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 경계에서 (4)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날 기다렸다는 뜻인가?
잠시 멍해졌지만, 아내 사태가 파악되었다.
물론 노인을 보는 순간 모든 게 이어진 건 아니었다.
고리가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해서 일련의 모든 과정을 파악할 수는 없으니까.
설사 그 고리가 엄청 중요하고 대단한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나한테 일어나는 일들이 노인과 관련이 있을 거란 사실.
그렇지 않다면 이 타이밍에 노인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근데 왜 온 거지?
하필이면 지금?
나 혹시…….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그러곤 곰곰이 따져보았다.
노인이 여기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내게 뭔가 알려주려는 거 아닐까?
그땐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이고 뭐고 전부 날아가 버려서 몸부터 먼저 움직였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노인은 그때 경고 아닌 경고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
그냥 즐기기만 한다고 다 음악이 되는 건 아니라는.
그러니 좀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보다 많은 고민을 하라는 주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도 비슷한 거 아닐까?
그래, 일단은 노인과 얘기를 나눠보면 알게 되겠지.
한차례 격정적으로 차올랐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빠르게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들을 정리한 후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저 이대로 죽는 건가요?”
어라? 이걸 물으려던 게 아닌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렸다.
그래서 그런가 내가 해놓고도 참 바보 같은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노래방에서 그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다고 해서 내가 꿈많은 청춘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아직은 말이다. 아직은.
그렇게 이루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벌써 죽는다고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내 질문에 노인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을 뿐이다.
젠장!
그냥 좀 대답해줄 것이지.
그저 고개 한번 내저어 주면 이쪽의 마음이 얼마나 편해질 텐데.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을 때였다.
“우리 지난번에도 봤지?”
난데없는 질문에 이번엔 내 쪽에서 웃음이 나왔다.
웃겨서 나온 웃음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나온 헛웃음이었다.
“보기야 봤죠.”
기억하고말고.
천안문 광장 콘서트 때 얼마나 당황했었는데.
뭐, 당신이 스리슬쩍 사라져서 그렇지.
신비주의도 아니고 얼굴만 한번 보여주곤 도망가버린 주제에 ‘우리 친하잖아?’하고 묻는 셈이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좀 그렇군.”
여기가 뭐가 그렇다는 걸까?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는 날 향해 바짝 다가섰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제지하거나 참견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고 보니 다들 여기에 노인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난 궁금해졌다.
대체 이 노인은 누굴까?
천 년 노래방도 그렇고. 지금 이곳에서 의료진 사이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존재.
혹시 본직은 의사인가?
웃긴다.
별 거지 같은 상상까지 하고 앉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
그래서 묻지 않았다.
노인의 정체에 대해 물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았으니까.
괜스레 설레발 쳐봐야 이쪽만 짜증 나게 될 테니.
말해줄 필요가 있으면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찔러나 볼…….
“아서라. 알려줄 수는 있는데 감당이 되겠더냐?”
흠칫.
나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이유?
모른다.
단지 노인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물어왔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순간 노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냥…….
그래, 그냥 두려웠다.
날 똑바로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질 만큼.
아씨! 사람 쪽팔리게!
그걸 이를 악물고 참고 있을 때였다.
“얘기는 올라가서 하도록 하지.”
어디로 올라가냐고도 묻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화’를 한다는 게 중요할 뿐.
노인은 신기한 놈 다 보겠다는 듯 날 보며 물어왔다.
내 팔뚝에서 바늘을 빼내면서.
그런데도 여전히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보지 않고 있었고.
“궁금하지 않더냐? 무슨 얘기를 할는지?”
“어떨 거 같은데요?”
말을 해도…….
물을 걸 물어야지. 떠벌거려서 원하는 대답을 전부 들을 수 있을 거 같으면 아마 난 지금쯤 수다쟁이가 되어 있을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노인이 바늘을 뽑고 나서 턱 하니 붙여주는 알코올 솜을 꾹꾹 눌렀다. 그러면서 낑낑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말했다.
“가죠.”
어디로 가자는 건지도 모르면서 일단 앞을 향해 비척비척 걸음을 내딛는 나를 노인이 뒤쪽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
참 이상한 일이다.
왜 건물마다 옥상에 꾸며놓은 정원 혹은 공원을 하늘 정원이라고 부르는 걸까?
하늘이랑 맞닿아 있어서?
아니면 그렇게 부르는 게 좀 더 그럴싸해 보여서?
굉장히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밤의 옥상 한편, 벤치에 앉아 쌀쌀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스윽하고 내밀어 진 손.
쭈글쭈글, 주름진 손에 들린 캔 커피를 보다가 한마디 했다.
“저 아직 미성년…….”
“그놈의 미성년자 타령은? 이놈아, 네가 아는 사람들 나이를 다 더해야 네가 살아온 시간이랑 엇비슷할 거다. 그런 놈이 무슨.”
“아씨, 너무 일찍부터 카페인 마시면 뇌 굳는데…….”
투덜거리며 노인이 내민 캔을 받아들었다.
뜨근뜨근한 게 좋네.
딸각하고 캔을 따서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노인을 보면서도 나는 캔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카페인 어쩌고 때문이 아니다.
춥잖아.
핫팩 대용이랄까.
딱히 커피가 당기는 것도 아니고.
“물이나 한 병 사올 것이지. 목마른데…….”
일부러 들으란 듯이 투덜거리자, 노인이 픽하고 웃는다.
“그놈 참. 노래방 안에선 어찌 버텼누? 그렇게 입맛이 까다로운 놈이.”
“사람은요. 적응의 동물이거든요?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요.”
“쯧. 전부 너 같은 줄 아느냐?”
말투는 투박한데, 넉넉한 웃음이 묻어나오고 있다.
어째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싶었다.
솔직히 언제고 오늘처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따져 물으려고 했었다.
그것도 멱살을 잡고 흔들며.
한데, 막상 이렇게 만나게 되니까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안 든다.
아, 물론 노래방에서 지냈던 시간들과 그 안에서 느꼈던 그 지독하리만큼 외롭고 진저리쳐질 만큼 지루하다 못해 사람 공허하게 만들던 감정들을 전부 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따져봐야 그 시간들을 되돌려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노인이 나한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땐 진짜 입 닥치고 찌그러지는 수밖에 없을 거다.
그거야말로 완전 모양 빠지잖아?
그러니 차라리 준다고 할 때 잘 받아먹고, 그 위에 보상 운운하면서 거하게 한밑천 얹어서 제대로 뜯어내는 게 백배 천배 낫다는 판단이었다.
“허허! 그놈하곤……. 그래, 이놈아. 잘 생각했다.”
음, 아까부터 느끼던 건데.
아무래도 이 영감……. 사람 마음을 읽는 게 분명하다.
봐라.
지금도 히죽히죽 웃으며 날 바라보는 거.
속으로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진짜 사기잖아요. 뭔 애를 상대로 그렇게 등을 처먹으려고 들어요?”
“큼. 농은 이쯤 해두고…….”
“칫. 괜히 할 말 없으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 또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부터가 제대로 얘기를 나눌 때란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이 먼저 물어왔다.
아니, 찔러 왔달까?
“마음은 제대로 먹은 듯하다만……. 지금 죽을 맛이지? 머릿속은 시끄럽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느낌. 거기에 연주고 노래고 간에 음악만 했다 하면 소리가 둥둥 떠다니고. 그러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알면서 뭘 물어요?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그 이유가 뭔지 속 시원하게 말해주던가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나가는 말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내뱉는 말투가 고울 수가 없었다.
“이놈이. 보따리 맡겨놨더냐? 하여간 저놈의 조동아리는 어째 지는 법이 없구나.”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 노인이었다.
씁, 성격 알만하다.
할아버지, 제가요. 그 깐깐하다던 외할아버지만 이십 년 가까이 모시고 산 사람이에요. 딱 보니까, 순둥이하곤 체질적으로 함께 있질 못하는 사람이구만.
“그래서 그게 대체 뭔데요? 소리가 진짜 살아 있기라도 하는 거에요?”
내가 대놓고 묻자, 노인은 날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그게 중요하더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게 뭐가 중요하지? 소리가 살아 있든 살아 있지 않든, 달라지는 게 뭐냐고.
그럼 뭐가 중요할까?
묻지 않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신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픽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감이 극에 달하면 그리되는 게다.”
“오감?”
이거 어째 아저씨가 했던 얘기랑 겹치는 거 같은데?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였다.
“그럼 왜 지금에야 네가 그 상태가 됐느냐? 그게 궁금할 테지. 그 때문에 내가 오늘 너한테 온 거다만…….”
“…….”
“그동안 쭉 지켜봤는데, 나쁘지 않더구나.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너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녀석을 본 적이 없다. 엘비스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지. 아마도 그 독한 성격 덕분이 아닐까 싶기는 한데…….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다.”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절대로 잘 못 듣거나 한 자라도 놓쳤다간 평생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눈까지 부릅뜨며 귀를 활짝 열었다.
그러곤 오로지 노인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때, 노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릇이 다 차버린 거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이 없는 노인.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분명 뜬구름 잡는 얘기였지만, 얘기의 시작점이다.
그만큼 의미가 있는 말이란 것.
게다가 느낌상 노인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잠시 기다리자, 노인의 말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함께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원인이 같지만은 않지. 소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 감정의 선들이 보이게 된 것은 방금 말했듯이 네놈 그릇이 가득 찼기 때문. 다시 말해 노래방에서의 시간들을 포함해 이제껏 쌓아온 것들이 일정수준에 오른 덕분이란 거지.”
시작을 무슨 스님 염불하는 것처럼 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얘기들일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이해하기 쉽게 얘기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그동안 열심히 해서 소리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말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나한텐 더없이 좋은 일인 건 분명한데…….
어째 찜찜하다.
아니 불안하다.
원인이 같지 않다라…….
그 말은 곧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걸 두고 하는 말일 테지?
그렇게 짐작하고 노인을 바라봤다.
“하여간 눈치 하난 귀신 같은 놈이로고.”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넉살하고는…….”
“아무튼, 저하기 나름이란 얘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 다만…….”
노인은 날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툭 하고 내뱉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