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55화 (155/260)

# 155

#155. 매혹 (3)

눈앞에 보이는, 아니 느껴지는 시공간.

과연 그걸 ‘시공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차치하고, 나는 기뻤다.

어제, 갑작스럽게 맞닥뜨렸을 때만 해도 당황했었지만, 이젠 아니다.

정말이지 아쉬웠으니까.

만일 그때, 공연 중이 아니었더라면…….

그래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이 끝나지만 않았더라면…….

관객들로부터 갈채만 들려오지 않았으면…….

아쉬움은 늘 그렇듯 후회를 남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되돌릴 수 없다.

바닥에 쏟아버린 물을 도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원하고, 또 원한다고 하더라도.

한데,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순백의 ‘시공간’이.

문제는…….

그래서 여기가 어디…라고 부를 수나 있나? 아무튼, 이게 뭐냐는 건데.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뭔가 내 안에서 깨져나갔다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공연은 시작도 못 해봤을 거다.

당장 눈앞이 어두워지며 머리가 어질어질……. 그러다가 픽하고 쓰러졌겠지.

그랬더라면 지금쯤 아마도 병원 침상에 누워 있지 않았을까?

혹시…….

그릇이 깨진 건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고 하면 큰일인데?

아니, 생각해보니 그건 아닌 거 같다.

그 증거로 내가 아직 쓰러지지 않았잖아?

봐라. 이 상황을.

순백의 공간,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무엇이든 원하기만 하면 다 채워넣을 수 있는 시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관객석이 고스란히 시야에 비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현재 뭘 하고 있는지도 확연히 인지하고 있다.

지이이이이잉!

일렉트릭 기타를 치면서 에델바이스를 록으로 편곡한 걸 부르는 중이다.

그것도 손목에 스냅을 주어 비브라토까지 구사하면서.

게다가 후반부에는 가사까지 바꾼 상태.

- Flowers are blooming, getting lost, waiting to bloom again.

Edelweiss is an eternal flower.

Please bloom for us forever.

Edelweiss, Edelweiss

The flowers will bless us forever.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길 기다려.

에델바이스는 영원한 꽃.

언제까지나 우릴 위해 피어줘.

에델바이스, 에델바이스.

꽃은 영원토록 우릴 축복해줄 거야.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순백의 시공간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

소리들이……?

내가 만들어낸 소리들……. 기타음과 노랫소리가 순백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인……. 아니 느껴진다.

뿐만 아니다.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에단이 연주한 소리들도 마찬가지.

마치 꽃을 보고 몰려드는 나비들처럼.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순백의 시공간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느낌이 왔다.

아무것도 없는,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리들을 유혹하고 있는.

이걸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래, 매혹.

아! 그렇구나!

깨달음은 한순간에 온다고 하더니만.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은 없었다.

그럼에도, 충분히 놀라웠다.

소리는…….

매혹이구나!

그저 들려주는 것이 아닌,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기와도 같은, 그러면서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아름다운, 흡사 쏟아져 내리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손을 대면 그대로 사라질 것처럼 순수하지만 그럼에도 만져보고 싶게 만드는.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소리구나.

그게 음악이구나.

순간 순백의 시공간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이렇다 할 만큼 크게 변한 건 아니었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만들어낸 소리들이, 심지어는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에단이 연주한 소리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걸 허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변했다.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들이.

***

조나단은 기가 막혔다.

김도준의 실체를 파악해, 자신이 지닌 필력으로 잔인할 정도로 난도질한 후 <뉴욕 포스트 저널>에 싣고 말겠다고 다짐했건만.

‘뭐 이런 경우가!’

이제 열여덟 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클래식 쪽에 발을 디딘 것도 몇 달 안 됐다고 하더니만.

뿐만 아니라 단지 피아니스트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 물론 알고는 있었다.

김도준이 한국 출신의 싱어라는 것은.

그것도 빌보드 차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갖췄다는 것을.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지고 놀고 있잖아?’

관객들을 희롱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저들은, 정확히는 저 팀을 이끌고 있는 김도준은 이미 한차례 세상에 선보였던 노래들을 반죽이라도 하듯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낸 모양대로 빵을 구워냈다.

그러곤 그 냄새로,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모습으로, 한입 베어 물면 촉촉하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클래식과 현대음악의 만남.

그 시도는 그동안 수차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성공적이라는 평가보단 형편없는 실패란 평이 더 많았다.

그것도 압도적일 정도로.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같은 음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지만, 그만큼이나 이질적인 두 음악. 클래식과 대중음악은 늘 평행선을 달리듯 한 시대에 공존하면서도 서로 간에 간섭하지 않고 발전해왔다.

그 둘이 하나가 된다?

말은 좋지만, 실제론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게 조나단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도준이 새로운 시도라도 한다는 듯 그 짓을 또다시 반복한다고 했을 때 내심 비웃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데, 결과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

서로 섞고 하나로 만든다의 개념이 아니다.

그냥 각자가 저마다의 자리에 있을 뿐인데…….

그래, 함께 놀고 있다.

그런데도 어울린다.

마치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꼭 새로 이사 온 아이랑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또 어울려 노는 동네 아이들처럼 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깨달았다.

자신이 놀라는 건 너무 일렀음을.

“헉!”

김도준이 에델바이스를 부르는 중이었다.

일렉트릭 기타로 비브라토를 구사하며 록풍으로 바꾼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였다.

“큭! 이건……. 마, 말도 안 돼!”

무대에서부터 들려온 소리들이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혀 들었다.

그 순간 그는 홀려버렸다.

소리에.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

아즈마엘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거듭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귓가로 들려온……. 아니 가슴을 파고든 소리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아즈마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그렇게나 꿈꾸던 소리.

궁극적으로 가지길 원하던 경지가 눈앞에 있었다.

혹시라도 꿈이 아닐까 싶어서 눈을 크게 떠보기도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무대에서부터 자신의 자리까지 마치 원래부터 나 있던 길처럼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직선으로 치달려오는 노랫소리. 그리고 연주 소리들.

파르르르.

관객석에 앉기 전만 해도 반쯤 감고 있던 눈은 이미 더 할 수 없이 커져 있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그의 눈가는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즈마엘은 멍한 표정으로 무대 위 도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천재?

웃기는 얘기다.

저놈에게 수식어를 붙이는 것 자체가 우습다.

그냥 그는 그인 것이다.

왜냐면…….

이런 소리는 오직 그만이 낼 수 있을 테니까.

아직까지는.

꾸욱.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는 아즈마엘이었다.

***

콜린을 비롯한 레이크헬 멤버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파격?

그런 건 없었다.

근데, 파격적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물과 기름을 굳이 섞을 필욘 없다…인가?”

중얼거리는 콜린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그때까지 한마디도 없던 베릴이 말했다.

“그때와 또 달라.”

“응? 그때?”

“일 년 전……. 클럽에서 보았던 때와 달라졌어.”

디알로의 물음에 베릴은 손가락을 들어 무대 위를 가리켰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도준이 보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베릴이 디알로를 바라본다.

“그는 이미 우릴 뛰어넘었어. 노래뿐만 아니라 악기로도.”

디알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아까 도준이 드럼을 칠 때 느꼈던 위화감. 그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순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된 디알로를 무시한 채 베릴이 말했다.

“그가 내는 소리는 여길 울려.”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짚고 있는 걸, 레이크헬 멤버들은 놓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아직도 멍한 표정인 채인 디알로만 빼고서.

***

내가 생각해도 미친 거 아닐까 싶었다.

원래와는 조금, 아주 조금 다른 연주였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많은 게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내 입술 사이로 튀어 나간 노래들이 기묘한 느낌으로 사방팔방 퍼져 나간다.

그 달라진 느낌이 뭐냐고 물으면, 나로선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도 그건 음악 평론가……. 아니, 평론가의 할아버지가 와도 설명하지 못할 거다.

미치겠네.

달라지긴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진 것인지를 모르니.

쯧, 모르겠다.

일단 부른다.

연주한다.

그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니까.

그렇게 노래를 끝내고, 기타 연주까지 마쳤을 때였다.

응?

이거 왜 이래?

반응이…….

묵직한 침묵 속에 빠진 장내를 둘러보며 아연실색하고 있을 때, 갑자기 관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꺄아아아아아아악!”

“킴! 킴! 킴! 킴!”

“키임또쭌! 키임또쭌!”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야 이거?

나 지금 카네기 홀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

근데 왜 기시감이 드는 거지?

혹시 꿈인가?

설마 콘서트장에서 노래 부르다가 잠시 졸기라도 한 거 아냐?

하아, 아닌 건 나도 안다.

근데, 이게 진짜 말이 안 되는데…….

기립해서 박수를 치면 모를까.

저 반응들은 뭐냐고?

게다가…….

“엥콜! 엥콜! 엥콜! 엥콜!”

에, 엥콜?

다들 착각하나 본데…….

혹시라도 커튼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진 해봤는데, 웬 엥콜?

기가 막혀서 관객석을 한차례 훑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과 드레스 차림의 여자들이 무슨 십 대 소녀들처럼 꺅꺅거리며 내 이름을 연호하는 모습이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내젓던 나는 그때 볼 수 있었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 있는 다섯 명의 남자들을.

이것들 봐라?

콜린을 비롯해 유진, 베릴, 디알로, 제롬까지.

다들 놀랐다는 표정은 역력한데, 그렇다고 환호를 지르거나 하진 않는다. 단지 가볍게 박수를 치고 있을 뿐.

그나마도 디알로는 나사 하나쯤 빠진, 넋 나간 얼굴이 되어 박수조차 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관객들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그러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을 들으며 크리스티나에게 다가갔다.

곧이어 조안나와 에단을 부른 뒤, 그들에게 물었다.

“저번에 연습했던 곡 기억나?”

“응?”

세 사람은 관객들의 반응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한 연주와 노래 때문인지 아직도 어리벙벙한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했다.

“SOMETHING OR NOTHING.”

세 사람이 놀라는 가운데, 씨익 웃어 보였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잠시 후, 관객들이 자리에 도로 앉았다.

여전히 환호성은 간헐적으로 들려왔지만, 아까보단 잦아들었다.

그럴 수밖에.

내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크리스티나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으니까.

2015년 발표한 앨범의 대표곡임과 동시에 레이크헬이 부른 노래 중 최고의 명곡이라고 알려진 곡.

‘SOMETHING OR NOTHING’이 클래식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뭐, 뭐야 이거!”

“와! 뭐 이런……!”

벙찐 얼굴이 된 유진의 얼굴만큼이나 레이크헬 멤버들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설마하니 자신들의 곡을 연주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근데……. 좋네요.”

제롬의 한마디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뿐만 아니라,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무대를 비춘 조명들 때문인지, 어쩐지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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