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 신세계에서 (3)
마가렛 헤라시오네가 누군가.
나처럼 이제 막 클래식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조차 알 정도의 셀럽이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베를린 필하모니와 협연하면서 화려하게 데뷔. 그 후로 전 세계에 피아노 열풍을 일으켰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
현재 나이 서른여섯. 그럼에도, 여전히 미모가 꺾이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방부여제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리는 그녀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피아노뿐만 아니라 클래식 쪽에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마가렛 헤라시오네. 유니세프 대사이기도 한 그녀는 되도록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인데, 때때로 한마디씩 내뱉을 때가 있다.
바로 오늘처럼.
그리고 그 대부분은 새로운 유망주에 대한 예언과 같은 말들이었다.
황당한 건 그녀의 예언 아닌 예언이 대부분 맞아떨어진다는 것. 그만큼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그런 그녀가 날 더러 황제 운운하며,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던 인터뷰까지 했단다.
아니, 그 여자는 언제 왔다 간 거람?
쯧, 그나저나 어쩌나?
그렇게나 잘 맞는다는 그녀의 예언도 이번에는 빗나가게 생겼으니.
피아노?
쳐야지.
근데, 나에게 있어서 피아노란, 아니 클래식이란 그저 지나쳐가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한데, 무슨 황제씩이나?
아이고, 의미 없다.
그래도 궁금은 하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들을 했는지.
해서 기사를 좀 봤는데…….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온다.
- 지난 10여 년간 피아노의 여제로 군림해온 마가렛 헤라시오네는 오늘 오후 열린 줄리아드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관람한 직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중략)……카네기 홀에 신성이 떴다고 운을 뗐던 그녀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그의 어떤 면을 보고 ‘피아노의 황제’라고까지 표현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칼을 휘두를 땐 과감하고, 짓누를 땐 신중하다. 그런가 하면 물러설 땐 일체의 망설임이 없으며, 맞서는 이에겐 잔인할 만큼 냉혹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이에겐 한없이 부드럽다. 이것이 황제의 모습이 아니고 뭔가? 향후 20년간 우리는 진정한 황제가 클래식 세계의 정점에서 군림하며 신세계를 열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미쳤네.
이 여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날 엿먹이려고 작정한 건가?
20년?
정점에서 군림?
하아, 누굴 왕따 시키려고 그러는 건가?
아니, 왜 가만있는 날 끌어들여서 이렇게 팍팍 띄우냐고.
그럼 내가 좋아할 거라 생각……. 후우, 날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그랬을 리는 없고. 그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데.
알기는 알고 얘기하는 건가?
내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게 겨우 4달 남짓이란 건?
아우, 머리야.
딱 견적 나오네.
클래식에 입문한 지 아직 반년도 안된, 그전까지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 등지에서 콘서트를 해온 싱어 출신 연주자. 게다가 이제 갓 열여덟 살이다.
평지풍파가 예상되는 상황.
아니나 다를까.
마가렛 헤라시오네의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한 시간도 안 돼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기사마다 달리는 댓글들. 그리고 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지는 글들.
누군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다던데, 난 피아노 협주 한번 하고는 셀럽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그게 좋은 의미만은 아니란 거다.
댓글이 아주 그냥…….
- 킴도쭌이 누군데? 마가렛 헤라시오네가 저렇게까지 격찬을 하는 거야?
- 줄리아드 학생.
- 듣기로는 한국 싱어 출신이라던데?
- 빌보드 차트에도 올랐다는 소문이 있어.
- 맞아. 방금 찾아보고 왔는데, 사실이더라.
- 하아! 말세군. 팝가수가 피아니스트? 근데, 그걸 또 피아노의 여제가 황제로 격상시켰군.
- 뭐죠? 대중 가수는 피아노를 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 격이 다르잖아, 격이.
- 미친! 격은 무슨 격? 클래식하면 격조가 높은 거고, 팝 부르면 허접하다는 거냐?
- 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
-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싱어 출신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의 황제가 될 거라는 게 이상하잖아요?
- 그래, 이번엔 마가렛 헤라시오네가 심했어. 킴인지 뭔지 하는 한국인은 나이도 어리다던데.
- 아무튼, 클래식에 망조가 들린 것만은 분명하네.
햐! 논쟁이 격해도 너무 격한데?
바짝 마른 갈대밭에 불똥 하나 튀자 순식간에 일어난 들불 같다.
“크크큭. 역시 도준이답네!”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재밌기도 하겠다!
디알로 이 자식을 그냥!
“진짜 이러기……. 응?”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왜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건데?
게다가 집안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레이크헬 멤버들이야, 여기까지 쫓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그렇다 쳐.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브라이언이야 당연하고.
회사 식구들이랑 샤오린 그리고 희주까진 이해할 수 있다.
그래, 실비아까지도 납득한다.
에단이랑 크리스티나, 조안나야 같은 팀원들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게다가 니콜 교수님?
하아, 좋아.
교수님은 스승님이시니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캘리?
이 여자는 왜 여기 있는 건데?
가만.
제롬이랑 속닥거리는 걸로 봐선…….
묻어온 거군.
레이크헬에게.
이것들이 진짜.
무슨 유기견 주워오는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 있을 때, 마침 시선을 돌리던 캘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쑥스럽다는 듯 눈을 살짝 내리깔고 얼굴을 붉힌다.
그 모습에 황당해졌다가 나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져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응?
근데 뜻밖이다.
괜찮은 건가?
희주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음……. 희주가 의외로 대인배였던가?
만나자마자 머리채 잡고 싸울 줄 알았는데…….
아, 지금 이런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다시 돌아가서 왜 다들 날 보면서 금방이라도 혀를 찰 듯, 혹은 눈을 반짝이고들 있는 거냐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새는 것이에요.”
얼씨구?
제롬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던지는 말에 기가 막혀서 쏘아붙였다.
“누가 바가지야!”
“왜? 칭찬인데!”
“칭찬?”
“클래식 쪽으로 와도 이런 이슈를 만들어내는 도준이 대단하다고…….”
하아, 도대체 저런 표현들은 누구한테 배우는 거냐고.
이마를 짚으며 한마디 했다.
“그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거든?”
“어? 그래?”
고개를 갸웃하며 마루 누나한테로 시선을 던지는 제롬.
쯧, 누나가 범인이었구만.
한숨을 내쉬곤 여기저기서 깔깔대며 웃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마냥 웃을 때는 아니잖아?”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디알로가 되물었다.
참네, 목소리가 크기도 하지.
“왜? 재밌잖아?”
“그러게? 원래 인기 없으면 악플조차 안 달리는 법이잖아? 혹시, 안티팬이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되는 거야?”
“쳇! 아직도 도준을 몰라? 저 자식은 이 정도 일로는 꿈쩍도 않는다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레이크헬.
요즘 들어 사용하는 말들이 어째 한국인 같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였다.
“근데, 도준. 너 내일은 어쩔 거야?”
그중 베릴 만이 차분하게 물으며 날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니콜 교수님이 서 계셨고. 어쩐지 베릴 쪽으로 상체가 살짝 기운듯한 느낌이 드는 건 그냥 느낌적인 느낌인 거겠지?
“내일?”
“너희 내일 공연 있다며?”
“그렇긴 하지.”
묻기는 베릴이 물었는데, 한숨은 왜 에단이 내쉬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단이 성큼 발걸음을 내딛더니 창가로 다가간다.
그러곤 서슴없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들려오는 목소리. 아니, 외침들.
“창문이 열렸다!”
“킴도쭌?”
“어디 어디?”
“사진부터 찍어!”
“킴이 아닌 거 같은데요?”
“상관말고 무조건 찍고 봐!”
흠……. 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카네기 홀을 나설 때도 몇 명 달라붙는 듯하더니, 기어이 여기까지 쫓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그새 기사가 뜨고 이슈가 되면서 숫자가 불어난 거겠지.
빌어먹을 기자들.
한국이나 여기나, 어떻게 달라지는 게 없냐?
“여기가 이 정도면 내일 장난 아닐 텐데?”
“들어가기도 전에 깔려 죽는 거 아냐?”
“설마요?”
“그래도 사진은 엄청 찍힐 걸?”
“잘 피해서 가면 되지.”
“기자들을? 에이, 기자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독한지 잘 알면서.”
아주 신바람이 났네.
레이크헬을 비롯해 모두가 남의 일……아, 남의 일 맞구나. 아무튼, 신나서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뭘 어떡해? 무조건 해야지.”
니콜 교수님의 지당하신 말씀이 이어졌다.
“실력이 밖으로 드러나면 유명세야 당연히 따라붙는 거지. 그게 무서워서 할 일을 못 한다?”
그녀는 날 똑바로 바라보며 물어왔다.
“킴은 그런 사람이었나?”
피식.
당연한 걸 뭘 그렇게 빙빙 돌려서 물으실까.
“저 교수님 제자에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빙긋이 웃으시는 교수님.
그때였다.
“키, 킴……. 정말 대, 대단한 거 같아요. 싱어로서도, 라이터로서도 원더풀한테, 피아노 협주라니. 뿐만 아니라 내일 공연에선 대중음악을 클래식으로 풀어낸다죠? 킴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캘리의 찬사가 몹시도 부담스럽다.
얼굴에 어린 표정은 더하고.
눈빛은?
끅! 안 그래도 예쁜 얼굴에 저런 눈빛이라니. 반칙이잖아? 무슨 사람이 보석을 얼굴에 박고 다니냐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다가 희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
아저씨였다.
“힘들 것 같으면 말해. 어떻게든 손써볼 테니까.”
그러지 좀 마세요.
손을 쓰긴 뭘 써요?
뭐, 뭐. 응? 경찰들이라도 불러다가 폴리스 라인이라도 치시려고요? 아니면 공연 취소? 하이고. 행여나. 그런 말씀하실 거면 제발 그 입꼬리 좀 추켜올리지 말고 하시던가.
나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막 뭐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도준인 할 수 있을 거야.”
희주의 담담한 말이 나직하게 땅에 깔리며 내게로 전해졌다.
근데, 희주야. 날 믿어주는 건 좋은데 여기서 그런 대사는 좀.
살짝 오그라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한쪽 입술이 슬며시 올라간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날 걱정스럽게……레이크헬만 빼고……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공연 한두 번 하나요?”
***
이틀 연속 찾은 카네기 홀.
대기실로 향하는 길은 진짜 순탄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어찌나 많던지.
와, 무슨 개떼들인 줄 알았네.
다시 떠올려봐도 징글징글하다.
나도 모르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였다.
어?
저만치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도미니크?
저 자식이 여긴 왜?
설마 우리 공연 보러 온 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바라보는 사이, 내 앞까지 바짝 다가온 도미니크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문다.
그러곤 그 표정만큼이나 재수 없는 말투로 얘기했다.
아니, 시답잖은 도발을 던졌다.
“살다 보니, 이런 우연도 다 있네? 우리 공연 시간이랑 너희 공연 시간이 겹치지 뭐야? 하하하하하하하.”
공연?
음, 저 자식도 여기서 공연을 하는 모양이네?
근데, 그게 웃긴가?
의아해져서 그를 쳐다보자, 도미니크가 웃음을 그치곤 또다시 입매를 비틀었다.
그와 함께 조롱조의 말을 해온다.
“우린 뉴욕 필하모니하고 협연하기로 했는데……. 너흰 네 명이서 한다지? 쯧, 관객이 너무 없다고 실망하진 마라. 그래도 어젠 대단했잖아? 뭐, 그것도 다 선배들 덕분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오늘은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 오케이? 황제 폐하.”
더럽게 이죽거리네.
생각 같아선 죽빵이라도 한 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속으로 다짐해본다.
뉴욕 필하모니?
잘났다, 그래.
근데, 오늘만 날이 아니거든?
내가 언제고 네 얼굴을 똥 씹은 표정으로 만들어주마.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어라……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여기서들 뭐하나요?”
뒤쪽에서 니콜 교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도미니크?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여긴 웬일이죠? 그쪽 대기실은 분명 반대쪽 아니던가요?”
“하하하. 킴도 공연이 있다고 해서 격려차 들렸습니다.”
도미니크가 둘러댔지만, 니콜 교수한텐 이빨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학교에서 뉴욕 필하모니와의 협주를 성사시키는데 얼마나 공을 들인지 몰라요? 남 걱정할 시간에 도미니크나 잘하세요.”
싸늘한 일갈에 도미니크는 흠칫하더니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곤 돌아서 막 걸음을 옮길 때였다.
“킴. 에단. 크리스티나. 조안나.”
니콜 교수의 호명에 대답했다.
“예!”
“예!”
“예!”
“예!
묘하게도 그 순간 마음속에 긴장감이 생겨났고, 딱 알맞을 정도로 적당히 조여주는 듯한 그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할 때였다.
니콜 교수가 물어왔다.
“준비됐나요?”
우리가 다시 한 번 대답하자, 니콜 교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그럼 가죠.”
잠시 후 연주홀 앞에 이른 우리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관객석은 이미 만석이었고, 표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무조건 들어가겠다고 우겨대는 사람들과 한쪽에 주욱 늘어선 채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던 것이다.
뭐야, 이거?
관객이 왜 이렇게 많아?
그때였다.
“어? 킴또춘이다!”
“어디 어디?”
“와아아아! 키이임!”
정장을 입은 남자들과 드레스를 걸친 여자들로 가득찬 연주홀.
날 보곤 술렁거리며 소란스러운 모습이었다.
헐! 여기가 어제 왔던 그 카네기 홀이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