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49화 (149/260)

# 149

#149. 아는 만큼 힘들다(3)

“누나, 그게 무슨 얘기에요?”

전화를 끊고 있는 마루 누나를 보면서 물었다.

“어? 들었어? 별거 아냐.”

별거 아니다…. 라.

흠, 그런 거 같지 않은데?

무슨 프로젝트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아무 일도 아닐 리가 없잖아?

호기심이 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다.

“무슨 일인데요?”

누나는 계속해서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라니까.”

하지만, 몇 번이고 묻자 누나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가 털어놨다.

“이번에 너 크리스마스 공연 있잖아?”

“피아노 협주요?”

“아니, 그거 말고.”

그럼, 에단 3인방과 함께 하기로 한 공연?

“그게 왜요?”

“회사에서 그거 현장 녹음 떠서 음원으로 발표하면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거든.”

응? 그게 음반이 되나?

실제로 작곡한 건 한 곡도 없고, 대부분이 커버곡인데다가 어떻게 보면 실험적인 요소도 상당히 강하다.

편곡된 노래들을 위주로 짜인 한편의 뮤지컬 같은, 말하자면 공연에나 어울리는 건데 그걸 음원으로 만들어 출시한다는 건가?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누나가 손을 내젓는다.

“정식 앨범으로 내려던 건 아니고.”

“앨범이요?”

“에이, 앨범까진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번에 너한테 이런 일 생기지 않았어도 그럴 생각까진 없었어. 생각해봐라. 진짜 제대로 음반 준비한다고. 그럼 너 또 무리할 거잖아. 요즘 안 그래도 이래저래 할 것도 많은데.”

“그렇긴 하죠.”

사실이긴 하다.

그나마 레이크헬이 부탁했던 OST 작업이 끝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진짜 일에 치여 살뻔했다.

어쩌다 보니 공연 두 개를 준비하고 있어서, 하루하루가 전쟁 같달까.

게다가 수업도 받아야지, 저녁에는 찰리스에서 알바도 해야지.

거기에 음반까지?

내가 생각도 무리다.

회사에서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이런 말들이 나왔다는 건…….

“너 곡 낸 지 좀 됐잖아.”

“그렇죠.”

“근데, 기다리는 팬들이 많잖아.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동남아……. 여기 미국에도 네 팬들 꽤 있을 걸? 그래서 이번에 공연하는 걸 음원으로 만들어서 올리면 좋아들 할 거 같아서 말이야. 일테면 콘서트 실황 녹음? 그런 거지.”

“후우.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어요? 그러려면 카네기 홀 쪽하고도 협의해야 하고, 교수님과도 얘기해야 하는데.”

“어머, 이 뉴욕 지사장님을 못 믿는 거니? 나 이래 봬도 MIT 나온 여자야.”

“어! 진짜?”

내가 여태껏 마루 누나한테서 들은 얘기 중에 가장 놀라운 얘기였다.

내가 딱히 학벌을 따지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설마하니 마루 누나가 유학파였다니. 그것도 MIT……. 응? MIT?

예일대도 아니고, 버클리도 아닌 MIT?

거기에 음대가 있던가?

아니지. 누난 작곡 쪽이 아니라 작사 쪽이니까…….

“호호호. 표정 좀 봐. 그게 그렇게 놀라워?”

조금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가 싱긋 웃는다.

“내가 이래 봬도 한때 공대 여신이었잖니.”

헐, 상상 1도 안 간다.

여신이라니…….

저렇게 헐렁헐렁하고 촐랑촐랑한 여신이 어디 있냐고.

뭐,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좀 되는데다가 옷은 잘 입는 편에 속하긴……. 내가 잘못했네. 잘못했어.

만날 봐서 그렇지. 우리 누나, 어디 가서 꿀리는 여자가 아니었구나.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루 누나를 보고 있는데, 누나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잘난 척한다.

“MIT 다닐 때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았다고.”

“왜요? 작사해달라고요?”

“작사는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 우연찮게……. 우이씨! 그런 거 아니거든!”

킥킥거리며 다시 물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얘기를 되돌린 심산으로.

“근데, 괜히 어설프게 만들었다가 욕만 먹는 거 아니에요?”

“어머나, 우리 도준이. 그새 많이 철들었네?”

스윽스윽하고 간만에 내 머리를 쓰다듬는 누나였다.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잖아? 네가 하는 연주가, 노래가, 공연이……. 어설퍼? 아유, 얘. 그거 지금 웃자고 하는 얘기지?”

“…….”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다.

“아무튼, 이번 프로젝트 컨셉이 ‘놀자’…였거든.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절대로 부담 가지면 안 된다? 우리도 이거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건 아니니까.”

다른 건 귀에 안 들어온다.

컨셉이 뭐라고?

“놀자…요?”

“그래. 저번에 니콜 교수님한테 들으니까, 애초에 니들 소모임 차원에서 시작한 거라며? 근데 그게 갈수록 제법 괜찮아져서 니콜 교수님이 팔을 걷어붙인 거라던데?”

“그렇게 됐죠.”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

재미 삼아 만든 모임인데, 이게 공연까지 이어질 줄 그땐 상상이나 했겠냐고.

지금 누나는 그걸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너흰 처음 생각했던 대로 놀 듯이 공연하면 되고, 우린 그걸 실황 중계한다는 느낌으로 녹음해서 음원 발표한다는 계획이었지. 그걸로나마 팬들의 갈증이 풀리길 바라면서.”

“흠, 괜찮게 들리긴 하네요.”

꽤 재밌게 느껴진다.

나뿐 아니라 에단 3인방에게도 동기부여가 될 거 같고, 한편으로는 팬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그전에 당사자들인 에단과 크리스티나 그리고 조안나에게 먼저 물어봐야 하겠지만.

사실, 이번 공연은 누군가에겐 다시 안 올 기회이기도 한데…….

생각지도 않았는데, 니콜 교수님이 나서서 판을 깔아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회사에서 음원으로까지 만들어준다면, 그걸 안 하겠다고 하는 게 병신인 거지.

게다가 원래 하던 대로 공연만 하면 된다고 하고.

어차피 공연 자체를 우습게 여기던 것도 아니니, 부담 가질 일도 아니다.

“누나.”

“응?”

“그거 말이에요. 프로젝트.”

“아유, 진짜 괜히 말했네. 신경 쓰지 마라니까.”

걱정스러운 눈빛을 해 보이는 마루 누나에게 웃어 보이곤 말했다.

“일단요. 애들하고 한번 상의해볼게요. 누나 말처럼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잖아요.”

물론 이건 내 생각.

에단 등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또 모르는 일이지.

엄청 부담 느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이 건은 그렇다 치고.

것보다 문제는…….

그 전날 있을 공연, 즉 협주 쪽인데.

지금 같아선 걱정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다.

첫날 함께 협주를 한 이후 다들 나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이 반, 내가 병원에 실려갔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걱정하는 이들이 반이었다.

오늘은 어찌어찌 넘어갔다손 치더라도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다 진짜 니콜 교수님 말처럼 무대에 서보지도 못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더 심각한 건,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날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합주라는 게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해서 손발이 맞는 게 아니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일찌감치 현재의 내 상황을 인정하고 물러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될 정도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게 다 표정으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마루 누나가 걱정스럽게 날 부르고 있었다.

“도준아.”

상념에서 깨어나 대답했다.

그러면서 바라보니,

“예?”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누나가 날 지긋이 바라본다.

꼭 엄마처럼.

“쉬란다고 쉴 네가 아니란 건 알아.”

“…….”

“근데, 때로는 좀 더 세상을 넓게 봤으면 좋겠어. 흔하게 하는 말 있잖아? 나무를 보는 것과 숲을 보는 것. 이제 네 나이 열여덟 살이잖아? 진짜 인생은 아직 시작도 안 됐다는 거지. 그러니까 조금은 느긋하게 생각하는 게 어떨까?”

내가 걱정되긴 하나보다.

여기서 징징거리며 어리광이라도 부렸다간 누난 진짜 우리 엄마 자리를 밀어내고, 내 뒷바라지에 올인할 기세다.

뿐만 아니라 방금 얘기한 프로젝트 얘기도 없던 일이 되고 말겠지.

공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마 당장에 회사에 연락하고, 집에 전화해서 날 자택 감금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누나가 덧붙였다.

“네 나이 땐 가만있는 게 오히려 더 어렵겠지만……. 후우, 그래.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니까. 넌 할 수 있을 거야.”

으음, 마음먹기 나름이라…….

죽도록 매달리는 것도, 설렁설렁 쉬어가는 것도. 전부 나한테 달렸……. 응? 이거 뭐지? 뭔가 머릿속에서 번쩍했는데?

***

누나가 차려준 밥을 먹는 동안, 누나는 밀린 빨래들을 돌리고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반면 나는?

당연히 밥 먹는 중이다.

한데, 이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마루 누나가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아서.

마음먹기 나름.

따지고 보면 이것만큼 무책임한 말도 없을 거다.

세상에 마음먹어서 안 될 일이 없으면, 사람들이 실패는 왜 하겠냐고.

무슨 일이든 성공하기까진 많은 요소가 필요한 법.

재정적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적 자원도 충분히 뒷받침돼야 한다. 거기에 흔히들 운이라도 말하는 천기 즉 타이밍도 중요하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시대를 앞서 간 곡이었다느니, 그래서 당시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다느니 하는 식의 말들.

그리고 대세라는 것도 필요하다.

아무튼, 이런저런 걸 생각하면 그저 마음 굳게 먹었다고 해서 뭐든 잘 될 거라고 믿는 건 정말이지 치기 어린 생각이란 거다.

그렇긴 한데…….

노인이 남겨놓고 간 숙제들과 연관지어 생각하니,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릇을 비우는 것과 그릇을 키우는 것의 차이.

그게 사실상 같은 거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아니 분명 다른데, 다르지 않은 느낌?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릇을 비우는 것과 동시에, 그 자체가 그릇을 키우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노래방에서 그릇이 커졌다…라고 노인이 말했던 것도, 그 안에서 온갖 감정들이 내 속에서 부딪히며 사고의 폭을 넓히고 감정의 깊이를 더해왔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아, 머리야.

점점 느려지는 젓가락 속도만큼이나 머릿속에선 생각들이 많아져서 이젠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다.

결국, 고개를 내젓곤 일단 미뤄두기로 했다.

이러다간 두통으로 먼저 앓아누울 것만 같아서.

***

다행인 점은 지난 이틀간 협주 연습은 없었다는 거였다.

왜냐고?

그야 주말이었으니까.

덕분에 잘 쉬긴 했다만, 오늘은 또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 먼저 앞섰다.

새롭게 시작된 한 주임에도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느낌.

오전 수업을 마치고 연주 홀로 향하는 동안 생각이 점점 더 깊어져 간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연주홀에 도착해 있었다.

“오! 왔나?”

오늘따라 일찍 와 계셨던 허먼 교수님께서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나 역시 겉으로나마 웃으며 인사를 하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곤 건반을 치기 전 중얼거렸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쯧, 될 대로 돼라지.”

반쯤은 포기한 상태.

정확히는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랄까.

그래서 그런가.

어째 마음이 좀 가벼운데?

그렇게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

이건 또 무슨 경우야?

희한하게도 연주를 시작하고 십 분이나 지났음에도 눈앞이 어두워지지 않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의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연주를 멈추거나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언제 또 눈앞이 어두워질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두 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

매일매일 조마조마하며 불안한 나날들이 이어졌고 가끔 한 번씩 그럴 조짐이 보일 때가 있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단 한 번도 그때처럼 쓰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덕분에 무사히 연습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그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에단과는 매일같이 투닥거렸고, 가끔 나타난 도미니크가 같잖은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으며, 실비아가 찍어댄 사진이 날마다 SNS에 올라가면서 팬들 사이에서 사진첩 만드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언론에선 어떻게들 알았는지, 한국에선 내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며 기사가 나고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니콜 교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애써 웃느라 입 주위 근육이 마비될 정도였다.

무엇보다 황당했던 건 다름 아닌 아즈마엘. 처음에는 무관심한듯한 태도로 일관하더니, 점점 표정이 달라지며 어느 날부턴가 내게 다가와 악기 어디 거 쓰냐는 둥, 누구한테 연주를 배운 거냐는 둥 마치 설문조사라도 하듯 묻는 그였다.

그러던 중 폭탄이 터졌더랬다.

내가 그날 밤 쓰러졌던 사실을 부모님께서 아시게 된 것.

난리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에……. 외할아버지까지 당장 미국으로 날아오겠다는 걸 말리느라 식은땀을 흘려야 했고, 그때 큰 도움을 준 건 뜻밖에도 마루 누나였다.

“호호호. 저 믿으시죠? 제가 하루 종일 옆에 딱 붙어 있을 테니, 아무 염려 마세요.”

언제 또 우리 가족들한테, 저 정도까지 신뢰를 쌓아놓은 것인지. 아무튼, 한시름 놨다고나 할까.

그렇게 복작복작,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 날이 되었다.

“자,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될 텐데, 긴장들 풀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됩니다.”

단원들과 함께 대기실에 모여 있을 때, 허먼 교수가 마지막으로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그제야 실감이 됐다.

진짜 공연이구나.

참네. 몇백만 명 앞에서도 콘서트를 해본 나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그나저나 신기하긴 신기하다.

대체 이유가 뭘까?

왜 지난 두 달간 별문제 없이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거지?

설마 노인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뭔가 내 안에서 변화가 있었다는 건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그때였다.

“자, 이제 나가죠.”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을 따라나갔다.

그리고 무대 위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은 후, 관객석을 바라보는데…….

니콜 교수와 에단을 비롯해 줄리아드 학생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다가 말고 눈을 치떴다.

어라?

저건…….

콜린?

평소와 달리 양복을 쫘악 빼입은 콜린과 함께 레이크헬 멤버들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제롬 옆에 앉아 있는 백인 여자의 얼굴이 낯익은데?

캘리 제니퍼?

아니 저 여자가 왜 여길?

순간 등골이 짜르르 울리는 느낌에 흠칫했다.

본능적으로 돌아간 시선. 그 시선에 네 명의 여자들이 잡혔다.

마루 누나, 샤오린, 실비아 그리고…….

희주가 보였다.

멍해 있을 때, 허먼 교수가 뒤늦게 등장했고 관객석에서 갈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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