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 경계에서 (3)
설마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눈으론 건반 말곤 보이는 게 없지. 느낌으로는 피아노와 내가 만들어낸 소리가 어우러지며 마치 유령이라도 되듯 떠다니지. 두렵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일 터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다.
왜?
하아! 이게 미칠 노릇인데…….
흥분을 넘어 쾌감이 느껴진다는 거다.
무슨 사이코도 아니고, 누가 변태라고 욕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정도다.
나 진짜 무슨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이를테면 과대망상증 같은.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고, 순환정신병의 일환으로 불안과 황홀이 특징……. 환각을 동반한 황홀감이 나타나는 등……. 아, 뭐야!
갑자기 확 두려워진다.
그런 와중에도 점점 더 기분은 좋아지기만 하고.
아놔. 뽕 맞은 것도 아니고…….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근데 어째 점점 강도가 심해지는 거 같은데?
어어…….
크윽!
쾌감이 강하다는 게 좋기만 한 게 아니구나.
그런 와중에도 내 입에선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무지개 너머, 파랑새들이 날아다니는 그곳.
새들은 무지개 너머로 날아가는데.
왜,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어라?
이 묘하게 지끈거리는 두통은 뭐지?
머리가 살짝 아파져 오는 가운데, 손을 멈춰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다.
노래도 그만둬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고.
그런 와중에도 갈수록 머리는 계속해서 아파져 오는 중.
그것도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점점 강도가 심해지고 있다.
그와 함께 어둡기만 하던 눈앞은 점차로 밝아지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 놀라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소리들이다.
이젠 선명하게 느껴진다.
허공중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뒤섞인 채 날아다니는 소리들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분명 보이진 않지만, 확신한다.
그들……. 하아, 소리를 두고 이런 표현을 쓰다니. 아무튼, 그들은 존재하는 것이다.
뭐랄까.
요정?
페어리? 아, 이거 같은 말이었지. 머리가 빙빙 돌아서 사물에 대한 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사고의 흐름도 뒤틀려 있는 덕분에 제대로 된 생각조차 이어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페어리든 님프든, 요정이든 도깨비불이든 간에 눈앞에선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소리들이 날아다니며 아주 그냥 파티를 벌이는 중이다.
더 미치겠는 건…….
지금 내 입술 사이로 목소리까지 떨리며 기쁨에 가득 찬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거였다.
-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저 무지개 너머 파란 하늘이 펼쳐진 곳이 있겠지.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 꿈들이 이루어질 거야.
그 순간이었다.
눈앞이 급격히 흰색으로 물들었다.
화아아아악!
마치 먼 곳에서부터 덮쳐오는 강렬한 빛에 삼켜지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말았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
“꺄아아아아악!”
비명이 아니라도 상황은 분명했다.
도준이 피아노를 치다 말고, 정확히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도준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내리며 피아노 건반을 두들겼고, 그 탓에 가게는 한순간 혼란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도 도준을 탓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여전히 여기저기서 탄식과 비명은 들려왔지만.
아무튼, 찰리는 도준이 쓰러지는 걸 보기 무섭게, 그 뚱뚱한 몸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도준을 흔들어 깨우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가게 안, 한쪽 테이블에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나섰다.
“함부로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
“의사입니다.”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곤 도준에게 다가온 남자는 상의 윗주머니에서 만년필처럼 생긴 플래시를 꺼내더니, 도준의 눈을 까뒤집어 살피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어떻게…….”
그러곤 어찌할 줄 모르는 찰리에게 말했다.
“먼저 흥분부터 가라앉히시죠. 맥박도 정상이고, 외상도 보이지 않으니, 너무 그렇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의식이 없군요. 음, 혼수상태 같기도 하고…….”
“예?”
“일단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근데, 이분……의료보험이?”
“그,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잠시 찰리를 바라보던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병원일 터였다.
그러는 동안, 찰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했다.
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도준이 별다른 내색도 안 하기에 티를 안 내곤 있었지만, 자신이 가게를 계속할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이 건물의 주인이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동안 든 정이 있지.
아무튼, 지금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가였다.
자신이 보호자로 나서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러기엔 도준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찰리가 눈을 빛냈다.
곧바로 전화를 거는 찰리.
“거기 줄리아드죠?”
몇 번의 전화 끝에 도준의 지도교수를 알아낸 찰리가 니콜 교수와 통화할 수 있었던 건, 막 엠블란스가 와서 도준을 싣고 있을 때였다.
***
집에서 편안하게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음악을 듣고 있던 니콜 교수에게 있어서 그 소식은 정말이지 청천벽력 같았다.
그나마 아직 잠들고 있지 않아서 전화를 바로 받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녀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왔지만, 그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하얗게 물들어 있어서 아무런 생각조차 못했으니까.
그렇게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차를 몰고 향한 퀸즈 병원.
끼이익.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아, 주차장에 대충 차를 던지듯 세워놓곤 차 문을 열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병원 응급실.
“키…훅훅…킴……. 킴이요!”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응급실 문턱을 곧바로 넘지 않고 접수처에 먼저 환자의 이름을 댄 것만 해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일 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풀네임을 말해야 했다.
“보호자분, 환자분의 성함을 정확히 말씀하셔야…….”
“킴도춘!”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처럼 제대로 말하기 위해 애쓸 여력도 없었다. 덕분에 발음이 새어나가 이상하게 들렸을 만도 한데, 다행히 간호사가 알아들은 눈치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잠시 후 간호사를 따라 응급실로 들어간 니콜 교수. 그녀를 먼저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찰리였다.
오늘 처음 보는 사이지만, 이미 도준에게 들어서 누구일지 짐작이 가능했다.
“제게 전화 주신 분이신가요?”
“아! 킴의 지도교수님이시군요. 처음 뵙습니다. 찰리라고 불러주세요.”
***
뚜……뚜……뚜……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고, 그 때문에 응급실 안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작은 흑백의 스크린에 포물선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는 소리만이 그녀의 귓가에 들려올 뿐이었다.
바이탈 사인은 정상이란 얘기.
그 속에서 니콜 교수는 조금 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걸 기억해내곤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검사결과가 다 나온 건 아니지만, 의사의 말로는 아직까진 별다른 이상이 있어 보이진 않는단다.
갖은 검사를 다 했지만, 파스가 덕지덕지 붙은 손가락을 빼곤 상처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몸에 전혀 이상이 없는데 왜 쓰러진단 말인가?
아니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오늘 낮에 있었던 합주가 도준에게 그만큼 부담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하아……!”
한숨이 나올 수밖에.
이러다 영영 못 깨어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도준을 다시 한차례 바라본 그녀는 차분하게 마음먹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러면서 생각했다.
도준의 가족들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좀 더 지켜본 뒤에 하는 게 낫겠지.’
아직 의사들도 확진을 내린 상태가 아니니까.
혹시라도 그 사이에 도준이 깨어날 수도 있고.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 때였다.
“보호자분 되십니까?”
가운을 걸친 젊은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예. 제가 킴의……. 보호자입니다.”
지도교수라고 하려다가, 그럼 괜스레 복잡해질 거 같아서 일단 보호자를 자청하는 니콜 교수였다.
“찰리는 돌아간 모양이군요.”
“제가 돌려보냈어요.”
끝까지 가지 않으려는 찰리였지만, 니콜 교수는 여긴 자신이 보고 있을 테니 우선 돌아가라고 간신히 설득해 보냈다.
자신이야 내일 꼭 학교를 나가야 하는 게 아니지만, 찰리는 하루만 가게 문을 닫아도 생계에 타격을 입을 테니까.
“약물 투여 중이니까,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도 깨어나지 않으면 바로 입원조치하도록 하죠.”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셔서 서류에 사인들 좀 해주십시오.”
의사가 한쪽을 가리키자, 니콜 교수는 걱정스럽다는 듯 도준이 누워있는 침상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의료진들이 보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난 뒤였다.
응급실 한쪽에 놓인 침상 위.
도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누구도 못 봤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다지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눈꺼풀이 떨리는가 싶더니 스르륵 떠졌으니까.
***
“으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신음이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여긴 대체 어디지?
새하얀 천장이 먼저 보인다.
“끄윽!”
그리고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리자, 통증이 밀려들었다.
근육이 빡빡한 게 꼭 삼일 밤낮으로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만 같았다.
먼저 내 눈에 비친 것은 팔뚝에 꽂힌 채 알 수 없는 약물을 밀어 넣고 있는 링거줄이었다.
그다음은 여기저기에 놓인 침상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고.
병원?
의사와 간호사란 걸 알아채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지금 내 인지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라는 거겠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분명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
아! 쓰러진 거구나!
그래서 찰리가 병원에 연락해서 여기로 날 옮긴 모양인데.
하아! 진짜 별짓을 다 하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쉴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다.
게다가…….
아니, 왜 나한테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소리가 살아 움직이고……. 아니, 그렇게 느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화악하고 빛이 뿜어지며 쓰러졌다?
음……. 정말 이상한 일이잖아?
무슨 일든 전조라는 게 있는 법이다.
사람이 갑자기 아프지 않듯이.
아,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때론 통증이라곤 손톱만큼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는 경우도……. 아, 씨! 상상을 해도!
나도 모르게 덜컥 내려앉는 심장.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일단은 어떻게 된 사정인지부터 알아내는 게 먼저겠지.
끄응!
몸을 일으켰다.
아, 더럽게 아프네.
팔뚝에 꽂힌 바늘 때문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진짜 온몸이 쑤셔 미칠 것 같았다. 진짜 한 며칠 골방에 갇혀서 누군가한테 죽도록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끙끙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진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안 보인다더니.
방금까지 앞에서 잘만 알짱거리던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왜 저렇게 멀리 있는 거야?
그나마 제일 가까운 데 있는 의사…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뒷모습만 보자면, 머리가 하얗고 체구가 크지 않은 걸로 보아 나이가 지긋하지 않을까 싶은데…….
교수인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닥터? 선생님? 큼, 그렇다고 티쳐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미국에서 병원을 와봤어야 알지.
에라 모르겠다.
“여기요.”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다시 한 번 크게 불렀다.
“여기요!!!”
그 순간이었다.
돌아서는 남자.
아니, 노인이 날 바라보았다.
흠칫!
그는…….
천 년 노래방?
놀란 눈이 되었을 때, 노인이 말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네.”
속삭이는 듯 말하고 있었음에도 내 귀에는 천둥처럼 들려오는 노인의 음성이었다.
“자네가 깨어나기를.”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노인에게서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