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151. 신세계에서 (2)
나는 분명 알고 있다.
내 안, 깊은 곳에 내재된 분노의 힘을.
그것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파괴력을 말이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빛이 터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그 감정의 편린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고 곧이어 그것은 손끝으로 치달아 이내 건반을 무지막지한 박력으로 때려대고 있었다.
다만, 그 힘은 막무가내로 치닫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가 막히게도 이 와중에 리듬을 탄다.
섬광처럼 솟구치면서도 화음을 연주하고 있다.
극저음과 극고음을 오가면서도 풍부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중이란 얘기다.
그게 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걸지도 모르지.
피아니스트인 내가 이럴진대,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난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알게 뭐야…였다.
눈앞이 서서히 시커멓게 물들어가는 중이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분노를 ‘물리적인 폭력’이라는 형태 대신 ‘폭력적인 연주’로 풀어내 버린 덕분에 머릿속은 점차 환희로 물들어가고 있을 뿐.
소리?
난리도 아니다.
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 건지, 피아노에서 터지듯 뿜어진 소리들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힘겹게 따라오며 만들어내는 소리들을 상대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중이다.
그동안 이미 눈앞은 검게 물들어 버렸지만, 그래도 확연히 느껴진다.
아니 그래서 더 선명하게 보인달까.
아, 진짜로 보이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러네.
어쨌든, 내가 만들어낸, 아니 분노로 미쳐 날뛰는 감정에 이끌려 폭발적으로 탄생시킨 음들은 극으로 치달으며 모든 소리를 압도하고 있다.
망했군.
연주만 망한 게 아니라, 공연 자체가 엉망이 돼버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을 때였다.
어?
항거하는 모든 소리를 압살하려는 듯 난폭하게 날뛴 덕분에 다른 소리들이 기어이 굴복했다?
그 모습이 꼭 꼬리를 만 개 같아서 진짜 어이가 없을 지경.
더 웃긴 건, 내가 건반을 치면 칠수록 기고만장해진 듯 우쭐거리는 피아노 소리는 이제 다른 소리들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치 황제라도 된 듯이.
그 순간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젠장! 아직 공연도 안 끝났는데 이대로 쓰러지는 건가?
망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할 때였다.
눈앞의 공간이, 아니 시간이……. 아, 이걸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뭔가가 깨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내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순백의 공간이.
***
모든 피아니스트들은 감사해야 한다.
이 곡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
적어도 피아노를 치는 이들은 차이콥스키가 만들어낸 이 피아노 협주곡을 두고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럴 수밖에.
피아노 협주곡이 전달해줄 수 있는 쾌감. 오로지 피아니스트만을 초월적으로 돋보이게 만들어버리는 이 마법 같은 곡을 어느 피아니스트가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대신, 다른 연주자들은 죽어나가는 곡이 바로 이 곡이기도 하다.
그것도 초반부터.
강렬한 도입부에서부터 계속되는 화음 연타와 함께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기교가 유난히 많고, 협연자들에게 과도한 열정과 땀, 그리고 스태미너까지 요구하는 무지막지한 곡.
차이콥스키의 전기 작가인 제레미 시프먼이 ‘우람한 골격에 길이도 길고 의도적으로 연주하기 힘들며, 눈부신 기교와 수준 높은 극적인 요소, 거기에 순전히 오락적인 요소가 멋진 서정성 및 훌륭한 곡조와 결합된’ 곡이라고 평했을 만큼.
다시 말해 피아노 연주자에겐 더없이 훌륭한 곡이지만, 다른 협연자들에겐 더럽게 어려운 곡이란 얘기다.
그러면서도 화려하긴 엄청 화려해서 듣는 이들, 즉 관객들 입장에선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한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의 피아니스트는 뭔가 달랐다.
단순히 강렬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뭔가 가슴을 쑤시고 들어오는 음들. 그것을 말로 토해내면 그 자체로 화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대신 듣고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고 저절로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을 터다.
웅장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제껏 들어왔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한데…….
지금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는 화려함을 넘어서서 폭풍처럼 몰아치며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대중적인 감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자칫 천박하고 통속적일 수도 있었을 곡조가 듣는 이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사람을 격동시킨다.
분노에서 비롯되었으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듯한 감각의 통쾌함이 그걸 가능케 했다.
“코, 콜린. 이거……. 진짜 클래식 맞아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어찌할 줄 모르는 제롬의 질문에도 콜린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미친!”
대신 욕설을 내뱉은 것은 유진이었다.
“대체 그동안 뭔 짓을 한 거야!”
대상이 누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건 비단 레이크헬 멤버들만이 아니다.
봐라.
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을.
상기된 얼굴하며, 흔들리는 눈동자, 충격이라도 먹은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들. 저 모습이 콘서트장에서 보았던 관객들의 모습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 딱 하나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꺅꺅거리며 소리 지르지 않고 있다는 거?
대신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탄성이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것도 1악장이 끝나기까지 20분여분 동안 계속해서.
그리고 2악장과 3악장을 모두 합친 것보다 긴 시간 동안, 그보다 더 격렬하고 거대한, 그러면서도 압도적인 연주로 1악장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한 사람이 일어나고, 그 옆 사람이 또 일어나고…….
관객석 여기저기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모두가 기립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관객 모두가 일어나 박수쳤다.
그리고 그 박수 소리에는 1악장이 연주되는 동안 참고 또 참았던 흥분과 열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단지, 박수뿐인데도…….
연주홀은 터져나갈 듯했다.
***
단순히 감동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니콜 교수는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온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흥분한 채, 그녀는 광적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카네기 홀을 가득 메운 갈채.
아직 공연이 끝난 것도 아니기에 겨우 제1악장이 끝난 상황에서 이러는 건 분명 에티켓이 아니다.
그걸 알지만,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만 해도 정말이지 엄청난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건 그녀뿐만이 아닐 터였다.
이곳에 있는 관객들 모두 마찬가지.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낸 이 흥분과 환희, 그리고 열기에 니콜 교수는 감정이 북받쳐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들의, 자신의, 모두의 갈채를 받으면서…….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오로지 홀로 빛나고 있는, 무대 위의 피아니스트.
바로 자신의 제자다.
관객들 모두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호흡 중인 도준.
니콜 교수 역시 도준을 보면서 울컥하고 말았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도준의 재능을 믿었고, 그 가능성을 믿었으며, 도준이라는 인간 자체를 믿었다.
누구보다 괴물 같은, 아니 격이 다른,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초지일관 자신이 걸어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천재 중의 천재.
가진바 능력보다 더욱 가치 있는 성실함을 무기로 가진 아이.
그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울리다 못해, 결국 훔쳐가고 말았다.
도준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가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나는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게 아닌데…….
안타까운 심정에 입술을 잘끈 씹어보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라져버린 세계가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다.
갑자기 확 허무해진다.
아니, 허탈해진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는데…….
사방에서 날아든 갈채와 함께 모두 사라졌다.
손에 잡힐 듯하다가 흩어져버린 꿈처럼.
대체 뭐였을까?
그 순백의 공간은…….
마치 꿈이라도 꾸듯, 그러나 잠들지 않은 상태임을 자각한 상태로 보이는 세계.
아무것도 없는 듯하지만,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채워넣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었는데…….
그러면서도 어디 한군데 막힌 곳 없이 사방이 탁 트인, 말 그대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드넓은 공간. 아니 시간인가?
그래, 그냥 시공간이라고 하자.
아무튼, 그야말로 신세계다.
그 세계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젠장!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미치겠다.
뭔가 단초를 잡은 듯한데.
하필이면 그 순간이 공연 중일 건 또 뭔지.
아니, 그래서 가능했던 걸까?
아, 모르겠다.
아쉽지만,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속 시끄럽게 고민하고 싶지 않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고 주접떨고 싶은 기분은 아니니까.
아직 공연이 끝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또 모르잖아?
연주를 이어가면 또다시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지.
어쩌면 그 감각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일.
한동안 이어지던 박수소리가 잦아들고,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는 걸 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나는 흐트러진 마음을 가라앉히곤 가만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허먼 교수에게 한차례 시선을 던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허먼 교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지휘봉을 치켜들었다.
그 지휘봉이 허공에 선을 긋는 순간,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b 플랫 단조 Op.
2악장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소망했다.
다시 한 번, 그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기를.
***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원적인 풍경과 뱃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제2악장이 관객들을 희롱하듯 연주되고, 곧바로 투박하면서도 러시아 그러니까 슬라브 민족 특유의 활달한 곡조가 풍부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3악장으로 이어졌다.
이후로 피아노의 독주, 다시 말해 카덴차. 그때까지 함께 연주하던 협연자들의 배려 속에 홀로 기교를 뽐내며 화려한 피아노 연주를 이어나가다가 다시 한 번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것은 어느 신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 웅장하면서도 신비롭기 그지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질주하며 곡을 마무리한다.
흡사 오페라의 대단원처럼 곡이 끝난 것이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20분이나 될까 말까 한 시간.
그동안, 안타깝게도 내가 원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눈앞이 캄캄해지지도 않았지만.
물론 소리들이 눈에 보이듯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쩐지 김빠진 맥주, 아니 콜라를 마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오케스트라 공연은 끝났다.
그리고…….
기사 떴다.
단 한 줄의 제목. 그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 피아노의 여제 마가렛 헤라시오네, 금일 오후 카네기 홀에서 열린 줄리아드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 관람 후 ‘피아노 황제’의 등극을 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