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 매혹 (1)
물론 알고 있다.
어제 섰던 그 무대가 아니란 것쯤은.
당연하지 않은가.
연주자가 달랑 네 명이다.
그것도 이제 막 줄리아드에 입학한 신입생들이다.
그런 이들이 카네기 홀의 메인 홀인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움에 선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 시각 2,800석이 넘는 규모의 스턴 오디토리움에는 도미니크, 즉 뉴욕 필하모니가 연주회를 가지고 있을 터다.
그럼 우린?
말할 것도 없다.
카네기 홀에서 가장 작은, 600여 석의 잔켈 홀도 아닌 268석 규모의 와일 리사이틀 홀.
우습다?
그럴 리가.
비록 여기서 제일 규모가 작은 무대에 선다고는 해도, 이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여길 렌탈하기 위해서 니콜 교수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을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려야 우리 네 명을 여기에 세울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아무튼, 장소 문제야 언제나 그렇듯 내 몫은 아니고, 난 공연장이 어디가 되었든 최선을 다해 공연을 펼치면 그만. 콘서트에 설 때마다 아저씨가 그걸 바랐듯, 니콜 교수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는다.
“터, 터질 것 같아!”
크리스티나가 겁먹은 듯 말하자, 조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왜 이렇게 넓어 보이는 거야?”
쯧, 겁먹은 듯이 아니고, 겁먹었네.
참네. 관객이 많아 봐야 300명도 안 되는데…….
문제는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진을 친 채 소란스럽게 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아마 공연이 시작되고 문이 닫히면 저들도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겠지.
후우, 그래도 쿨하고 강단 있는 에단은 좀 낫……지 않구나.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손이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잘게 떨리고 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다들 공연 경험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이보다 더 큰 무대에 서봤겠지만, 여기만큼 긴장되진 않겠지.
아무리 규모가 작은 와일 리사이틀 홀이라지만, 누가 뭐래도 여긴 카네기 홀이니까.
뭐,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만…….
짝!
가볍게 친다고 쳤는데, 손뼉 소리가 제법 컸던 모양이다.
크리스티나는 물론이고 조안나와 에단까지 흠칫 놀라 내게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떨리지?”
다들 아무 말이 없다.
“몇백만 명이나 되는 관객들 앞에서 공연했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무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떨린다. 엄청나게.”
물론 겁나선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공연을 앞두고 밀려드는 흥분감. 여기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기분 좋은 긴장감 때문이었지만,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지, 진짜?”
“너도……. 풉! 사람이구나.”
얘들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내가 사람이지, 뭐 괴물이라도 되는 줄 알았나?
다시 한 번 손뼉을 치며 세 사람을 한명 한명 바라보았다.
내가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그럼 된 거다.
이제부터 신 나게 즐겨도 모자랄 판에 잔뜩 굳은 얼굴이어선 곤란하지.
“손님들이 여기까지 어렵사리들 오셨는데, 대접은 제대로 해야겠지?”
호객꾼처럼 말하자, 다들 깔깔 웃는다.
별로 웃기지도 않는 말에도 저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었던 듯하다.
“자, 그럼 가볼까?”
“응!”
크리스티나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대답하고, 조안나와 에단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니콜 교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한차례 고개를 까닥거렸다.
나 역시 고개를 까닥이곤 돌아섰다.
그러곤 무대 위, 커튼 안쪽에 세팅되어 있는 악기 앞으로 걸어나갔다.
***
<뉴욕 포스트 저널>의 기자인 조나단은 득의에 찬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발 빠른 움직임으로 표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 그의 이런 순발력이야말로 지금의 그를 음악 계통의 전문 기자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기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최고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오로지 약삭빠른 계산과 그보다 더 빠른 행동력 덕택이란 얘기는 아니다.
독설.
그야말로 철저하게 해부하듯 분석해 칼질해대는 그의 날카로운 필설이야말로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오늘도 마찬가지.
그가 여길 찾은 까닭은 다름이 아니었다.
마가렛 헤라시오네가 ‘피아노의 황제’로 등극하게 될 거라고 예언 아닌 예언까지 하며 격찬한 김도준. 그를 직접 보고, 자극적이면서 겉멋만 잔뜩 든 연주 실력을 신랄하게 비평하기 위해서였다.
‘어디 한번 보자고.’
얼마나 잘하나?
아니, 얼마나 형편없나.
조나단은 아직 커튼이 올라가지 않은 무대 쪽으로 시선을 던진 채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
관객석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일단의 무리. 그들은 다름 아닌 도준에게서 거의 강매 당하다시피 하며 비싼 값을 치르고 표를 구입한 레이크헬 일당. 그리고 그 옆에는 그보다도 반값에도 미치지 않는 돈을 주고 표를 샀던 회사 식구들…. 강혁수와 고 팀장, 그리고 조마루가 앉아 있다. 희주를 비롯해 나머진 공짜 표란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지만, 다들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표를 얼마에 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체 어떤 공연을 보여주려나?”
콜린의 물음에 유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 자식이 뭘 얘기해줬어야 알지. 나 참,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그래도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크크큭. 그러니까 여기 있지. 진짜 웃긴 놈이라니까. 까도 까도 속이 안 보이는 놈은 정말 처음이라고.”
디알로의 얘기에 다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캘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하고 무대 쪽, 커튼이 내려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희주는 표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무대를 보는 중. 오히려 그 옆에 있던 샤오린이 떨리는 음성을 내뱉었다.
“아, 떨려! 내가 이런데, 도준 씨는 어떨까?”
그녀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곤 한숨처럼 말했다.
“사람들 진짜 많네요. 꽉 찬 거 같죠?”
좌석이 기껏해야 260여 석인데, 많아 봐야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희주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실제 숫자보다도 많게 느껴진다.
그게 관객들 한 명 한 명이 내뿜고 있는 열기 때문임을 이런 유의 경험이 없는 그녀로선 알 길이 없을 터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한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준인 떨지 않을 걸요?”
“그, 그런가요?”
희주가 픽하고 웃더니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눈빛으로.
“걔가 어떤 애인데요. 제 생일날 와서 일렉트릭 기타로 메탈을 연주한 애예요.”
“풉! 진짜요?”
중국인이면서도 곧잘 한국말을 하는 샤오린이었기에 희주는 굳이 영어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보셨지 않나? 그 왜 있잖아요. 유투븐에 올라와 있는, ‘밴드 털어먹은 반도의 흔한 고교생’이라고…….”
“아! 그거요!”
샤오린은 도준이 활동을 시작했던 거의 초창기에 떠돌던 영상 한편을 머릿속에 떠올리곤 깔깔 웃어댔다.
그땐 그냥 신들린 듯이 연주하는 도준이 멋지기만 했었는데, 실상은 그게 희주의 생일날 연주한 거였다니.
“호호호. 진짜 황당하셨겠네요.”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샤오린의 말에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되물었다.
“뭐가요?”
“그렇잖아요. 여자친구 생일날 와서는 낭만적인 노래를 불러주는 것도 아니라 콘서트장에서나 할법한 그런 거친 연주를 하다니. 후후, 도준 씨는 어떤 때보면 진짜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 같다니까요.”
“아뇨.”
가만히 듣기만 하던 희주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멋졌는걸요.”
그녀는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도 그렇지만……. 도준인 늘 빛이 나거든요.”
당사자가 들었으면 온몸이 오그라든다며 인상을 찌푸리고도 남을 소리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희주. 그녀를 보면서 샤오린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였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당황스럽기만 하던 그녀를 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조마루였다.
“시작하려나 보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저마다 웃으며 속닥거리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조마루의 얘기처럼 커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저 커튼이 올라가는 순간 공연이 시작될 터였다.
한데, 그때…….
팟!
팟!
팟!
장내에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연주홀이 암전으로 캄캄해지는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팟!
언제 커튼이 열린 걸까.
드러난 무대.
하지만, 여전히 암전으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들 저곳이 무대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천장에서부터 쏟아진 핀 조명 덕분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금발의 여자가 보였다.
그녀가 크리스티나라는 걸 아는 건 일행들뿐이었지만, 다른 관객들 역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딴……따다다단…….
피아노의 전체 윤곽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약한 조명 빛 속에서 그녀가 연주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곡이지?’
분명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곡들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되어 있는데…….
샤오린 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전주를 따로 만들어서 넣은 건가?’
그나마 레이크헬 멤버들만이 도준의 의도에 조금이나마 접근했을 뿐 다들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만들어낸 선율은 부드럽게 장내에 퍼져 나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듣기 좋은 곡은 그렇게 관객들의 마음을 조금씩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첼로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피아노 앞쪽으로 빛줄기 하나가 떨어지며 조안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
그제야 관객들은 알아차렸다.
“Overture & Preludium!”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려왔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OST.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제법 웅장한 느낌이 강한 곡이었다.
오늘 공연의 인트로인 셈이다.
‘서곡과 전조’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곡은 영화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곡들 일부분이 슬쩍슬쩍 끼어 있었고, 그러면서도 절묘하게 어우러진 리듬과 멜로디는 듣는 이로 하여금 기대와 설렘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전주를 삽입했을 뿐, 원곡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진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누구나…….’
콜린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파격적인 시도는 없는 건가…하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핀 조명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첼로를 켜고 있던 조안나 옆에서부터 바이올린 소리가 끼어들었다.
에단이었다.
정장 차림의 그가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어왔던 만큼이나 멋지게 활을 켜고 있었다.
그렇게 세 개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거의 원곡에 가까운 ‘Overture & Preludium’을 연주하며 공연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연주가 계속 이어져, 눈을 감고 들으면 마치 드넓은 꽃밭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뛰노는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곡의 중간쯤에 이르렀을까.
곡조가 변화를 일으켰다.
변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곡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너무나 이질적인 소리로 시작되었다.
탕!
피아노에 앉아 건반을 치고 있는 크리스티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세 사람. 그들과 정반대 즉 무대의 왼편 사이드. 그곳에서부터 탐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탕! 탕! 탕!
장내를 울리는 드럼 소리.
이제까지와 달리 핀 조명은커녕 촛불 하나 켜있지 않아서 보이진 않았지만, 소리만은 분명히 전달되고 있었다.
빠르게 질주하며 서서히 음을 끌어올렸고, 그 음들을 쫓아가는 관객들의 심장 역시 천천히 박동을 빨리했다.
투다다다다다다다……둥! 두둥! 둥! 채앵!
그 드럼 소리에 맞춰, 다른 악기들 역시 속도를 높이며 따라붙었고, 그 때문인지 ‘Overture & Preludium’은 이제 더는 원래의 그 곡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그 순간, 천장에서 빛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한 사람이 두 개의 스틱을 양손에 나눠 들고 미친 듯이 탐들을 때려대고 있었다.
도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