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 집안싸움? (3)
다 알고 계셨던 건가?
그런데도 여태 모르는 척 계속……. 아, 그래서 자꾸 아기가 어떻고……. 와, 진짜!
은근 심술이 난다.
이것도 유전인가?
살짝 장난기도 들고.
그래서 물었다.
자칫 희주한테 쏠릴 화제도 돌릴 겸.
“근데요 할아버지. 전 왜 세뱃돈 안 주세요?”
황당하다는 표정 좀 보라.
우리 할아버지, 기가 막히신 모양이다.
결국, 커다래진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보시다가 코웃음을 흘리시는 외할아버지셨다.
“그렇게 벌어대면서, 이 할애비 쌈짓돈이 그렇게 탐나더냐?”
“에이, 일해서 버는 돈이랑 꽁으로 얻는 돈이랑 같나요.”
당연히 장난이다.
조손 간에 흔히 보이는 풍경은 아닐지 몰라도, 그래도 내겐 이런 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다.
요즘 들어 더 그렇게 느끼는 중이었다.
노래방에 갇혀 있을 때도 이런 날들이 얼마나 귀한 건지 깨달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그렇게 느껴지지는 중이다.
아마도 내가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지고, 또 그렇게나 무섭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외할아버지께서 늙어가시는 게 느껴져서 그럴 테다.
아무튼, 장난이었는데…….
“……?”
외할아버지께서 정색을 하신다.
그렇다고 혼을 내시려는 것 같지는 않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알겠다.”
그러곤 손짓을 하신다.
나가라고.
뭐지?
평소답지 않게 왜 저러시는 거지?
장난을 장난으로 받지 않으시고, 진심으로 대하시는 모습이…….
“이제, 그만 나가봐라.”
짐짓 엄한 얼굴로 내게 말씀하시는 게 영 낯설다.
음, 그러고 보니 진짜 많이 야위셨네.
얼굴에 핀 검버섯도 더 많아지셨고.
가슴 한편이 쿡쿡 쑤셔온다.
젠장, 심술 한번 부렸다가 이게 뭐람.
괜히 외할아버지 마음만 불편하게 해 드린 건가?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장난이었어요.’ 하기에도 분위기가 영 그렇다.
난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그렇게 방을 나서려다가 떠오르는 게 있어서 여쭸다.
“저,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보약이라도 좀 해 드려요?”
지난번에 내가 쓰러졌을 때, 마루 누나가 자기가 아는 의원 중에 기가 막히게 약을 잘 짓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다시 날아오는 콧방귀 소리.
“일없다.”
“…….”
“정 회장댁 가야한다믄서, 어서 가봐.”
“예…….”
문을 열고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제기랄! 다시는 이런 장난 하나 봐라.
***
도준이 나간 뒤였다.
최 회장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혼잣말은 아니다.
“이 실장, 들었지?”
방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고, 이 실장이 검은 정장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도준이답습니다.”
이 실장의 대답에 최 회장이 깊은 눈빛을 해 보이다가 말했다.
“저놈 하나야.”
“…….”
“아들놈들이고, 딸년이고……. 손주들 중에서도 저놈 하나라고. 약 지어주겠다는 놈은.”
이유?
둘 다 안다.
최 회장도 알고 이 실장도 안다.
자식들로서는 한평생 엄격한 모습만 보이던 아버지가 한없이 어렵기만 한 걸 테고, 손주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솔직히 그깟 보약, 최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가는 명의라도 데려올 수 있다.
그 정도 돈이야 당장 방안에 숨겨진 금고에서 대충 한 움큼만 집어 줘도 충분하고도 남을 테고.
그러니 딱히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제 아빌, 할애빌 걱정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회사 지분을 자기 걸로 만들까, 조부가 죽고 나면 한 푼이라도 더 상속을 받을 수 있을까 머리 굴리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할 테니.
“도준이니까요.”
이 실장의 짧고 명확한 대답에 최 회장은 픽하고 웃었다.
“그렇지. 그놈이니까, 그런 거겠지.”
어딘지 모르게 기꺼운 음성을 내뱉은 최 회장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던 순간 비틀거렸다.
혹시나 몰라 대비하고 있던 이 실장이 재빨리 부축하지 않았으면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 원장 부를까요?”
“…새해 댓바람부터 뭐하러.”
“약도 잘 드시지 않지 않습니까?”
“약은 무슨…….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회장님!”
“됐어. 좀 어지러웠을 뿐이니까. 그리고 내가 말했지. 너 소리 지르지 말라고. 이게 대가리 굵었다고 툭하면……. 머리 울리니까, 그러지 마라.”
“……조심하겠습니다.”
그제야 최 회장은 인상을 펴곤 물었다.
“어떻게 됐어?”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날짜는?”
“아시지 않습니까? 차명이라 언제든지 넘길 수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얘기.
최 회장은 잘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거 사흘 안에 넘겨.”
“……이르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면 금감원에서 치고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한두 번 해봐? 그런 간덩이로 여태 그 자리엔 어떻게 있었냐? 공연한 걸로 힘 빼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
“왜? 내가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놈한테 벌써부터 한몫 챙겨주는 게 못마땅해?”
“…아닙니다.”
“그럼? 오랫동안 내 수발을 들어온 널 챙겨주지 않아서?”
“그럴 리가요.”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이 실장에게 최 회장이 마주 보며 웃었다.
“걱정 마라, 이놈아. 내가 갈 때 가더라도 네놈 낙동강 오리 알 신세는 만들지 않을 테니.”
“그런 걱정 꿈에서도 한 적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이 실장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면서 최 회장이 중얼거렸다.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헛참. 세뱃돈 달랜다.”
그러곤 또다시 중얼거렸다.
“보약, 해달라고 그럴 걸 그랬나?”
***
외갓집을 나온 뒤, 가족들한텐 희주네 집에 간다고 말하곤 헤어졌다.
차?
그런 거 없이 그냥 지하철 탔다.
당연히 난리가 났더랬다.
평상시와 달리 내 옆에는 경호원도 없었고.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한발 한발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았다.
이젠 이렇게 살 거니까.
익숙해져야 한다.
내가 무슨 죄지은 사람도 아니고.
왜 만날 남의 눈치……. 정확히는 세간의 소문 따윌 신경 쓰고 살아야 하냐고.
기자들도 그렇다.
그쪽들도 다 밥벌이하느라 그러는 건데, 그걸 굳이 피할 이유가 뭐냐고.
사진을 찍든 기사로 뻘소리를 해대든.
내가 아니면 아닌 거지.
인기에 살고, 인기에 죽는 연예인?
난 그런 거 관심 1도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음악만 할 수 있으면 그만. 나머진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거지.
근데, 지치긴 하네.
“도준 오빠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손잡아도 돼요?”
“저 한 번만 안아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얘들이 문제다.
중학생이나 됐을까? 아님 고등학생?
꺅꺅거리며 몰려드는 애들 때문에 유독 내가 탄 지하철 칸만 미어터질 지경이다.
“안는 건 좀 그렇고. 사진은 찍어줄게요. 아, 사인도요. 그러니까, 차례대로 오시면 좋겠네요. 소리도 좀 지르지 말고요. 다른 사람들 불편해하시니까요.”
그제야 조용해지는 여학생들.
그중에 간혹 보이는 정장 차림의 여자들도 볼을 붉힌 채 눈을 반짝거린다.
쯧, 그냥 차 타고 다닐까 보다.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
물먹은 솜 같다는 표현이 이렇게 와 닿을 수가 없다.
많이도 아니다.
딱 여섯 정거장이었을 뿐이다.
외할아버지댁에서 정 회장님 댁과의 거리는 실제론 좀 멀어도 지하철로 가면 그 정도 걸린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니까.
근데, 이 모양이다.
개찰구를 나와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거리로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요즘은 연예인 봐도 안 그런다며? 뭐냐고, 이게?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다른 도시는 모르겠고, 서울은 이제 더 이상 연예인 한둘쯤 봤다고 우르르 몰려드는, 그런 촌스러운 사태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망할. 소문을 믿는 게 아니었다.
그래. 첫날이라 그런 거겠지.
봐라. 언제 찍었는지, 아니면 누가 찍은 걸 신문사에서 산 건지는 몰라도 기사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걸.
[김도준, 서민 코스프레인가?]
지랄. 나 서민 맞거든?
대체 서민의 사전적 의미는 알고 써제끼는 건지.
아무 직위도, 신분적 특권도 없을뿐더러 경제적으로도 그리 넉넉하진 못하다.
전부 우리 어머니께서 움켜쥐고 계시니까.
아, 이건 좀 그런가?
좋다. 서민이 아니라고 치자.
그래도 난 그냥 서민처럼 살란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말.
내게 해당 사항 없음이다.
차라리 돈이고 지위고 다 버릴지언정, 자유로운 삶을 버릴 순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뉴욕에서 몇 달 살아보니 알겠다는 거지.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사람은 다른 건 다 잃어도, 자유를 잃으면 안 된다는 걸.
그러니까…….
코스프레 같은 거 아니거든!
픽하고 웃고는 핸드폰을 껐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고 희주네 집 앞에 섰을 때였다.
부르르르르.
전화가 울린다.
오, 타이밍 좋은데?
희주지 싶어서 핸드폰을 도로 꺼내 들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루 누나?
아침에 새해 인사했잖아?
그런데 또 전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네, 누나.”
- 도준아.
난 이제 무섭다.
저 소리가.
누나가 저렇게 날 부르면 꼭 무슨 일이 생기더라.
아니나 다를까.
- 방금 코첼라 페스티벌 주최 측에서 연락이 왔어.
코……. 뭐?
“그게 뭔데요?”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런 말도 없더니, 누나가 황당하다는 듯 물어왔다.
- 너 코첼라 페스티벌 몰라? 세계 3대 뮤직 페스티벌 중의 하나잖아!
아, 그렇구나.
세계 3대 뮤직 페스티벌…….
“그래서 뭐래요?”
- 안 놀라?
“제가 놀라야 해요?”
또다시 침묵에 빠졌던 누나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말했다.
- 올해 공연에서 오프닝 좀 맡아 달래.
아니, 왜 만날 페스티벌에 오라고 하면서 꼭 오프닝을 맡아달라는 거야?
지난번 광안리 썸머 페스티벌 때도 그러더니.
흠, 아직 인지도가 없어서 그런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저더러 거기 서라고요?”
- 아니. 너희.
“너희……?”
- 그래, 크리스티나랑 조안나 그리고 에단까지.
아니 우린 어떻게 알고?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 아,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이번에 발표한 니들 곡 빌보드 차트 진입했어. 아마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철저하게 비밀리에 순위 집계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지.
그 ‘철저하게 비밀리에’라는 건 달리 말하면 지들 마음대로 정보를 유출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니까 마루 누나 얘기가 아주 신빙성 없는 근거도 아니지 싶다.
그렇긴 그런데…….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몇 위인데요?”
- 6위.
지난번에 올랐다가 미끄러졌던 등수네?
공교롭다면 공교로운데…….
“무슨 곡…….”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루 누나가 말했다.
- SOMETHING OR NOTHING.
“아!”
과연.
납득이 된다.
전 세계적으로 히트했던 까닭에 이미 귀에 익은 곡.
그걸 내 나름대로 재해석해 편곡한, 그것도 클래식 조로 바꿔버린 노래.
익숙함과 새로움. 그게 미국인들한테 먹힌 모양이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누나가 다시 말했다.
- 오늘자로 전 세계에 개봉한 건 알고 있지?
“뭐가……. 설마?”
- 그래. ‘The Sheet’가 일제히 상영관에 걸렸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당연한 얘기지만, 거기 삽입된 OST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아.
“막 욕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마루 누나.
- 그런 농담, 재미없거든?
보이진 않겠지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물었다.
“근데, 그 얘기는 왜?”
영화가 개봉한 거야 축하할 일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내가 주축이 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단 1초도 되지 않아 마루 누나가 깨부쉈다.
- 코첼라 측에서 거기 나온 노래도 한 곡 불러달래.
어?
그럼, 두 곡?
이거 좋은 거야 나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