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 파티는 이럴 때 하는 거지! (1)
입이 떡 벌어진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기만 세계에 똥물을 확 튀기는 느낌이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원달러 앵벌이인가?
확 잡친 기분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기막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오 달러?”
“예스! 오딸라, 오딸라!”
맑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소년에게 돈을 건네려다 멈칫했다.
오 달러는커녕 일 달러짜리 지폐도 한 장 없다.
하는 수 없이 십 달러를 꺼내며 말했다.
“오 달러라고 했지?”
한데, 소년이 급하게 소리친다.
“노노! 유 앤 허, 오딸라, 오딸라……. 두 사람, 씹딸라!”
손가락으로 나와 희주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하는 소년.
이젠 기가 막히는 것뿐만 아니라 코까지 막힐 판이다.
헛참!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보고.
확 그냥!
그래, 참자.
좋은데 놀러 와서 초장부터 기분 잡칠 수야 없지.
게다가 희주까지 옆에 있지 않은가.
그래, 그래. 내가 오늘 호구 잡혀준다.
픽하고 웃고는 돈을 내밀었다.
“자, 여기 십 달러.”
하! 자식, 웃기는…….
밝게도 웃네.
돈을 주곤 돌아서는데, 소년이 따라붙었다.
그러곤 재빨리 물어온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영어가 유창하다.
원주민 아이들이라곤 해도 영어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
하긴, 여긴 누가 뭐래도 미국땅이니까, 당연한 건가?
“오하나…라고. 아나 모르겠네?”
가족이라는 뜻의 이 오하나라는 이름은 디알로가 직접 지었다고 했다.
원래 어떻게 불렸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잘 모를 거란 생각에서.
하지만, 내 짐작은 틀렸다.
“아, 오하나요? 얼마 전에 팔렸다고 들었는데.”
어라? 아나 보네?
“그럼, 배 타고 가시겠네요?”
“그래야겠지.”
“항구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잘됐다 싶었다.
안 그래도 난생처음 와본 곳이라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나 난감해하던 참인데.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이딸라!”
큭!
이 자식이 정말!
난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녀석을 바라보는데, 요놈이 새하얀 이빨까지 드러내며 해맑게 웃는다.
헛참! 그래, 졌다 졌어.
이놈은 아마 사막 한가운데 던져놔도 잘 살 거다.
“2달러라고 했지?”
혀를 차면서 지갑을 꺼내 뒤지는데, 잔돈이 없다.
쯧, 그랬지.
오 달러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십 달러짜리 밖에 없다는 걸 깜빡했다.
어쩔 수 없이 십 달러를 꺼내 들었다.
이미 주겠다고 말을 뱉었는데, 이제 와서 주워 삼킬 순 없으니까.
그래도 희주 앞인데.
“어? 이거 너무 많은데요?”
“왜 싫어?”
“아, 그런 건 아니고요.”
잠시 멀뚱히 내 손에 들린 돈을 바라보던 소년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돈을 낚아채고는 얘기했다.
“잔돈은 꼭 돌려 드릴게요.”
하이고, 행여나다.
진짜 손톱만큼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나 보려고.
그러자, 소년이 말한다.
“제 이름은 리노. 당신은?”
흠, 잔돈을 돌려준다고 하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내가 왜 여기서 저 소년과 통성명을 해야 하는 건지 좀처럼 납득이 안되지만…….
“김도준. 도준이라고 불러도 좋고, 김이라고 불러도 좋아.”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알겠어요, 킴. 잔돈은……. 꼭 돌려 드릴게요.”
글쎄다.
우리가 여기에 며칠 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섬까지 오려면 뱃삯이 더 들판인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말했다.
뭐랄까.
반은 장난?
나머지 반은 기대감이랄까.
“사흘 후에 떠날 거다. 그동안 우린 섬에 계속 있을 거고.”
불필요한 말이 분명한데도 덧붙인 이유는…….
그만큼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눈을 빛내며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되뇌는 소년이 어쩌나 지켜보려는 마음에서였다.
“알겠어요. 꼭 찾아갈게요.”
피식.
“그래. 기다리마.”
소년이 사라지자, 나머지 아이들도 나와 희주의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자리를 떴다.
아이들이 사라진 자리로 여전히 강렬한 햇살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섬으로 가는 길은 고역이었다.
아씨, 술 약한 건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뱃멀미까지 할 줄이야.
처음 타본 사람은 다 그런 법이라고 들었다만, 그럼 어째서 희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데?
그냥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
젠장! 내가 그렇지…….
속이 울렁거리는 탓에 객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지내고 있을 때, 배가 곧 섬에 도착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경비행기를 타고 오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 와서 무슨.
제길! 내가 다시는 배를 타나 봐라.
불통거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희주가 들어왔다.
“도준아, 괜찮아?”
그래도 희주 앞에선 좀 센척하고 싶은데, 이놈의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속이 계속 뒤집혀서 말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괘, 괜찮…우욱….”
망할 자식들!
땅을 사도 하필이면, 섬을 사고 지랄들이야!
내륙 지방에도 싸고 좋은 땅이 얼마나 많은데!
애꿎은 레이크헬을 원망하며……. 아, 진짜! 몸이 이 모양이라 그런가, 속까지 좁아진 느낌이네!
“우욱!”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희주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이 망할 놈의 배에서 내리기 위해서.
***
“후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뱃멀미만 있는 줄 알았더니, 땅 멀미도 있었다니.
잠시 쉬는 동안에도 얼마나 울렁거리던지.
배에서 내리니까, 이번엔 땅이 일렁거리는 느낌이라서 완전 놀랬었다.
그래도 두 시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만 배를 타서 그런가, 좀 쉬니까 살 것 같다.
“이제 가자.”
진이 쪽 빠진 음성으로 말하자, 희주가 그제야 풉! 하고 웃는다.
“웃지 마.”
심통이 나서 툴툴거렸더니, 희주가 뒷짐을 지곤 얘기한다.
“넌 뭐든 잘하는 줄 알았더니 못 하는 것도 있었네.”
“참네, 난 사람 아닌가.”
“그러게.”
날 보는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그러지 마라.
심장 울린다.
간신히 진정시켜놓았는데, 또 어지러울라.
“일단 숙소로 가자.”
다행이라고 할까.
섬은 디알로가 말했던 것처럼 크지 않았다.
부지런히 걸으면 한 바퀴 도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릴 정도의 크기. 우리가 머물 숙소는 동쪽 해안에 있었는데, 항구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였다.
잠시 후, 희주와 함께 도착한 해변.
헐! 방갈로?
삼 층짜리 방갈로 본 적 있나?
미친놈이!
방갈로란 뜻은 알고나 지껄인 거냐?
저게 어딜 봐서 방갈로로 보이는 건지.
각 층마다 방이 적어도 세 개씩은 있어 보이는구만.
지붕도 야자잎은커녕 제대로 기와를 얹었네.
그냥 별장이잖아, 별장.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디알로의 얘기를 떠올리며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코니…라는 이름이 붙은 방갈로…라고 쓰고 별장이라고 불러야 할 숙소 앞에서 나는 픽하고 웃고 말았다.
디알로가 지었다는 ‘코니’라는 이름은 어릴 때 키우던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의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집에 이름을 붙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개 이름을 갖다 붙이다니. 디알로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이상한 건지 도무지 판단이 안 선다.
“어디 보자, 비밀번호가…….”
마당 안으로 들어서서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올려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오른 뒤, 현관 앞에서 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삑 삑 삑…….
숫자를 몇 개 누르지도 않았을 때였다.
덜컹!
문이 열렸다.
응?
나 아직 다 안 눌렀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라?
제롬?
문을 열고 고개만 내민 제롬이 킥킥거리며 얘기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 것이에요.”
하아, 이게 만나자마자 훅치고 들어오네.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그 말……. 이럴 때 쓰기엔 좀 이상하지 않냐? 그리고…….”
문 손잡이를 잡아채 확 끌어당기자, 안쪽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네 남자가 보였다.
누군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알로하아아아아!”
디알로가 과장된 몸짓으로 연어를 잡는 곰처럼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다가 기가 차서 말했다.
“뭐야? 왜 니들이 여기 있어?”
성큼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따지고 들자, 뒤통수에서 제롬의 음성이 날아든다.
“여긴 우리 별장인 거에요.”
“그렇지. 우리 별장이지.”
“우리 섬이기도 하고.”
“우리 발로 오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지.”
“힘들진 않았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레이크헬 멤버들 중에 유일하게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베릴을 보며 대답해주었다.
“뱃멀미 때문에 죽는…….”
아, 이게 아닌데.
“뭐야!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어? 디알로! 너!”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디알로가 키득거리며 얘기했다.
“배고프지?”
“야이! 지금 밥이 넘어가? 너 일루 와봐!”
“우린 배고픈데……. 희주, 배 안 고파?”
속도 좋지.
우리 희주는 화도 안 나는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배고파요.”
“오오! 거봐, 쟤들 밥 안 먹고 바로 올 거라고 했잖아.”
“아, 수컷의 슬픈 운명…….”
“엔간히 해라!”
“읏차!”
바닥에 캐리어를 내팽개치는 걸 제롬이 얼른 받아 한쪽에 세워두곤 안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며 소리쳤다.
“으아아아악! 넘친다, 넘쳐!”
“어? 이거 타는 냄새 아냐?”
“켁! 그럼 안 되는데! 난 레어가 좋단 말이야!”
왁자지껄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래, 뭘 기대한 거냐?
애당초 디알로의 말을 믿고 여기까지 온 내가 순진했던 거지.
근데, 이 자식들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나마 제정신이 박혀 있는 베릴에게.
“뭘 타고 온 거야?”
“호놀룰루 공항까진 자가 비행기. 거기서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여기까지 왔지.”
뭐야? 그렇게 편하게 올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여태 난 뭐한 건가 싶어서 자괴감이 들 정도다.
또다시 한숨이 나오려 했을 때, 이미 희주는 주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희주의 능수능란한 지휘 아래 난장판이나 다름없던 주방이 정리되었지만…….
그땐 이미 스테이크고 나발이고 전부 숯덩이로 변해버린 뒤였다.
결국, 점심을 먹으려던 게 오후 늦게가 돼서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도 내가 가져온 컵라면으로.
“오! 이거 맛난데?”
“누들은 언제 먹어도 진리지.”
진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 진짜 험난한 시간들이 되겠구나.
우리 희주, 괜히 휴가라고 나만 믿고 왔다가 여기서 식순이 노릇만 죽도록 하고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려고 희주랑 여행 온 게 아닌데…….
쯧, 저 자식들은 이미 글렀고, 어디 괜찮은 도우미 구할 데 없나?
이왕이면 말 잘 듣고, 착하고, 성실하며, 무엇보다도 음식 좀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지금의 이 상황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젠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이미 세 개째 컵라면을 폭풍 흡입하고 있는 디알로를 한차례 노려본 후, 젓가락을 깨작거렸다.
젠장! 진짜 큰일이네.
앞으로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지는 거 아냐?
고민하고 있는데, 속 편한 우리 디알로가 밥을 다 먹고는 힘이 났는지, 공이라도 물어오는 개처럼 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도 베릴이 가장 아끼는 기타를.
그걸 본인의 허락도 없이 내게 맡기곤 웃어 보인다.
“신 나게 한 곡 켜봐. 난 세상에서 네 연주가 가장 듣기 좋더라. 아, 베릴만 빼고.”
이게 지금 누굴 조련하고 있는 거야?
나야, 아니면 베릴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받았다.
베릴도 아무런 말도 없이 지켜만 보길래.
혀를 차면서 기타를 치자, 다들 낄낄거리다가 이내 집중하곤 내 연주를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연주를 하고, 뒤이어 베릴이 또 연주하고, 다음에는 콜린이 노래도 부르고 하면서 지극히 악쟁이들 다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뉘엿뉘엿 해가 지며 수평선 위에 번지듯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제롬이 후다닥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녀석이 와서 말했다.
“도준, 손님인데?”
“손님?”
의아해져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현관 쪽으로 향하는데, 뒤쪽에서 제롬을 비롯해 레이크헬 멤버들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들과 함께.
“어?”
현관 앞에는 내 허리께나 올까 말까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이제 막 숨을 고른 듯 아직도 들썩이는 어깨를 하고선.
소년……. 리노가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헐! 진짜 잔돈을 돌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