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48화 (148/260)

# 148

#148. 아는 만큼 힘들다(2)

흠칫.

아니 왜 얘기가 또 그리로 가는 거야?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곤 뒤로 한 발짝 물러난 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런 식의 행동은 철저히 동양적인 인사라 니콜 교수로선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니콜 교수의 입장인 거고.

분명 이번 일로 그녀에게 크나큰 심려를 끼친 것은 틀림없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가타부타 덧붙이진 않았다.

장황한 말보단 진심이 담긴 음성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기에.

그게 통했던 걸까?

그녀는 굳은 표정을 풀면서 얘기했다.

“예. 당신은 저한테 사과해야 해요. 밤새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알면……. 아직까지 심장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기적과 같은 일이에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니콜 교수의 눈빛이 변했다.

허리를 세웠을 땐 이미 이제까지의 정중함은 사라진 뒤였고, 그녀의 입에선 어딘지 모르게 단호한 느낌이 나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킴. 기회는 이번만 있는 게 아니야. 난 소중한 제자를 잃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을 안다면, 킴은 좀 더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할 거야.”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공연에 빠지진 않게 되었다.

니콜 교수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내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땐 군말 없이 교수님 얘길 듣겠다는 약조를 하고야 오케스트라에 남게 되었다.

다음날 소문을 들었는지 에단을 비롯해 크리스티나와 조안나까지 몰려왔지만,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하자 다들 미심쩍어하면서도 물러섰다.

물론 소모임은 계속해서 이어가기로 했다.

이쪽도 공연 계획이 잡혀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수업 끝나고 나서 따로 보기로 하곤 헤어졌다.

그 뒤 연주홀에 도착하자, 난리 법석이다.

“킴! 어제 병원에 실려갔었다며?”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많이 아파? 혹시 무슨 병이라도…….”

“에이, 과로겠지! 쯧, 너무 긴장한 거 아냐?”

“그래. 너도 콩쿠르 지겹도록 나가봤을 거 아냐? 그거랑 비슷할 거라 생각하면 돼. 좀 규모가 클 뿐이지.”

“지금도 아픈 거야?”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말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 어떻게들 안 거래?

진짜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그건 그런데.

그 발 없는 말을 누가 퍼뜨렸……. 하아, 너였냐?

저쪽 한구석에서 애써 시선을 돌린 채 내 눈을 피하고 있는 에단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저 자식은 가만 보면 진짜 입 가볍더라.

고개를 내젓다가 저만치에 서 있는 아즈마엘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반쯤 뜬 눈으로 날 한차례 바라보곤 그냥 시선을 돌려버렸다.

마치 관심 없다는 듯이.

거참. 적의가 느껴지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살갑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 같지도 않고.

아무튼, 묘하단 말이야.

아즈마엘이 날 대하는 태도가.

속으로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허먼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니콜 교수도 함께였다.

원래는 오늘 그녀는 나오지 않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마 나 때문에 일부러 온 모양이다.

“다들 모였으면, 연습 시작합시다.”

한차례 손뼉을 쳐서 시선을 모은 뒤, 허먼 교수는 날 한차례 바라보았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그대로 무대 위로 올라가 지휘봉을 잡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연주가 시작되었다.

***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어제 일어난 일이 다시 또 안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었고, 노인의 말대로라면 이미 내가 가진 그 ‘그릇’이라는 게 한계치에 도달한 듯하니까.

하지만, 마음을 아무리 굳게 먹었다고 해도 막상 닥치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인 법이다.

미친!

또 눈앞이 캄캄해지려고 한다.

손은 멈추지 않은 채 건반을 두드리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대로라면 연주는 물 건너간다.

당연히 공연엔 나서지 못할 테고.

사실 그게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이후가 더 걱정이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호흡을 고르기도 했고, 악보대로 쳐댈 때면 나도 모르게 격해지는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점차 눈앞이 맑아져 간다.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히 위기는 넘긴 듯……. 큭!

어디선가 날아든 트럼펫 소리가 머리통을 울리는 순간, 간신히 가라앉혔던 감정이 반발하듯 일어났다.

그러곤 그때부터 폭주하기 시작했다.

젠장!

겨우 위기를 넘겼더니만.

어쩐다?

이대로라면 또 어제 꼴이 나고 말 텐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안간힘을 다해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천천히 가라앉는 감정들.

한데, 그러면 그럴수록 차이콥스키가 이 곡을 작곡하면서 느꼈을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그 절망감과 분노.

스승은커녕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지친 삶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려 했던 한 작곡가의 서글픈,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감정이 응어리진 채 곡 속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 감정들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너무 뻔해서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 때문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음이 불안해졌다.

다행히 음 이탈은 없었지만, 분명히 흔들리고 있다.

그게 온몸으로 느껴지자, 이번엔 분노가 머리를 치켜든다.

내가 왜 이래야 하냐고!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노래방에 갇혔던 건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가수가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산 넘어 산도 아니고.

갈수록 험난해지는 길을 대체 어쩌란 거지?

마음껏 치지도 못하는 이 감정을 어쩌란 거냐고!

꾹꾹 눌러담은 울분을 피아노 건반으로 옮기는 사이,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끝나고, 3악장이 끝났다.

***

허먼 교수는 또 한차례 놀라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도준 때문이었다.

어제는 폭풍 같은 연주를 보여주더니만.

오늘은 어제와 또 다르다.

뭐랄까.

폭풍이 일기 전 잔잔해 보이지만, 바닷속에서 와류가 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마치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이라도 안고 있는 듯한 음들. 그 음들이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단원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것은…….

‘터뜨리지 못하고, 오갈 데 없는 감정!’

다들 그걸 느끼고 있는 거다.

그 분노라는, 터지면 감당하지 못할 그 감정을.

그야말로 건반을 통해 울려 퍼지는 음속에 꾹꾹 눌러담은 감정들로 말미암아 단원들 역시 연주를 함에 있어서 절제에 절제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곡이 어제와는, 아니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되었다.

한데, 희한한 건 이 곡이 원래 이랬던 것처럼, 혹은 차이콥스키가 원래는 이럴 의도로 작곡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다는 거였다.

‘……정말 보면 볼수록 놀랍구나!’

허먼 교수는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니콜 교수는 안타까웠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랬다.

도준의 마음이 이상하게 그녀의 마음을 울리며 안쓰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을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밤사이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만두게 해야 했나?’

후회했지만, 한편으로는 후회하지 않았다.

왜?

지금 도준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 들려주는 연주는 이제 막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피아노를 친 사람이 할 수 있는 연주가 아니었으니까.

연주란 게 그렇다.

처음엔 기술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악기 자체가 연주를 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교를 익히고 나면 그다음은 감정을 싣는 데 집중하게 된다.

악기가 존재하는 또 다른 의미는 연주자의 감정을 싣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끝이냐?

아니다.

그다음엔 절제가 필요하다.

계속해서 감정에만 휩쓸리는 연주는 금세 듣는 이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니까.

그렇기 때문에 악장이라는 게 존재하고 템포라는 게 존재하는 거다.

한데, 지금 도준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그 모든 과정을 불과 며칠 만에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문제는 그 놀라움의 밑바닥에 까닭 모를 안타까움이 깔려있다는 거였지만.

***

지쳤다.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모임도 간신히 한 시간이나 채웠을까.

보다 못한 조안나가 억지로 마이크를 잡아가던 내 손목을 낚아채곤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했을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

“찰리, 미안한데 오늘은 좀 쉴게요.”

어젯밤 일이 있어서인지 찰리는 알겠다고만 말하고 더 이상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통화 마지막에 그저 푹 쉬라는 말만 했을 뿐.

집으로 돌아온 뒤, 목욕은커녕 샤워조차 하지 않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어머니께 전화 드려야 하는데.”

그리고 중얼거리며 잠들었더랬다.

딩동!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몰라도, 집안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딩동!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울리는 초인종.

누가 올 사람이 있었나?

혹시 니콜 교수?

아니면 에단이나 크리스티나가 온 건가.

마음속으로 짚이는 사람들을 꼽으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놀랐다.

뜻밖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도준아아아아아아!”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마루 누나를 보면서 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퉁퉁 붓다 못해서 무슨 금붕어가 형님, 아니 누님할 판이다.

그뿐만 아니라…….

누나는 거의 날 듯이 뛰어서 날 격하게 껴안고는,

“흐끅! 미안해! 누나가……. 우리 도준일 혼자 놔두고서 돌아가는 게 아니었는데……. 흑흑…….”

정말 서럽게도 운다.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로.

처음엔 웬 오번가 싶었는데, 날 꼭 끌어안은 채 몸까지 떨어대며 울고 있는 누나를 보자니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졌다.

“에이, 괜찮아요. 봐요. 그냥 좀 무리를 했더니 몸살이 왔던가 봐요.”

“흑……. 지, 진짜 괜찮은 거지?”

일부러 활짝 웃어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목 졸라 죽을 거 같아서.

“진짜, 진짜, 진짜지?”

“예……. 그러니까, 이 손 좀.”

참기엔 좀 숨이 가빠서 누나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그제야 날 놔주는 마루 누나다.

참네.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웃기는.

그것도 마스카라가 온통 번져서…….

헉! 설마 저런 채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아니, 왠지 그랬을 거 같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저 진짜 괜찮으니까.”

서른 살도 넘은 여자가 저러고 있는 게 추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걸 보면…….

이젠 진짜 식구가 됐다는 걸까?

그저 날 진정으로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맙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 앞으로 난 여기서 머물 거야.”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살짝 맛이 간 상태로 누나가 폭탄을 던졌다.

“예? 그럼 일은 어쩌고요?”

“응. 여기에 지사를 설립하기로 했거든.”

지사?

갑작스러운 얘기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을 때, 누나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예. 대표님. 지금 막 도착했어요. 아유, 말도 마세요. 애가 얼마나 말랐는지……. 걱정 마세요. 제가 잘 걷어 먹일게요. 그럼요. 아, 근데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어요. 아뇨, 보기엔 그 정도는 아닌데……. 도준이가 한다고 해도 제가 말리려고요. 예. 그래야 할 것 같…….”

이어지는 얘기들.

들어보니 딱 느낌이 온다.

아저씨랑 통화하는 게 분명하다.

그나저나 대체 누가 알린 거야?

그때 머릿속으로 떠오른 사람은 바로 빨강머리. 아, 젠장!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네.

거의 스토커에 버금가는 그녀인데, 실비아가 어젯밤 일을 모를 리가 없잖아?

요즘 들어 부쩍 에단 3인방과 친하게 지내는듯하더니만.

게다가 알고 보면, 그녀는 마루 누나와 샤오린이 뉴욕에 심어놓은 스파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한순간 깜빡했던 그녀로 인해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하니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어난 일인데.

한데, 지사라니…….

그게 왜 필요한 거지?

의아해할 때였다.

아저씨와 통화하는 게 분명한 누나의 통화소리가 귓구멍에 와서 꽂혀 들었다.

“예, 예. 그러니까 이번 프로젝트는 없었던 거로 하죠.”

응? 무슨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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