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63. 집안싸움? (1)
새해를 하루 남겨 놓고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희주는 나보다 하루 먼저 들어온 상황.
굳이 그럴 필요 있느냐고 말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이유가 희주 본인을 위한 거라면 서운할 법도 하겠지만, 날 위해 그런다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말릴 수도 없었다.
대신 희주가 부탁했던 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일 년만 기다려달라고 했던 말이.
뭘 기다리느냐고 물었지만, 희주는 웃기만 했다.
덕분에 한국으로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별의별 상상을 다한 나였다.
이제 일 년 후면, 희주도 나도 성인이 된다.
대한민국의 법제에 따른.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많은 게 달라질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유학을 온다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매력이 넘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눈팔면……. 알지?”
희주가 조금은 더, 내 마음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딴에는 얼굴을 굳히며 눈까지 빛내며 말하는 희주가 귀여워 속으로 웃고 말았었다.
물론 겉으로야 정색하며 말해주었지만.
그렇게 날 못 믿냐고.
후우, 그나저나 불과 반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네.
아님 반대로 내가 달라진 건가?
공항에 내려서 출국장을 나오며 주변을 둘러본다.
연말이라 그런지,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
요 몇 달간 외국인들 사이에만 있다가 같은 한국사람들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걸 보고 있으니, 새삼 정겹다.
마음 한편으로는 푸근한 느낌도 들고.
누가 뭐래도 난 한국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기자들은 보이질 않는다.
대신…….
“어? 저거 김도준 아냐?”
“엄마! 쪼기, 낌또쭌!”
“어머, 진짜네?”
“꺄아아악! 김도준이다!”
“도준 오빠다!”
여기저기서 날 아는 체 해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입국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웅성거림.
친구 대하듯 내 이름을 막 불러대는 것도 여전하다.
거참, 신기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친근해서 그러는 건지.
아무튼, 기분이 묘하다.
오랜만에 우리말로 듣는 정확한 발음들. 내 이름 석 자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또 몰랐네.
“오빠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손 하나가 인파 속에서 쑥 나오더니 내 손목을 움켜쥔 것도 그때였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한발 물러나며 눈이 커지고 마는데,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꽂혀 들었다.
“도준아. 이쪽으로.”
어, 마루 누나?
사람들 사이로 마루 누나와 함께 경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겁을 먹은 건지 주춤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뭔가 위화감이 느껴져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잠시만요.”
경호원들에게 말해서 얼른 그들을 뒤로 물리곤,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제가 바빠서 오래는 못 있고요. 지금부터 딱 열 명하고만 사진 찍을게요. 그래도 되죠?”
그제야 사람들이 안심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다.
동시에 터지는 환호성.
또다시 사인을 해주며 바라보니, 마루 누나가 옅은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
“흠, 어째 좀 여유로워진 거 같다?”
마루 누나의 얘기에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좀 어른스러워진 거 같기도 하고.”
뜨끔.
“하, 한 살 더 먹었으니까요.”
“그래?”
눈을 가늘게 한 채 날 바라보는 마루 누나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들으라는 듯이.
“희주가 SNS에 올린 사진 보니까, 딱 예쁘게 탔던데……. 유럽 쪽이 햇살이 강한가? 응? 근데, 도준이 너도 많이 탔다?”
은근슬쩍 내 팔뚝을 눈으로 훑다가 씨익 웃어 보이는 누나.
젠장,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희주랑 나랑 함께 있었던 걸 다 아는 눈치인데?
속으로 혀를 차며 물었다.
“음반 발표일은 언제에요?”
마루 누나는 대답 대신 날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픽하고 웃어 보였다.
아, 진짜! 어쩌라고.
이미 마음속으론 확신하고 있는 거 같구만.
다 알면서 자꾸 저러는 이유는 뭐야?
고개를 한차례 내젓고는 엄포를 놓았다.
“자꾸 그러면 확 그냥 삐뚤어져 버릴 거에요.”
그제야 마루 누나가 깔깔거리며 뒤늦게 대답해준다.
“내일이잖아. 못 봤어? 회사 홈피에 올려놨는데?”
“그랬어요?”
“뉴스에도 막 뜨고 그랬는데……?”
“……거, 거기까지 가서 일하고 싶지 않았달까. 그리고 거기 인터넷 잘 안 터지거든요.”
잠시 날 빤히 쳐다보던 누나가 믿어준다는 눈빛을 해 보였다.
속으로 좀 민망해져서 차 안, 미니 냉장고에서 콜라 캔을 하나 따서 마셨다.
쯧, 왠지 나만 즐겁게 놀다 온 거 같아서 미안하네요.
그때, 누나가 불쑥 물어왔다.
“했니?”
“푸웁!”
입에 들어갔던 콜라가 허공으로 뿜어졌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내가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나!!!”
***
“대표님께서 그러시던데? 집에서 푹 쉬고, 내일 보자고.”
회사로 먼저 갈까 했지만, 누나가 하는 말을 듣고는 집으로 향했다.
“아들!”
현관을 들어서기 무섭게 달려와 날 꽉 안아주는 어머니셨다.
까닭 모를 뭉클함이 가슴에 차올랐다.
“다녀왔어요.”
“아픈 덴? 지난번에 쓰러진 건 괜찮아?”
어머닌 내 몸 여기저기를 만져가며 걱정 가득한 눈길을 거두질 못했다.
그 때문에 다른 가족들하고는 말은커녕 눈빛 한번 마주할 틈조차 없었다.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피로가 쌓여서 그랬던 거라고.”
“하아. 도준아, 이 엄마 쓰러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예. 엄마. 앞으로 조심할게요.”
스윽 스윽.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어머니셨다.
뒤늦게 다가온 아버지께서도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고생했다.”
“히야! 때깔 좋네? 거기 물 좋지?”
이제 곧 애 아빠가 될 예정인 우리 형님께선 여전히 철딱서니라곤 1도 없어 보이고. 아니, 1쯤은 있나?
옆에 나란히 선 형수를 한쪽 팔로 안고 있는 팔뚝에 힘줄이 툭툭 튀어나와 있는 걸 보니.
“괜찮으시죠?”
이젠 한눈에도 임신부라는 걸 알 정도로 배가 나온 형수에게 묻자, 형수가 쑥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대답은 옆에 있던 형이 대신했고.
“우리 가희는 무럭무럭 크고 있는 중이지.”
“가희?”
“왜 이름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딸이야?”
“당연히 딸이지. 그것도 우리 소연일 똑 닮은…….”
설레발 치는 형의 말을 듣다 못한 형수가 한숨을 폭 내쉬는 게 보인다.
“아직 몰라요.”
“응? 병원에서 안 알려줘요?”
형수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안 물어봤어요.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으니까요. 궁금하긴 하지만…….”
흠, 우리 형은 전생에 나라를 한 세 번쯤 구한 게 분명하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버릴 정도의 무리수를 두긴 했지만,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된 우리 형.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뭘까 싶었다.
반면 철들려면 한 백 년쯤은 더 지나도 가능할까 말까 한 우리 형하고 결혼한 형수는……. 전생에 우주라도 팔아먹은 거 아닐까?
가만!
생각해보니까, 나 노래방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었지?
내가 묘한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자, 형이 움찔하더니 뒷걸음질친다.
마치 콧노래를 부르며 동네 마실 나왔다가 뱀하고 딱 마주친 개구리마냥.
“뭐, 뭐야! 왜 그렇게 보는 건데!”
피식.
하여간 눈치는 빨라가지고.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가희 아버님.”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 틈에 주방으로 들어가신 어머니의 하이톤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뭣들 해요! 어서 오지 않고! 음식 다 식는다니까!”
누구보다 먼저 움직여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가는 아버질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납득하고 말았다.
애처가……. 아니 공처가도 유전인가 보네.
형수를 보물 다루듯 얼싸안고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형을 보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집에 왔구나.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았다.
***
TV에선 보신각종이 울리는 가운데,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서울 광장과 종로 일대를 가득 채운 채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정확히 자정이 되자 음반이 발매됐다.
The Generation.
새로운 세대를 표방한다는 의미로 붙인, 어떻게 보면 참 성의라곤 쥐똥만큼도 보이지 않는 앨범 제목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겐 의미가 컸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동시 발매된 새 앨범. 그 앨범에 녹아 있는 음악들은 우리 네 사람이 몇 달간 고민하고 또 땀을 흘려가며 완성한 곡들이 들어 있었으니까.
물론 스튜디오에서 한 녹음이 아닌 만큼 음질은 썩 좋지 않았다.
당연하다.
공연장에서 바로 녹음을 딴 거였으니까.
대신 현장감이 넘쳐서 그런가 어째 소리는 더욱 풍부하게 들린다.
게다가 마지막에 내가 부른 레이크헬의 커버곡은 그야말로 반향이 대단했다.
“와! 이거 실화냐?”
한쪽 어깨는 여전히 형수에게 빌려준 채로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핸드폰. 형은 거의 묘기에 가까운 자세로 능수능란하게 핸드폰을 조작해 검색하며 연거푸 탄성을 내지르는 중이었다.
“미국만 빼곤 모조리 1위네!”
목요일에 발표되는 빌보드 차트를 빼곤, 출시하자마자 각국의 음원차트 1위에 올라간 곡은 놀랍게도 ‘SOMETHING OR NOTHING’이었다.
이미 2015년, 발표하자마자 순위권에 진입한 후 6주간 빌보드 차트 1위 자리에 머물렀던 노래가 다시금 음원 시장을 석권한 것이다.
물론 편곡과정을 거쳐 멜로디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달라졌지만, 아무튼 같은 곡임은 분명하다.
아, 당연하지만 리메이크곡이기 때문에 사전에 레이크헬 아니 브라이언에게 음원 출시 및 사용에 대해 승낙을 구했고.
아무튼, 뜻깊은 일이기도 하다.
이젠 친구랄까, 가족이랄까.
떼려야 땔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 레이크헬의 대표곡을 내 스타일로 바꿔서, 그것도 록을 클래식화 해서 부른 노래다 보니, 그걸 연주한 크리스티나나 조안나 그리고 에단과는 또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느끼는 감상은 말이다.
“뭐냐! 이거! 완전 싹쓸이네, 싹쓸이! 우리 애들 신곡 발표 미룬 거 진짜 신의 한 수였네, 신의 한 수였어!”
씨크릿 걸즈도 신곡 준비 중이었구나.
그나저나 우리 애들?
참네. 거기 누나들, 다 형보다 나이 많거든? 아, 막내인 지연은 형하고 동갑이든가? 아니, 한 살 어리던가? 헷갈리네.
여하튼, 이젠 저렇게 부를 정도로 친해졌다는 거겠지?
그만큼 애정도 생겼다는 의미일 테고.
나도 모르게 묘한 눈빛이 되어 형을 바라보았다.
“앨범 전곡에 20위권 안에 들어갔네! 그중 세곡이 10위 안에 있고……. 크크큭. 지금쯤 다른 회사에선 난리 났겠네! 하긴, 설마 네가 이렇게 기습적으로 앨범 발표할 줄 누가 알았겠냐!”
형이 낄낄거리며 주절주절하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전화가 걸려왔다.
희주다.
새해가 됐다고 전화한 모양인데.
“응. 희주야.”
- 저, 도…도준아.
“새해 복 많이 받고, 올해도 건강히…….”
어라?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어째 좀 가라앉은 것도 같고, 살짝 떨리는 느낌도 드는데?
새해 인사를 하다말고 말끝을 흐렸을 때, 희주가 한층 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할아버지께서 좀 보자 셔.
“……?”
누구?
할아버지?
희주의 할아버지라면…….
정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