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147화 (147/260)

# 147

#147. 아는 만큼 힘들다(1)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기가 막혔다.

아, 정말 뭣 같네.

어떻게 된 게,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더라.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내 안색은 하얗게 질리지 않았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노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게 문제지. 그 탓에 차고도 모자라 넘치는 지경에 이르렀음이니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도 버티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느냐?”

알겠다.

무슨 말인지는…….

알긴 알겠는데, 그렇다고 흥미롭다거나 재밌게 느껴질 리 없다.

이게 내 얘기라는 게 문제다.

남의 얘기라면 어쩌면 호기심이 동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저 고개나 한번 끄덕이고 말았겠지만…….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고 말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누가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겠냐고.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만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믿는 구석도 있었고.

나는 떨리는 음성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살 방도가 아주 없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노인이 놀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다.

그런 채로 날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저 입에서 ‘호오!’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데, 들려온 목소리는 제법 차분했다.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느낌도 들었고.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영감님 말씀대로면 이미 난 살아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여기 왜 오셨겠어요? 뭔가 방법이 있으니까, 그걸 일러주러 온 거겠죠.”

“쯧. 어찌 그런 머리는 잘도 굴러가는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듣거라.”

“…….”

“네가 사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다시 비우는 방법. 또 다른 하나는 그릇 자체를 키우는 방법. 그것 외에는 길이 없다.”

뭘 비우라는 건지 도통 감이 안 온다.

그릇을 어떻게 키우라는 건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니 그릇이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설마 몸 자체를 그릇이라 할 리는 없을 테고.

게다가 그 그릇에 가득 찼다는 건 뭘까?

지식?

감정?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채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물었다.

꼭 과외 선생님한테 질문하듯이.

“어느 쪽이 더 쉬운데요?”

“말할 게 있더냐? 비우는 쪽이 더 쉽지.”

눈빛으로 그 이유를 말해달라고 쳐다보자, 노인은 알아들은 듯 곧바로 얘기해주었다.

“노래방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해봐라. 그렇게 키운 그릇이 그 정도다. 하면 앞으로 네가 담아낼 것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그 정도로 그릇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몸이 떨린다.

노인이 지금 한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알겠어서.

단지 노래방에서 보냈던 시간만 얘기하는 게 아닐 거다.

그 시간 동안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온 것들.

그것은 지식만이 아니었으니까.

그 안에서 숱한 날을 보내는 동안 곱씹은 고독과 좌절, 절망……. 그리고 희망까지. 감정의 편린들이 내 안에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동안 노인이 그릇이라 표현한 그 무언가가 넓어졌다는 건데.

잠시……. 아니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없이 생각하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래, 결정했느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보며 물어오는 노인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

시험을 많이 치러봐서 아는데 선택지가 적으면 적을수록 쉬울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예 공부를 안 했으면 모르는데, 조금이라도 했으면 어차피 대개 선택지는 두 개로 좁혀지기 마련이다.

애당초 오지선다건 사지선다건 정확한 답을 모르는 한은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처럼 처음부터 아예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는 게 나았다.

적어도 페이크는 없잖아?

게다가 내가 보기엔 뭘 택해도 죽을 똥을 쌀 거 같은 느낌이 팍팍 들고.

그렇다곤 해도 둘 중 뭐가 더 쉬워하고 물으면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터다.

대신 그렇게 되면…….

피식.

두 가지 선택지가 공평한 건 아니었지만, 이미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뒤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걸까?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한가지만은 명심하거라.”

“…….”

“세상엔 깨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릇’도 분명 존재한다는 걸.”

헐!

이 무슨 마음 푹 놓고 있는데 살금살금 다가와 뒷빡 때리는 소리인지.

여태 그릇이 깨지면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더니만, 이젠 깨지면 안 된단다.

지금도 내 속마음을 읽고 있겠지?

이걸 말로 할 수는 없고.

저기요, 딱 한 대만 때리면 안 될까요?

어? 웃는다.

아놔. 진짜로 마음을 읽나 보네.

“무슨 얘긴지 솔직히 모르겠네요. 근데요. 이쯤에서 우리 계산해야 할 게 좀 있지 않나요?”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못 알아들을 리가 없지.

이미 내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역시 예상대로다.

“이미 줄 거 다 줬는데, 무슨 계산이 남았을꼬?”

그럴 줄 알았다.

딱 보니 그런 눈치더니만.

에누리없이 선을 긋겠다?

근데요, 이거 아시나 모르겠네요.

제가 이미 선을 넘었어요.

방금.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느낌?

아니 아직도 죽음의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지만, 피할 수 없는 대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시점이란 말입니다.

그런 마당에 못할 말이 뭐가 있겠냐고요.

“할아버지. 아, 이렇게 불러도 되죠?”

“헛참. 그러려무나.”

“노래방에 절 가둔 게 결과적으로 저한테 도움이 됐으니까, 할아버지 입장에선 크게 선심이라도 쓴 것처럼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요. 제 입장에선 진짜 황당하거든요? 솔직히 제가 거기서 몇 번이나 죽을 마음을 먹었는지 아세요? 자, 봐요. 제가 손목 그은 것만……. 아이, 씨! 흉터가 없잖아! 아무튼, 할아버진 어떤지 몰라도 진짜 죽을 맛이었다고요.”

“그래서 이렇게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지 않느냐?”

“헐! 그걸로 퉁치는 건 좀 아니죠. 아니 개를 한 마리 주워와도 끝까지 책임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에요? 그런데 뭘 그런 걸로 다 생색낸담? 그리고요. 저한테 물어봤어요? 노래방에 들어갈 때는 그렇다 치고, 그 후에 한 번이라도 제 의견을 들으려는 마음이 있었냐고요.”

“그야…….”

“그거 솔직히 납치 아닌가? 게다가 감금! 여기까지만 해도 명백히 범죈데, 그 망할 점수 시스템은 뭐냐고요? 완전 사기잖아. 몇 년이나 뺑이를 쳐야 1점 오를까 말까. 대충 느낌으론 한 천 년쯤 지낸 거 같은데, 그걸 돈으로 환산해봐. 와! 생각 보니까 어마무시하네, 진짜!”

장난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지하게 따지고 든 건 아니다.

그런다고 안 들어줄 걸 들어줄 거 같지도 않고.

아까도 말했듯이 앞으로가 더 중요하니까.

노인은 내 속마음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묻는 걸 보면.

“그래서 뭘 원하는 거냐?”

재밌다는 표정이다.

그래, 재미있겠지.

크크큭.

근데, 내 얘기를 듣고 나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씨익.

미소 한줄기를 상큼하게 날려주며 대답했다.

“노래방.”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런 채로 노인이 날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길 한참.

그러다가 되물었다.

믿기 어렵다는 듯.

“너 지금 그 말은? 설마 거길 다시 들어가겠다는 말이냐?”

“미쳤어요?”

“하면?”

머릿속에 몇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콜린이라든지, 에단이라든지, 혹은 준영이 형이라든지.

“있어요. 그런 게.”

그러자 노인이 황당해한다.

그런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주세요, 노래방.”

“거참!”

“아, 솔직히 그렇잖아요. 그 정도쯤 있었으면 이미 제거나 다름없잖아요? 민법상으로 봐도 20년이면 점유권 인정되는데, 그냥 저 주시죠?”

딱 봐도 노인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미친놈…하고.

안다.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강짜지.

점유권 취득시효 같은 되지도 않는 말을 갖다 붙이며 박박 우기고 있다는 걸 왜 모를까.

근데, 원래 거래라는 게 그렇다…고 우리 외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지.

열 개중에 다섯 개 내줄 거 세 개 주고, 일곱 개 얻는 게 거래라고. 그러려면 처음부터 열 개라고 하지 말고 스무 개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씀도.

지금 내가 하는 짓이 그런 거였다.

근데, 먹힐까?

“맹랑한 놈인지고.”

혀를 한차례 차더니, 노인이 말했다.

“네놈 말처럼 노래방을 준다고 치고.”

오, 뭔가 먹히는 분위긴데?

“그런데요?”

“코인 없인 무용지물일 텐데?”

“저, 네 개 남았는데요?”

“그걸 누구 코에 붙이려고?”

“아유, 거기까진 할아버지께서 걱정해주실 필요 없고요. 어쩌실 거에요? 어쨌든 저도 나름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봤는데, 그래도 배……보상은 해주셔야 하잖아요?”

배상이라고 하려다가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보곤 보상으로 얼른 바꾸었다.

그러곤 티 안 나게 노인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딱 한 번.”

“예?”

“네놈이 원할 때 한 차례 사용할 수 있게 해주마. 그럼 됐느냐?”

당장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르고 싶은 걸 참으며 고심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그냥 찔러봤는데, 대박 났다.

“근데, 설마 이번에도 100점 나와야 나올 수 있는 건 아니겠죠?”

“흐흐흐. 그야 알 수 없지.”

뭐, 그래도 상관없지.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저, 근데 그거 저한테 소유권한이 있으니까, 양도도 가능한 거겠죠?”

노인의 얼굴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키임!!!”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놀라서 돌아보았다.

니콜 교수님?

“아! 여긴 어떻게!”

“하아! 다행……. 킴! 대체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는지 거에요? 그리고 그건 뭐죠? 캔커피? 방금까지 의식불명이던 사람이 몰래 빠져나와서…….”

기가 막힌다는 듯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교수님.

근데 혼자라니…….

무슨 소린가 싶어서 돌아보곤 멈칫하고 말았다.

어느 틈에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방금까지 노인이 앉아 있던 벤치 위에는 빈 커피 캔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

단 하루 사이에 내게 일어난 일들을 누군가에게 얘기한다면 분명 말할 테지.

미쳤다고.

하지만, 틀림없이 일어났던 일들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애당초 노래방부터 말이 안 되잖아?

상식적으로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다행입니다. 아마, 피로가 누적되어 과로가 온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동안은 좀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군요.”

찰리스에서 가끔 보았던 남자였다.

근데 의사란다.

그 의사가 내게 살가운 미소를 보이며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잘 듣고 있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멋쩍어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돌아섰다.

그러곤 바로 뒤에서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니콜 교수와 함께 병원 건물을 나왔다.

그리고 난 후, 주차장까지 걸어가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딸각.

차 문을 열다 말고 니콜 교수가 날 불렀다.

“킴.”

“……?”

“아무래도 제가 너무 욕심이 앞섰던 거 같아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공연……. 빠지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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