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57화 (157/260)

# 157

#157. 아직 멀었어요(1)

농담인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듯하다.

다들 벙찐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녀가 지닌 위상은 그런 것이다.

피아노에 한정한다지만, 세계 정상급 연주자.

무려 여제라는 칭호로 불리는 여자.

그런 사람에게서 함께 연주하자는 제안을 받으면 누구라도 선뜻 받아들이긴 어려울 터.

새로 유행하는 조크인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 빈말을 했을 리가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요.”

“정말이죠?”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가 없다.

바라보는 내 얼굴이 다 밝아질 정도로.

진담이었나 본데, 그 정도로 좋은 건가?

좀 이해가 안 간다.

왜 나랑 합주를 하고 싶은 걸까?

의아해졌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보단…….

“슬슬 여길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그때였다.

“도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크리스티나의 질문에 되물었다.

“어떻게 하다니? 뭘?”

“크리스마스잖아?”

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일 년에 한 번 있는 날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얼굴만 봤다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가족들도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즐거운 추억을 만든다.

연인들의 경우엔 입 돌아갈 만큼 추워도 손 꼭 붙잡고 하염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날이기도 하고.

가족도 없고 연인도 없으면 친구들끼리라도 밤새 술 마시면서 서로 외로운 처지를 토로하는 자리.

그런 날이다.

인류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란.

뭐, 크리스마스 이브가 피크이긴 하겠지만, 크리스마스 당일도 만만치 않다.

사실 경기만 좋으면 12월 31일까지 분위기는 이어지니까.

연말 송년회와 겸해서 거리는 흥청망청 불야성을 이룬다.

원래대로라면 나 역시 그랬겠지만,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워낙 바빴어야지.

그러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크리스티나가 상기시켜준 것이다.

“글쎄. 이대로 집으로 가긴 좀 그렇긴 하지.”

말하면서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희주가 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여기서 그녀와 단둘이서 나가버리면 말 그대로 나라 팔아먹은 역적취급 당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희주의 바람을 싹 무시하기도 좀 그런데…….

어쩔까?

살짝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핸드폰이 울린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곤 나도 모르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양쪽 눈썹이 불균형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전화를 받았다.

하아! 근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좀 컸어야지.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얼마나 큰지, 대기실에 있던 모두가 다 들을 정도였다.

망할 자식!

- 도준! 언제 올 거야! 배고파!

디알로의 외침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어딘데?”

- 응? 어디긴? 집이지.

“그러니까, 그 집이 어디냐고.”

- 어디냐니? 우리 집이지.

하아,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다 싶었다.

이 자식아! 언제부터 거기가 ‘우리 집’이 된 건데?

가끔 만화에서 이마에 혈관이 돋는 장면을 보게 될 때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비웃었는데, 왠지 지금 내 이마에 혈관이 불룩 돋았을 것 같다.

“다들 거기 있는 거냐?”

- 그렇다니까. 근데, 큰일 났어!

“……큰일?”

- 그래! 제롬이 파티 준비한다고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니까! 그러니까, 얼른 와서 우리 밥 좀 해줘! 배고파 죽겠다니까!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러니까, 뭐야?

파티?

깜짝 파티라도 하려고 했던 건가?

내가 집에 들어가면 짜잔 하고 놀래켜 줄 심산으로?

참네. 어떤 면에선 귀엽네.

이러면 화를 낼 수가 없잖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다려봐. 금방 연락 줄게. 아! 그리고 제롬한테 전해줘. 지금부턴 주방 물건들에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 오케이!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를 끊고선 다시 한 번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 내쉬려는 찰나였다.

“저어…….”

응?

돌아보니, 희주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면 우리…….”

“……?”

“뒤풀이 할까?”

뒤풀이라…….

거참, 미국에 와서 뒤풀이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또 몰랐네.

“디-프리? 그게 뭐야? 킴?”

크리스티나가 눈을 빛내며 끼어든다.

그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됐다.

근데, 그래도 되나?

난 희주의 얼굴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희주는 내 속내를 읽은 건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난 괜찮아.’라고 얘기하듯이.

그렇다면야.

난 돌아섰다.

“크리스티나, 조안나, 에단. 그동안 진짜 고생했다. 그리고 니콜 교수님,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곤 모두에게 웃어 보였다.

“그런고로, 우리 집에서 뒤풀이……. 음, 파티를 할 생각인데, 괜찮으면 함께들 가시죠?”

대답은 따로 들을 필요가 없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실 안이 환호성으로 뒤덮였으니까.

***

나라마다 언어가 다르고 라이프 스타일이 다른 만큼, 문화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엔 뒤풀이……. 회식에 대한 문화 따윈 없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워낙 가족 중심의 사회인데다가, 파티란 개념은 둘 중 하나기 때문.

아직 결혼하지 않은, 한마디로 좀 더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기 위한 세대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음악 틀어놓고 술 마시며 춤추고 놀거나, 그게 아니면 진짜로 뭔가 축하할만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것.

그것도 가족 단위로 함께 모여서 소소하게 하거나 비즈니스 상 필요해서 벌이는 게 파티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처럼 회사 동료들과 함께 시도때도없이 하는 회식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거지.

하긴, 한국에선 가족들끼리 여간해선 파티를 하진 않지.

생일 파티도 파티라고 부를 수 있다면 또 모를까.

아침에 식탁에 둘러앉아 밥 한 끼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게 한국 사람들이니까.

물론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의 개념은 아니다.

그저 다르다는 것일 뿐.

어쨌든, 뒤풀이는 파티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자발성의 문제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 자발적으로 모여 지난 이틀간 성공적인(?) 공연을 한 것에 대해 축하 파티를 하는 중이다.

덕분에 지금 우리 집은 갑작스럽게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상황을 주도한 건 레이크헬이었고, 우습게도 녀석들은 지들이 꼭 무슨 집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나마 희주가 주방에 버티고 서서 급하게 부른 도우미 아주머니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손님 아닌 손님들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젠장. 이러다가 진짜 눌러앉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왜 매번 사람이 느는 거지?

레이크헬이 여기 있으니, 캘리가 묻어온 건 이해할 수 있다.

근데…….

마가렛 헤라시오네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흠, 이거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발이 넓어지는 거 같아서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자꾸만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는 거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다.

“오늘 연주했던 거 음원으로 출시한다면서요?”

마가렛 헤라시오네의 물음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호호호. 이미 아시아에선 ‘별’이라고 불린다고 하더니, 진짜 초연하네요. 인기도 돈도 명예도……. 역시 제가 생각했던 대로네요.”

오글거림과 부담감이 뒤섞여 순식간에 오징어 동상이 될 거 같은 걸 애써 참으며 다시 한 번 웃어 보일 때였다.

“어이, 도준! 오늘 공연 보니까, 재밌어 보이더라.”

디알로가 다가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낄낄거렸다.

“웃기고 있네. 눈물 질질 짜던 녀석이.”

유진의 시니컬한 한마디에도 디알로는 꿋꿋하기만 하다.

“도준. 나 감동했었다니까.”

제롬은 여전히 솔직했고.

“잘하더라. 즐겁게 보이고도 했고. 부러울 정도였다.”

콜린은 역시 리더답게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그사이 베릴은 마가렛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그 특유의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중에 우리도 한번 하자.”

“응? 뭘?”

“클래식이랑 밴드, 거기에 너. 재밌을 거 같지 않아?”

“흠……. 그렇긴 하네.”

“삼중주? 사중주? 그 정도는 너무 약하지. 밴드까지 함께 하는데 오케스트라 정도는 동원해야지!”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작곡은 누가 하고? 응? 그쯤 되면 거의 교향곡이라고 봐야 하는 거 아냐?”

유진이 툴툴거리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인다.

나?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내저었다.

“야야! 뭔 소리들 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교향곡을…….”

어? 재밌을 것도 같은데?

한번 해볼까?

불현듯 든 생각에 말을 하다 말고 턱을 매만졌다.

그때였다.

“도준아! 기사 떴어!”

저만치서 마루 누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나가 도도도 달려와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서 확인해보곤 혀를 내둘렀다.

이건…….

[김도준. 그는 인류의 보물이다.]

보는 순간, 오그라졌다.

이, 인류의 보물?

아 진짜 미치겠네.

대체 누구야? 이런 기사를 쓴 사람이.

조나단?

<뉴욕 포스트 저널>이라면,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문들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세 곳 중 한 곳이잖아?

근데, 이런 기사를 써?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이래도 되나?

그들 눈에 비친 난, 한낱 동양 출신의 싱어에 불과할 텐데?

내가 알기론 아무리 미국이 현대에 와서 개방적이 되고 나름 인종차별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한다곤 하지만, 아직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백인들 위주로 사회가 굴러가고 있을 텐데…….

특히 뒤에서 언론을 통제하는 걸로 알려진 보수세력이 이런 기사가 나가는데도 가만있었다고?

오그라드는 건 오그라드는 거고, 의아해져서 얼른 기사를 읽었다.

- ……본 기자는 카네기 홀에서 들었던 김도준의 연주를 잊을 수가 없다. 특히 그가 마지막에 부른 ‘SOMETHING OR NOTHING’은 레이크헬의 원곡을 클래식으로 편곡한 커버곡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답보 상태에 빠져 있는 음악계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중략)……틀림없이 그는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 전인미답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리라는 기대를 품어본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칭찬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건 마가렛이 했던 인터뷰와 비교해도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의 극찬이잖아.

“오오! 장난 아닌데? 어? 그런데 조나단이라면, 그놈 아냐?”

“맞아. 뮤지션들이라면 이를 박박 갈아대는.”

“와아, 웬일이래? 이 자식 이거 딴생각 있는 거 아냐? 이렇게 팍팍 띄워 줬다가 내일 되면 자신이 잘못 봤다고 하면서 막 깎아내리고 하는…….”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뭔데? 이놈이 이럴 놈이 아니잖아?”

“도준의 음악에 감동 받은 거 아닐까?”

레이크헬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궁금증이 생겼다.

조나단인지 뭔지, 얼마나 악독하게 뮤지션들을 다뤘으면 이런 얘기들을 하는 걸까?

의아해져서 막 물으려던 참이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제가 가볼게요.”

안 그래도 멋쩍었는데, 잘됐다 싶어서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곤 2층으로 내려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 사람이 있나?

혹시 찰리?

오늘 줄리아드 공연이 있다고 얘기해놨었는데…….

가게가 바쁜가?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다 되어간다.

이 시간이면 그렇게 바쁠 시간도 아니잖아.

의아해하는 동안 현관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곤 문을 열었다.

어?

그리고 놀랐다.

눈앞에 뜻밖의 얼굴이 보인다.

곱슬머리에 반쯤 뜬, 아니 감은 눈.

아즈마엘이었다.

한데…….

술 냄새가…….

“아, 아즈마엘.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묻자, 그는 날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얘기했다.

“많이 마신 건 아니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어……. 그, 그래.”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왜 온 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볼 때였다.

아즈마엘이 여전히 반쯤 뜬 눈을 한 채로 말했다.

“킴……. 나도 너랑 연주하고 싶어.”

“갑자기 그게 무슨…….”

“아니, 꼭 그래야겠어. 날 이 지긋지긋한 수렁에서 빼내줄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그는 내 얘기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아. 너 같은 천재는 모르겠지. 아무리 애를 써도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 같은 놈의 심정을…….”

헐! 이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황당했지만, 일단은 그를 계속 밖에 세워둘 수만도 없어서 집안으로 들이려는 차였다.

아즈마엘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애원했다.

“제발 날 버리지 마!”

.

.

.

아씨! 진짜 미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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