 피식 웃는다.
“그건 잘못된 상식. 누구와 축하를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축하할 장소에 누구와 있느냐가 중요해.”
그거랑 그거랑 뭐가 다르지?
갑자기 막 혼란스러워지려는데…….
“근데, 도준.”
“왜?”
“들켰다며.”
흠칫!
망할! 또 얼마나 놀려댈까.
아니, 여긴 에단도 없는데 어떤 자식이……. 흠, 그랬구나. 우리 형님이셨구나. 하아, 왜 내 주위엔 이렇게 입 싼 사람들이 많은 걸까?
골이 지끈거려와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있을 때였다.
제롬이 쿡하고 찔러 들어온다.
“원래 그런 거에요. 낮말은 개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거에요.”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좋냐? 나 놀리니까? 그리고 개 아니거든.”
“응? 개 아니야? 그럼 캣?”
이놈이나 저놈이나…….
목이 마르다.
입안에 버석 버석한 게 갈증이 화악 일어난다.
“어어어! 도준, 그거…….”
앞에 놓인 물컵에 담긴 걸 단숨에 들이켜는데, 제롬의 외침이 귓가로 꽂히고 있다.
하지만, 늦었다.
제, 젠장!
술……이다.
마시자마자, 눈앞이 핑하고 도는 느낌에 원망했다.
아니, 약해도 너무 약하잖아.
어머니, 왜 절 이렇게 술이 약하게 낳으셨나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홍보차 방한했단다.
하긴, 주연을 맡은 콜린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고, 조연으로 깨알 같은 연기를 펼쳤다고 하는 멤버들도 관객들에게 얼굴을 비추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이게 다 우리나라 영화시장이 커진 덕분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자리를 잡으면서, 툭하면 천만을 넘기는 관객 수. 인구 오천만 명이 사는 나라에서 재밌다고 소문만 났다 하면 국민들 중 오분의 일이 표를 사고 영화관을 찾는다.
할리우드로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시장이란 거지.
이건 단순히 수치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흥행한다는 건, 특히 관객 수 천만을 넘긴다는 건 동양권에서 그만큼 흥행할 수 있다는, 즉 하나의 지표가 되는 셈이니까.
“그래서 언제 무대에 서는데?”
“시사회는 이미 했다고 하고. 대신 우린 개봉관들 돌면서 인사하기로 결정 났어.”
술이 깨는 건지, 아니면 취한 상태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지끈거려 미치겠다.
베란다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는데도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건 여전하고.
그런 상태로 콜린으로부터 얘기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젠 영화계까지 접수하려고?”
“그럴 리가. 그냥 바람 쐬는 거지.”
“엘비스 같은 건가?”
“비슷하지. 반쯤은 재미, 반쯤은 흥미?”
“둘 다 같은 의미 아냐?”
다른 사람들에겐 어떤지 몰라도 이 자식들한테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
“큭큭큭. 역시 도준은 우릴 너무 잘 알아.”
“야, 붙지 마. 남들이 보면 오해한다니까.”
“자식이! 형님이 동생 한번 안아보겠다는데, 까칠하게 굴기는.”
“누가 형님이야!”
“어? 나이는 내가 더 많잖아? 한국에서는…….”
“웃기고 있네. 나이 따지고 서열 매기려면 한국에서 태어나던가?”
“크큭. 조크, 조크!”
그때 뒤에서 제롬이 디알로와 함께 다가왔다.
“뭔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아, 그게…….”
잠시 얘기를 듣더니 디알로가 낄낄 웃었고, 제롬은 언제나 그렇듯 한마디 했다.
“도준은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그래, 그래.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놔라.”
포기한 심정으로 말하고 있을 때였다.
“근데, 넌 어떻게 할 거야?”
“응? 나?”
“그래.”
“뭐가?”
“어떻게 보면 너도 이번 영화에 한발 담근 셈이잖아?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곤,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됐다. 거길 내가 왜 가냐?”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안 간다니까.”
“재밌을 거야. 내 촉이 말하고 있다고. 너랑 함께 가면 뭔가 즐거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
그래서 안 가는 거란다.
나는 제롬을 보며 혀를 한차례 차곤 말했다.
단호하게.
“분명히 말했다. 안 간다고.”
이렇게 못 박아두지 않으면, 내일 아니 당장에라도 기사에 날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영화 ‘더 시트’의 출연진들과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를 다닌다고.
아니나다를까.
제롬이 언제 꺼내 들었는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럼, 코첼라는?”
“아! 그거?”
“연락받았겠지만, 우리도 초청받았는데…….”
그랬구나.
나만 초청받은 게 아니었네.
“그건 몰랐는데?”
“그래? 그럼 그것도 모르겠네?”
“뭘?”
“너희 오프닝 맡기로 했지?”
“그렇다고 하더라.”
“그중 한 곡은 ‘더 시트’의 OST고.”
콜린의 말을 듣다 보니, 팍하고 온다.
아직 술이 안 깼음에도 느낌이 온 것이다.
“음, 설마?”
“우리랑 같이 불렀으면 하는 거 같던데?”
“또?”
“쿡! 지겹다, 그지?”
아니 대체 이놈들하고는 전생에 뭐가 있었나?
왜 이렇게 함께 무대에 서는 일이 많은 거야?
인상을 구기고 있을 때, 제롬이 끼어든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번 기회에 도준이 우리 밴드에 들어오는 건 어때?”
“오올! 난 무조건 찬성!”
“나도 좋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리더 자리는 너 해라.”
지금 장난해?
리더 자리가 무슨 벼슬이냐?
어디서 그 귀찮은 걸 나한테 넘기려는 거…….
“도준이, 우리 멤버가 된다고?”
언제 온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녀석이 답지 않게 씨익 웃고 있었다.
“와아! 그러면 우리 작곡문제는 그냥 해결되는 거네?”
이것들이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어디서 김칫국을 처마시고들 있어?
그나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베릴 만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
“그건 아니지. 그럼 색깔이 너무 많이 변하잖아? 차라리 우리가 대충 밑그림을 그리고, 그걸로 도준이 프로듀싱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
하아, 도끼는 믿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 자식아!
이런 식으로 내 발등을 찍을 거라곤…….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누가 올 사람이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제롬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뭐지?
아니, 왜 이 자식이…….
의아해하고 있을 땐 이미 제롬이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었다.
현관문 쪽으로.
그리고 여기가 제집인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준다.
멈칫!
현관문이 열리고 나타난 얼굴을 본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저 여자가 여길 왜?
아! 그렇구나!
영화 ‘더 시트’의 여주인공이 저 여자였지!
***
현관문을 열고 제롬과 함께 들어오는 여자,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또 한 명의 여자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말았다.
“오랜만이에요.”
미모 하나는 여전하네.
진짜 빛이 난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려는 듯 기초화장만 한 얼굴임에도 아름다운 캘리였다.
“아, 여긴 에일리. 제 친구예요. 매니저이기도 하고요.”
“반가워요.”
“예……. 반갑네요. 일단 좀 들어오시죠.”
그들을 안으로 들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내 옷깃을 살짝 당기는 느낌에 바라보니, 어머니께서 눈짓으로 날 부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캘리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께선 날 안방 쪽으로 데려가더니 물으셨다.
“어떤 관계니?”
“예? 어떤 관계라니요.”
“여자는 여자가 아는 법이다. 딱 보니까……. 캘리가 널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그 스캔들……. 뜬소문이 아니었던 거니?”
“그게, 그러니까……. 아, 저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 이러다가 또 스캔들 터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갑자기 떠오른 희주 얼굴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을 때였다.
어머니께서 속닥이셨다.
“도준아.”
“······?”
“엄만, 외국인 며느리도 좋다.”
.
.
.
이건 또 무슨!
엄마! 그럼 아침에 하신 말은 뭐에요?
희주가 좋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